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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차 Nov 03. 2021

미국은 전쟁 중에도 이걸 먹는다.

전쟁 덕후랑 산다는 걸 종종 실감할 때가 있다.

한 참 바쁘게 저녁을 차리는 내 뒤통수에다가 대고

남편은 오늘도 퀴즈를 내느라 바쁘다.


나는 손으로 동시에 여러 개 요리를 만들고 있기 때문에

그 입을 좀 다물어 줬으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치 제로 남편은

자기가 오늘 처음 알게 된 걸 말하고 싶어 안달이 난다.

“일본 놈들이 전쟁 중에 출세하려고 뭘 모은 줄 알아?”

“몰라 그 와중에 뭘 모아.”

“사람을 죽여서 귀와 코를 잘라서 자루에 담아서 가져갔데

 얼마나 많이 죽였냐 이거지 “


나는 마침 오징어 볶음을 하고 있었다.

오징어를 볶는데 그 이야기 때문에

내 눈에 오징어가 귀와 코로 보였다.

그렇게 어이없이 요리를 망쳤다.


결혼이란 내 관심분야와 전혀 상관없는 세계가 내 일상으로 들어와 버린다.

그리곤 알고 싶지 않았던 세계로 빨려 들어가기도 한다.


남편은 보통 소파에서 뒹굴면서 전쟁 관련 다큐를 본다.

일본군이 베트남에서 죽음의 강을 건널 때 비가 계속 와서

일반 병사들은 굶어 죽고 그 죽은 병사의 인육을 먹고

간부들은 살았다는 증언 인터뷰를 보고 있었다.

그 인터뷰를 보는 것만으로도 먹을 게 풍요로운 시대에 태어난 게 감사했다.

“아니 커피도 못 마시는데 저기서 어떻게 버텨?”

커피 타령을 하는 우리들은 이제 커피가 생명수가 되었다.

밥은 걸러도 커피는 생략이 안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전쟁 중에 미국만이 배로 부대에 나눠주는 게 따로 있었는데 그게 뭔 줄 알아? “

“담배 아니겠어?(먼산)”

“아이스크림이야.”

그 난리 통에도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배가 따로 있었다고 한다.

미 해군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태평양 과달카날 섬 부근의 바다에 괴상망측한 함정 한 척을 띄웠다.

이 콘크리트 함정은 오로지 아이스크림 생산용으로 만들어진 거였다.

와 진짜 힙하다.


군인들의 사기 증진을 위한 거였다는데

진짜 아이스크림이 전쟁에 어떤 작용을 했는지 궁금했다.

자료를 찾아보니 1차 세계대전에 출격한 조종사의 귀환율은 높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스크림을 제공한 2차 세계대전엔 조종사들이 낙하산으로 탈출해

바다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마지막 디저트로 아이스크림을 주고 다시 생존해 돌아와 먹으라는 기원)

이렇게 구출된 조종사 소속 부대에서는 고마움의 표시로

조종사를 구한 구축함이나 소형 선박 수병들에게 아이스크림 20 갤런을 선물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한편 유럽에서는 설탕과 우유가 부족해 아이스크림 생산 금지령이 내려졌다.

독일과 이탈리아 군이 “아이스크림이나 먹는 놈들” 이라며  미국을 욕 했다는데

와 나 같아도 진짜 부러워서 쌍욕 나왔을 거 같다.

미국은 애 낳고도 바로 아이스크림이 병원에서 나온다.

낳기 직전에도 아이스크림을 물고 있는 산모의 유튜브를 보고 신기했다.

그만큼 아이스크림을 사랑하고 아이스크림으로 에너지를 얻는 종족 같다.


가끔 팔다리 없는 전쟁 용사들과 마주치게 된다.

그들의 얼굴은 언제나 자랑스러운 표정이다.

그때마다 기괴한 모습에 조금 놀라고 했지만 이제는

 ‘아 저 사람도 혹시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전쟁한 건가? 그 맛이 어땠을지 궁금하다'

그런 생각이 든다.


언제나 수동적으로 남편이 들려주는 전쟁 이야기만 들었다.

이 아이스크림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전쟁에 빠져들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라는 책을 읽고

나 역시 전쟁 덕후가 됐다.

이제 나도 전쟁 퀴즈 한 트럭이나 낼 수 있다.

이 책의 특별한 점은 전쟁 중 여성의 존재를 그렸다는 점이다.

단 한 번도 전쟁 속의 여성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책에는 여성이기에 겪고 또 극복해 내 가야만 하는 전쟁 상황들이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책 제목이 맘에 안 들어서 줄곧 읽지 않았지만

한번 읽기 시작하면 놓을 수 없는 책이다.

이 책을 손에 들자 내가 전쟁 한가운데 이미 서있다.


다수를 살리기 위해 우는 아이를 물속으로 넣어야만 했던 엄마,

출산을 도와준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

방금 태어난 아이 이름을 안나(도와준 사람의 이름)로 짓는 엄마.

붕대가 부족해 속옷을 찢어 치료를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붕대로 웨딩드레스를 만들기도 하는 낭만도 있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병사가 가슴 한 번만 보여 달라는데,

그 말을 내뱉자마자 바로 죽어 버렸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내 일상을 좀 더 디테일하게 음미하게 된다.

작은 초콜릿이나 커피 한잔도 감사하게 된다.

무미건조하고 지겨운 반복의 일상도 새로워진다.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바르는 감촉 하나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다.


 원대한 꿈같은 거 없어도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고맙고 전쟁 통을 생각하면 ‘난 무엇이든 할 수 있어!’가 된다.


저녁으론 미군부대에서 나온 음식쓰레기로 만들어졌다는 부대찌개를 끓였다.

이 음식은 그 자체가 극복을 의미하는 대단한 스토리를 가졌다.

이걸 처음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대한민국의 아주 보통의 여성이었을 거다.

아줌마 특유의 아우라를 풍기며 모든 재료를 다 때려 넣는 퍼포먼스 그 자체가 예술이다.

전쟁을 겪고 찢어지게 가난했던 나라가

지금은 전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파워를 가졌다.

지구인들은 영화‘기생충’을 보고 BTS 노래를 따라 부르며 오징어 게임 속 달고나를 먹는다.

어쩌면 이건 오래전에 예견된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부대찌개라는 걸 만들어 먹는 나라에서 뭐든 못하리?


후식은 당연히 아이스크림으로 정했다

그냥 아이스크림 말고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쏠트 앤 스트로> 아이스크림으로..

지금 전쟁 중이라면 이게 도대체 어떤 맛일까?

갑옷 같았던 마스크마저 귀엽게 느껴진다.

좋은일이 생기는 것보다

나쁜일이 없는  고요함이 온전히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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