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움과 가벼움의 모순에 갇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이재룡 옮김, 민음사, 2025.
책을 읽고 기록을 남기기로 한 이후 처음 읽는 '고전'이다. 이 책에 대해 내가 어쩌구저쩌구 어쭙잖게 해석을 남기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이미 불문학 전공자들이 충분히 했을 것이고 하고 있고 또 할 것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소설의 흐름을 잡는 것이 힘들었다. 흔히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이 도입부가 어렵다고 하는데, 나는 이 소설의 도입부가 쉽지만은 않은 장애물이었다. 그래도 찬찬히 줄거리를 따라 읽어나가다 보니 복선회수(?)가 되는 부분에서부터 확 몰입되었다.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 고전이라고 한다면, 충분히 고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무거운 삶의 가벼운 공허함
쿤데라가 말하는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한 모순, "무거운 것-가벼운 것"의 모순(13쪽)이란 무엇일까. 이 소설은 곧 그 모순이 무엇인지 탐색하고 풀어가는 과정이다.
삶을 붙들고 이끄는 위대한 사명과 목적의식은 '무거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무거운 것 위에 설 때 온갖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고 삶을 이어나갈 수 있다. 지고지순한 사랑을 탐색하는 것이든, 직업적 소명을 추구하는 것이든, 역사를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든 개인적 차원에서부터 사회적, 공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간에 한 원칙을 일평생 확고부동하게 지키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분명한 삶의 목적 아래에 흔들림 없이 살아간다. 확고한 목적의식이 있기에 어떤 것을 얻고 이루기 위해 거침없이 나아가며 꺾이지 않고 행한다. 부러울 정도로, 경탄스러울 정도로 강인하고 당당하고 안정적인 사람들이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원해야 할지, 무엇을 원할 수 있는지를 몰라 헤매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강인함과 확고부동함은 찬탄의 대상이 되며 그들을 영웅적 존재로 치켜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쿤데라는 묻는다. 어차피 삶은 한 번뿐 아니냐고. 한 번뿐인 것은 끝나면 그걸로 끝이니 전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하지 않느냐고.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18쪽) 아니냐고. 아무리 누군가 확고부동한 원칙을 세우고 굳건히 지킨다 한들, 죽으면 다 끝이다. 그가 살아생전 추구했던 원칙이나 사명은 무의미해진다. 한 번뿐이기에 어떤 방향의 삶이, 무엇을 행하는 삶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수도 없는데 대체 무슨 근거로 어떤 가치를 삶을 관통하는 원칙으로 삼는단 말인가?
심지어 삶이 끝없는 우연의 반복으로 만들어지고, 심지어 운명적으로 예정되어 있던 것처럼 보이던 사랑마저도 여러 우연이 겹친 끝에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이라면, 그런 삶을 아무리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사명이니 목적의식이니 위에 올려두어도 깃털처럼,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것은 어쩔 수 없다.
확고한 목적의식과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달리 말하자면 삶이 그 무거운 토대에 종속되어 있다는 의미다. 그 토대에서 벗어나서는 살 수 없다. 그런 삶을 상상하지 못한다. 살아 있는 내내 그 토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이 정말 사명에 따라 사는 것일까? 사실은 사명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문이 들면 이제 토마시처럼 문득, "그때까지 자신의 소명이라 믿었던 모든 것을 털어 버렸을 때 삶에서 무엇이 남는지 보고 싶은 욕망"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323쪽).
하지만 이런 생각에까지 다다르면 너무나 공허하고 허무하다. 한 번 뿐이어서 무의미한 삶을 대체 살아서 무엇하랴?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개인으로서는 죽어도 공동체로서 사는 삶을 선택하기도 한다. 어느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절대적으로 옳은 방향이 있다고 믿고, 어떤 질문에 이미 정답이 주어져 있다고 믿고, 의심될 수 없는 숭고한 가치가 있다고 믿으며 공동체를 그런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데 헌신함으로써 하나뿐인 삶의 허망함과 가벼움을 보완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공동체적 선의 추구도 가볍기 짝이 없다. 개인의 삶이 반복되지 않듯 역사도 반복되지 않는다. 반복이 없기에 개인이 살아야 했던 옳은 삶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없듯이 어떤 공동체에게 최선의 선택지가 무엇인지도 판단할 수 없다. 인간 공동체의 역사적 사건 또한 여러 수많은 우연이 겹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우연의 결과를 마치 공동체가 반드시 도달해야 했던 목표, 이루어야 했던 성과, 또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사건으로 규정하고 공동체가 다시 그런 업적을 이루어야 한다고 또는 그런 사건을 피해야만 한다고, 그런 길을 가야만 한다고 또는 그런 길을 가서는 안된다고 믿는 것도, 사실은 인간 역사의 반복 불가능성을 회피하는 행동일 뿐이다. 그렇게 회피하다 보면, 그래서 역사에 어떤 목적이 있다고 확고부동하게 믿는다면, 자신이야말로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발견했다고 믿는다면, 그런 사람들이 곧 "범죄적 정치 체제"(291쪽)를 만든다.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로 공동체를 인도한다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을 처형하며 살인자가 된다.
그러나 그렇게 힘차게 구호를 외치며 나아갔던 장엄한 행진의 끝에는 기다리는 것은, 침묵뿐이다. 모든 장엄함, 엄중함, 사명감, 목적의식, 역사적 소명 등등 무거운 것이 침묵 앞에서 무가치하고 공허한 것으로 판명 난다. 무거운 삶은 가벼운 공허를 만나 침몰한다.
가벼운 삶의 무거운 공허함
자, 그러면 삶이란 이토록 무의미한 것이고 공허한 것이니, 되는 대로 살자. 그것이 쿤데라가 하고 싶은 말일까?
이런 생각이 들 때 문득 소설 속의 또 다른 주인공인 사비나가 떠오른다. 사비나는 무거운 것과는 벽을 쌓은 인물이다. 그녀는 모든 무거운 것을 거부하고 배반한다. 부모, 남편, 사랑, 조국까지, 이른바 고귀하고 숭고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가치와 대상을 배반하고 자유롭게 원하는 곳으로 향한다. 어떤 가치나 대상에도 헌신하지 않고 그저 배신하려는 욕망에만 몸을 내맡겨 살아왔다. 그런 그녀가 마지막에 맞닥뜨린 것은, 공허였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204쪽)이었다.
사명, 목적의식, 이상, 소명 등등 그 모든 무거운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나면, 가볍기는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 이제 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존재하는데 이 존재를 유지해 줄 아무런 토대가 없다. "지상의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겨우 반쯤만 현실적이고 그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13쪽) 무거움을 추구하다가 헛됨을 깨닫고 공허해졌는데, 무거움을 내버리고 가벼움을 따르자니 또다시 막막한 공허에 직면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허와 허무에 직면해 본 이는 알 것이다. 그 공허와 허무가 얼마나 무거운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내일 눈을 뜨는 것이 두려운 이가 느끼는 공허함과 허무함은 어느 목적의식이나 사명감이 주는 무게보다 무거운 것이다.
누군가가 헛된 목표를 추구한다고 비웃는 것은 쉽다. 누군가의 행동이 아무 의미 없다고 조롱하는 것은 간단하다. 어차피 무의미한 삶과 무의미한 역사의 흐름에서 사명의식이니 소명이니 따위는 집어치우고 허무에 잠겨버리는 것은 가장 편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누군가가 무언가를 바꿔보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설령 그 행동이 아무런 무게도 없어 어떤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구경거리에 불과할지라 하더라도, 다른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행동과 구경거리 사이에서 선택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아서, "구경거리를 제공하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사이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구경거리를 제공할 수밖에 없게 선고된 상황이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442쪽). 그는 그런 상황에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공허 속에 갇히는 대신 구경거리가 되더라도 무언가를 하기를 선택했다. 그의 존재를 가볍게 비웃고 조롱할 수 있을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벗어나려고 무거움을 추구하려는 이의 버둥거림이 단순히 조롱의 대상일까.
이렇게 소설이 끝날 때까지 무거움과 가벼움 그 무엇 하나 긍정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쿤데라가 말한 것일지도 모른다. 무겁고 가벼운 것이 가장 신비하고 미묘한 모순이라고. 무거워지려다 한없이 가벼운 공허에 빠지고, 가벼워지려다 한없이 무거운 공허에 빠진다.
존재는 너무 가벼워 만족할 수 없어서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사랑을 찾지만 누구도 사랑 속에서 만족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인물들이 무언가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 자체가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인의 존재는 그 자체로는 너무 가벼워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무언가, 즉 '사랑'을 더 요구하기 때문이다(491쪽).
존재의 가벼움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만을 망치지 않는다. 개인 내면까지도 망친다. 사람은 '존재'만으로는 아무것도 설명되지도 정의되지도 않는다. 수식어가 필요하다. 직업, 나이, 학력, 취향, 성별 등등 존재를 설명하는 수식어가 필요하다. 수식어를 뒷받침하는 행위가 필요하다. 수식하는 행위의 결실이 필요하다. 끝없이 행위함으로써 자신의 가벼운 존재를 붙잡아야 한다. 그러려면 나아가고 새로워지고 변화해야 한다. 어떤 상태에 계속 머물러 존재할 수 없다. 어떤 존재이기를 반복할 수 없다. 그렇기에 행복할 수 없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492쪽)이기 때문이다. 반복하는 삶에 머무를 수 없는 인간은 고로 행복할 수 없는 존재다.
아, 정말이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무엇도 되지 못하는 인간이라니. 그토록 애틋하고 지고지순하게 여겨지곤 하는 감정인 사랑마저도 상대의 존재만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해 계속 상대로부터 무언가를 더 받기를 요구하며 다투는 것에 불과하다니.
쿤데라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존재하는 이상 벗어날 수 없는 모순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점 중 하나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반동적' 행위를 억압하기 위해 소련군이 침공했던 '프라하의 봄'이다. '공산주의 이상'이라는 무거움, '정치적 자유'라는 무거움이 서로가 자신이 진리라고 주장하며 대립하던 시대다. 전체주의는 곧 무거움이다. 사명과 목적과 이상을 강제하는 것이 전체주의고 공동체의 한 형태와 역사의 한 방향을 절대적 이상으로 규정하고 '그것이 왜 이상이냐'라고 묻는 질문을 억압하는 것이 전체주의다. 공산권 바깥 '자유진영'도 정도는 다를지언정 무거움을 숭상하기는 매한가지다. 무거움의 이름이 공산주의가 아닐 뿐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인물들은 그들이 살던 시대가 요구하는 무거움과 개인적 존재에서 비롯되는 무거움 사이에서 번민하고 갈등하고 헤맨다. 공적 영역에서든 사적 영역에서든 무거움과 가벼움을 좀처럼 분리할 수 없는 모순에 갇혀 있다. 소련은 해체됐고 철의 장막은 무너졌지만 이 모순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은 채 여기 남아 있다. 인간 존재의 본질 자체는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무거워져야 할까?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공허에 빠지지 않게 무거워지려면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가벼워져야 할까? 너무 가볍게 떠오르다가 무거운 공허에 짓눌리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이 질문의 답은 누구도 영영 찾지 못할 것이다.
인생을 음악과 작곡에 비유한 쿤데라의 표현(91-92쪽)이 기억에 남았다. 우리는 자신만의 미적 법칙에 따라 그때그때 자신의 삶을 하나의 테마에 맞추어 작곡해 인생이라는 악보에 각인한다. 무거움과 가벼움의 모순에 갇혀 매 순간 번민하면서도 각기 각자의 음악을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아마 삶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