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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나 Apr 05. 2024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

그것이 인간관계

  나의 빌런 상사는 능력에 비해 꽤 오랫동안 나의 고과권자였다. 업의 특성상 직무를 변경하기 어려워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바꾸려는 너의 의지가 없었다고 해도 변명의 여지는 없다. 어쨌든…


  그가 무능하다는 것을 임원도 인지하고 있다는 건 누구든 회의에 한 번만 함께 들어가 보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대기업이란 곳이 그런 무능한 인간이라도 연차가 쌓이고, 큰 사고 치지 않고, 게다가 정치질까지 잘하면 한자리 차지할 수 있는 곳이고, 그런 인간이 많다 해도 큰 문제가 발생하지도 않는다. 아니 문제없이 잘 돌아간다. 그리고 당연하게 그런 인간일수록 입안의 혀처럼 구는 사람들에게 잘 놀아난다.(뭐 무릇 인간이라면 바른말 따박따박하는 사람보다 아첨하는 인간이 더 좋은 것은 인지상정이니 비난만 하진 않겠다) 어쨌든 그 사람은 꽤 오랫동안 능력보다 나은 대우를 받으며 꼴 같잖은 권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무엇이든 끝은 있는 법.


  그렇게 권력이라는 칼을 뺏기자 그에게 간도 쓸개도 빼줄 듯 굴던 사람들은 서서히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술 먹고 노는 것은 여전히 같이 하지만 자신이 직접 보고하는 자료조차 자기 손으로 글자 하나 바꾸지 않던 사람과 함께 일하라고 하면 모두 싫었겠지. 결국 그 인간이 택한 사람은 자신이 가장 챙겨주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분도 참 착하지… 그걸 또 받아주다니… 그러니 만만하게 보고 달라붙었겠지만)


  그 인간은 다시 일반 업무를 해야 했지만 내가 보았던 10년 넘는 시간 동안 제대로 된 보고서 하나 쓰는 걸 본 적이 없는데, 그것도 권력의 맛까지 본 사람이 과연? 어차피 나는 휴직할 거니까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뿔싸… 내가 전생에 진정 나라를 팔아먹었나... 끈질긴 악연이 끝까지 나의 발목을 잡듯이 내가 비운 자리를 그 사람이 채울 예정이니 나보고 인수인계를 하란다. 인수인계를 위해 만날 날 나는 의지에 반하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는데 나의 말을 자르며 그가 한 첫 말은 '내가 그 일을 직접 할 생각은 없다'였다. 역시는 역시,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라더니… 휴직까지 하는 마당에 얼굴 붉히기도 싫고 이미 여러 번의 이간질을 경험했던 나는 그 당시 상사에게 사실만 말했다. 뒤통수 맞기 전에. 나답지 않게 빨리. (물론 그게 소용 있을까 싶긴 했지만…)


  권력의 칼을 뺏긴 후 그 인간도 눈치는 있는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했다는 말을 듣고는 나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왔다. ‘내가 그동안 사준 커피가 얼마인데...’ 그리고 이 말을 들은 내 주변 여사우들은 대부분 어이없어했다. 왜냐고? 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모두 같았으니까. "그 많은 커피 중에 우리가 마신 건 거의 없을 거예요. 그 커피'들' 얻어마신 사람들은 지금 당신한테 등 돌리는 중이고" 참 답 없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 수준의 인간이었다니… 이젠 뭐 이런 사람이 상사였던 내가 다 불쌍할 지경이다.


덧, 빈번히 등장하는 빌런 상사(와 주변인)에 대한 글들이 불편하신 분들도 있을 거예요. 물론 그 사람(들)의 입장은 당연히 저와 다르겠죠. 저도 제가 다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제가 겪은 일/사람/경험을 제 입장에서 쓰는 공간입니다. 저 포함 모든 사람들은 누군가에게는 악마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천사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저의 오랜 회사 생활을 '지옥'으로 만든 사람(들)의 입장까지 고려하며 글을 쓸 생각이 없어요. 이건 저를 위한 글이자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 또는 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게 참고가 되었으면 하면서 쓰는 글이니까요. 왜냐면 제가 그런 글들에 위로를 많이 받았거든요. 그러니 불편하신 분들은 그냥 지나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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