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넓고 또라이는 많다
입사 후 모든 교육을 마치고(드디어 모든 퀘스트를 통과했다!) 부서에 배치되면 상사들이 나에게 가장 먼저 시키는/알려주는 것은 무엇일까? 업무에 관한 교육 또는 실무?(그렇다 신입 사원 교육이라는 것을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받았지만 또 교육이 필요하다!) 아니면 회사 생활에 필요한 꿀팁?(쓰레기 같은 상사한테는 이런 거 안 받는 게 정신 건강에 나을지도) 땡! 모두 틀렸다. 정답은… 바로 방치다.
대기업이란 데가 원래 그렇더라. 누구 하나 없어진다고 일이 멈추지도 잘못되지도 않는다. 사라진 인력이 보강되어서냐고? 그럴 리가. 정답은 누군가는 땜빵을 하기 때문이다.(대부분의 땜빵은 군말 없고 참을성 있으며 일을 잘 그리고 열심히 하지만 성과를 인정받지는 못하는 사람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누구 하나 새로운 들어온 신입 사원 교육은 피하고 싶어 한다. 왜냐고? 시간은 한정적이니 교육 시간만큼 내 일이 밀리는데 성과로 인정되진 않으니까. 그러니 저 위에 있는 누군가가 지시하지 전까진 신입사원은 방치되다가, 그분이 왜 신입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라고 하면 그제야 OJT라는 게 시작된다.(물론 교육 담당이 있어 각 파트에 신입 사원 교육을 위한 커리큘럼을 요청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에 열과 성을 다하는 사람을 난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최소 8시간(점심시간을 뺀)의 그 긴 시간 동안 신입 사원은 뭘 할까? 그나마 컴퓨터 같은 사무실 자리 세팅 하는 기간은 시간이라도 빨리 가지만 그것들은 한나절이면 끝나고 그 후엔 그냥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있게 된다. 군기 바짝 들은 신입이 어쩌면 전부 모니터링되고 있을지 모르는 회사 컴퓨터로 업무 시간에 딴짓을 한다는 건 꿈도 못 꿀 일이니(보안이 철저한 회사다) 해봐야 동기들이랑 사내 메신저나 할 뿐. 하지만 동기들과 그리 유대관계 쌓고 싶지 않은 나 같은 사람은 말 그대로 방치기간=고역의 시간이었다.
그러다가 회의 시간이 되면 아직 아무것도 모르지만 어쨌든 같이 일하게 된 신입도 데리고 들어간다. 그래도 방치보단 나으니 약간은 긴장하며 쫄래쫄래 따라 들어간 그곳에서 한 다리 건너의 사람들에게 또다시 호구조사를 당하고(그래, 이 정도면 한국식 스몰토크라 체념하자), K-예절 패치된 나는 좋은 인상을 주어야 한다는 강박에 방글방글 웃으며 물음에 또 솔직히 답한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받아준다. 왜? 어쨌든 신입에겐 아직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고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하니까. 하지만 어디든 강력한 또라이는 꼭 있는 법.
어느 날의 스몰 토크는 자녀들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늘 하는 이야기인 애들 학교가 어떻고 학원 세팅은 어떻고 등등.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나는 또다시 발동된 K-예절정신에 홀려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이것이 중요한 포인트였는데!) 옆에 앉은 분(과장급)에게 자녀가 어떻게 되시냐고 물었다.(다시 한번 어리고 순진했던 나여...) 대부분 사람들은 자녀들 얘기를 물어주면 좋아했던지라 별생각 없이 한 질문이었는데(보통 나는 남의 개인사에 별 관심이 없으며 평소라면 절대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돌아온 대답은 이제까지 들은 적 없는 것이었다. 그건 바로 ‘니가 뭔데 우리 애들에 대해 물어봐?’. 이 문장을 들은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며 입에서는 즉시 ‘아,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당연히 그 시점에 스몰토크는 뻘쭘하게 끝이 났고.
만약 며칠 후의 대화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에피소드에서 ‘역시 내가 선을 넘었던 거야. 왜 평소답지 않게 오지랖을 부려가지고는. 앞으로 조심하자’라고 나 스스로에게 주의를 주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또다시 회의를 위해 모인 날, 하필 또 그 사람의 옆에 앉게 되었다.(그렇다. 모두의 기피 대상이었다) 조용히 회의 준비를 하고 있던 내게 그는 불쑥 자신의 핸드폰을 들이밀며 말했다. ‘우리 애 하교하는 거 볼래?’ 그가 보여준 핸드폰 화면에는 아이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정신없는 영상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채 그 사람 얼굴을 보았고 다시 머릿속이 하얘지며 생각했다. ‘도대체 뭘 보란 거지? 그리고 그 뿌듯한 웃음은 뭔데?’
나중에 알았다. 그의 아이들이 남매이고 기러기 아빠라는 걸.(당연히 내가 물어보진 않았다. 주변의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들이 말해줬다) 그리고 그분은 뜬금없이 나에게 아들이 ADHD라 한국에서 학교생활이 힘들어 아이들이 외국으로 가게 되었고, 딸은 자신과 똑같은 성격이라고 말했다.(이 대목에서 왜 나는 아들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 걸까… 게다가 그 상황에서 유학? 남의 일이야… 신경 끄자)
내 나이 서른이었던 그때, 나름 많은 경험을 통해 이상한 사람을 수없이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나만의 큰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시 세상은 넓고 또라이는 많다. 그때의 기분은 게임 플레이어가 나라는 캐릭터에게 ‘넌 아직 너무 순진하구나, 아직도 그렇게 해맑아서야. 세상이 얼마나 험하고 무서운데 어쩌려고 그래. 앞으로의 너를 위해 새로운 세상을 알려 줄게.’ 하며 ‘시련’이라는 키워드를 입력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그렇다. 이건 겨우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