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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차 Jan 21. 2022

먹고 기도하고 징징대라

인생에 늦은 건 없다
'늦었다는 착각’만 존재할 뿐

어떤 일본인이 44살에 한국어 공부 시작해서

51살에 자막 감수자가 되고

54살에 번역 실무자로 합격했다는 이야기가

지금 트위터에서 화제다.


거기에 또 리플이 달린다.

50대 초반에 가야금을 시작해

중반에 대학에서 가야금 전공하고

60대에 문화센터 강사가 된 사람도 있다고


와 진짜 멋져! 이런 이야기는 괜히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진다.

그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빠른 편이잖아?

하고 용기를 내보면서도

마흔 넘어 영어를 배우는 일은  좌절의 연속이다.

아니 배우는게 아니라 정확히는 뜯어고치는 일이다.

어제 배운걸 오늘 까먹는,

즉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느낌은 어쩔 수 없다.

설마 전생에 큰죄를 지어 받는 천벌인가?

산밑에 있는 거대한 돌을 정상까지 밀어 올리는 벌을 받은 시시포스(그리스 신화 속 영웅)처럼 그 심경이다.

끝없는 반복의 저주! 제발 이 저주를 푸는 법을 알려주세요!


이민 와서 그 생활에 만족을 하느냐 아니면 다시 돌아가느냐는

영어의 유창성에 달려 있다고 한다.

그런데 '아니요, 저 같은 경우는 영어를 잘 못해도 만족합니다만'

아무래도 그 이유가

엘에이가 아니지만 하루 종일 영어 한마디 안 하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커피 주문은 어플로 하면 되고 단골 밥집도 키오스크로 주문한다.

그런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는데

왜 나는 영어를 정복하고 싶은 걸까?


지긋지긋한 영어공부에도 추월차선이 있네?

“강아지들은 좋겠어

영어공부 안 하고 꼬리만 흔들면 되잖아

부럽다 너희 팔자“


차 타고 가다가 창문으로 고개를 내민 앞차의 강아지를 보고 무심결에 내가 한 말이다.

오늘 아침 유튜브 영어 발음 강의를 듣는데

그 강의도 지긋지긋한데 그걸 못 알아듣는 나도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이 재미없는 걸 도대체 누가 이렇게 끝까지 보는 걸까?

L과 R 발음의 차이, 내겐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다를 뿐 비슷하게 들린다고

남편에게 하소연을 했다.


남편은 운전 중에 갑자기 ‘으얼~~~~~’을 소리 내면서

따라 하라고 R 발음을 연습시키는데

성인 둘이서 이러고 있는데 갑자기 배고파서 예민해진 맹수가 된 것 같았다.

너무 빵 터져서 웃는데 이렇게 웃어본 게 언제지?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들어봐도 남편이 하는 발음은

애초에 혀가 짧은 사람만이 낼 수 있는 것처럼 들렸다.

이건 유아기에 미국에 살지 않으면

죽어도 뜯어고쳐지지 않는 발음 같았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너는 내 기분을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다’라는 표정을 지었다.

내 기분을 아는 사람은 오로지~

미국 오면서 커리어 끊기고 영어 발음을 모두 새로 싹 뜯어고쳐야 하는 데

아무리 해도 늘지가 않아 지긋지긋한 마흔 넘은 여자라면 이해할지도...


남편은 ‘이걸 왜 구분 못하는 거야?’라는

진짜 답답한 표정으로

“그러니까 잘 봐 롱다리 할 때 롱!

으르렁할 때 렁~”


어머나 세상에!

남편이 이렇게 가르쳐 주는데

방금까지 안 되던 발음이

어째서 왜 때문에 되어버리는 거지?

고작 이거 하나 알게 되었다고

알기 전의 나와 알고 난 후의 나는 전혀 다르다.


진짜 L 발음은 롱다리를 롱

R발음은 으르렁의 렁을 상상하며 했더니

바로 발음이 고쳐졌다.


초등학교 때 <윤선생 전화영어>에서 분명 저걸 배웠을 텐데

그 당시 원리를 제대로 모르고 대충 넘어갔을 거다.

그러니 지금 이 고생을 하는 것일 텐데

그 당시에 남편이 방금 알려준 롱다리와 으르렁의 비법을 알았다면

평생 잊히지 않았을 거다.


구체적으로 상상하니 모든 게 달라졌다


핵심은 상상이었다.

머릿속으로 생생하게 그리는 것

가끔은 구체적인 상상이 인생의 어떤 문제를 쉽게 해결해 주기도 한다.

그 하기 싫던 윗몸일으키기도 그랬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말

“배에 완두콩이 있고 그걸 으깨버린다고 생각하고 쥐어짜 보세요.”

그 말을 듣고 나는 진짜 완두콩을 가루고 만들어 버리겠다는 상상으로

윗몸일으키기를 했더니 정말 큰 효과가 있었다.


또 구체적인 상상이 여러 사람의 인생을 구하기도 했다.

“음식 쓰레기 버리러 나갔다가

다시 들고 집에 오면 어떻게 되죠? “

내가 던지는 똑같은 질문에 답은 다양하다.

“냄새나죠”

“우웩이죠 “

자신에게 상처를 줬음에도 연인을 못 잊는 구간이 누구에게나 있다.

나의 부캐인 사주상담을 하다 보면 늘 저 질문을 하게 된다.

“그냥 잊어버리세요.”

“그냥 끊어내세요.”

이런 말로는 도저히 말을 들어먹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저 비유를 하게 됐는데

처음에 너무 잘 먹혀서 계속하게 됐다.

나의 쓰레기 컴백 이론으로

막연한 백 마디 말보다

구체적인 상상만큼 좋은 해결책은 없다는 걸 느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멱살을 잡고 남편에게 “이걸 왜 진작 안 알려줬어?” 할 뻔했다.

내가 그동안 이걸로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토록 유튜브 강의를 들어도 해결이 안 됐는데(먼산)


나는 지금 대단한 지름길을 발견한 것만 같다.

<부의 추월차선>이라는 책 제목처럼

<영어의 추월차선>도 나왔으면 좋겠다.

방금 나는 발음의 추월차선에 올라타 버렸다.

인생의 모든 것에 추월차선을 타는 법을 알고 싶다.

그건 아무래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힘 같다.

그리고 또 하나가 더 있다.


먹고 사랑하고 징징대라

왜 안 알려 준거야?라고 따졌더니

난 이걸 물어본 적이 없었단다.

너무 당연하게 이미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단다.

사실 나도 그 발음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걸 잘 모르고 살았다.

그냥 주구장창 연습하면 될 줄 알았다.

단 한 번도 이 발음이 구별이 안 돼서 난 이런 게 힘들어하고 도움을 요청해 본 적이 없었다.


좋은 이웃이 되려면 도움을 요청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말 안에는 ‘당신은 이것을 해결할 지혜와 능력이 있다’라는 믿음이 포함된 거라고 한다.

정말로 도움을 요청하면 그걸 요청받은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게 된다.

거기다 성취감까지 느끼게 해주는 1석2조의 효과가 있다.

내 남편에게 영어를 잘 가르치는 능력이 있는지 몰랐다.

어제 몰랐던 걸 오늘 알게 된다.

롱다리 으르렁 발음법은 그렇게 탄생했다.

내가 힘들다고 징징대는 순간이 있었기에 나올 수 있었다.


징징대는 순간이 필요한 이유는

며칠 전 읽은 책 메이 머스크(일론 머스크 엄마) 책에도 나왔다.

고객과 전화통화가 아주 중요한 그는 전화기가 고장 나 수입이 계속해서 줄어들고

급기야 모임에서 동료들이 자신의 전화가 항상 통화 중이라고 말하는 순간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동료들이 새로운 일자리를 너무 많이 소개해줘서

급기야 전화기가 전혀 필요 없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위기를 드라마틱하게 넘겼고

그랬기 때문에 지금의 일론 머스크도 탄생할 수 있었을 거다.


좋아하는 말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가

<먹고 기도하고 징징대라>로 잔잔히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전 18화 미국은 전쟁 중에도 이걸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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