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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나 Apr 12. 2024

'나 딸 키우잖아'

더도 말고 덜도 말도 니 딸이 똑같이...

  「대행사」라는 드라마에서 빌런으로 나오는 최창수 상무가 고아인(흙수저 여자 상무)에게 그녀가 1년짜리 얼굴마담 상무라고 알리는 것을 동기이자 음모의 조력자인 회장 비서에게 떠넘기며 한 대사에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건 바로 ‘나 딸 키우잖아.’라는 말. 그리고 이어진 상대방의 대사는 ‘아… 나 여자 눈물에 약한데…’였다. 이 대사를 작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동료들이 대기업에서 특히 여성 직장인으로 일하면서 제일 증오한 인간들에게 종종 하던 말 중 하나가 바로 이 대사와 일맥상통했기 때문이다. ‘딸 키우는 인간들이 더해!’


  자신들은 죽어도 아니라고 부인하겠지만 아직도 그들만의 리그가 당연한 대기업에서 남자들끼리 끌어주고 밀어주는 건 너무 흔한 일이다.(알코올력이 강하거나 그들의 니즈에 무조건 'Yes'라고 말하는 여자(feat. 명예남성화)가 리그에 들어갈 순 있을지도 모르나 우선순위는 아닐 거다) 물론 업무 능력 따위 상관없다. 여성들은 이런 걸 성차별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성희롱이나 차별적 발언을 한 것도 아닌데 무슨 소리냐고 반박할 것이다.


  끌어주고 밀어주는 일의 핵심은 바로 승진(=연봉 상승)과 직결되는 '고과'이다. 그럼 대기업 조직에서 '고과'를 산출하기 위한 소위 '평가'라는 건 어떠한가. 이 ‘평가’라는 것이 학교에서처럼 시험 점수로 줄 세워 등급을 매길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고과점수’는 고과권자의 주관적 기준에 따라 결정된다. 즉, 그들에게 알량한 ‘권력’이 생기는 것이다. 만약 그 ‘고과권자’들이 편협하고 비상식적이며 아부에 약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조직에는 정치질이 난무하고(당연히 일은 뒷전) 아직까지는 어쩔 수 없이 높은 직급에 남성 비율이 높은 대기업에서 그들만의 리그는 더욱 공고해진다.(물론 고과에 대한 불만은 항상 있으니 그들도 나름 내세울만한 기준을 마련한다. 하지만 그들이 만든 ‘평가의 기준’이라는 것이 밀고 당기기에 맞춰 매번 바뀌고,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어떤 궤변이라도 핑계가 있기에 그 기준을 박살 낼 방법은 전무하다. 결국 그들을 밀어낼 단 한 가지 방법은 그들의 비위를 밝혀내는 것인데, 그 인간들은 그런 일을 도모할 머리도 배짱도 없다.)


  주니어 엔지니어이던 시절 박사 출신 과장급 여성 한분이 퇴사를 했다. 그분과 밀접하게 일하지 않아서 자세한 사항은 알지 못했지만 성차별을 일삼는 무능한 상사가 그분에게 무리한 일을 시킨다는 것은 들어 알고 있었다. 퇴사 전 그분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분이 이렇게 말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 인간 딸이 꼭 내가 당한 만큼만 당하길.’ 이 말을 드는 순간 나는 너무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왜냐하면 나 또한 속으로 수없이 되뇌었으나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워딩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건 그 이후 똑같은 말을 그 상사와 일했던 거의 모든 여성들에게 들었다는 것이다!(여기서 가장 웃긴 건 그 상사가 자신의 ‘딸 하나’가 너무 귀해서 둘째는 낳을 생각도 못했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는 사람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 밑에 있었던 여자 중 같은 마음을 토로하지 않았던 단 한 사람은 오피스 딸이라 불린 사람뿐이었다!)


  물론 이게 얼마나 어이없는 말인지 당연히 알고 있다. 그 딸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 인간도 그녀에겐 그저 소중한 부(父) 일뿐이겠지. 혹시 오해할까 덧붙이자면 자신의 부하 직원들을 딸처럼 생각하라는 게 절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딸이 나와서 살아가야 할 사회를 개선하지는 못할 망정 망치지는 말았으면 하는 소망이다. 하긴 내가 입사한 후 나의 부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 중 하나가 ‘술을 마실 줄 알아야 하는데’였다. 그 말엔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끔 생각한다. 나의 부 아래 있던 어떤 여성들도 나와 내 동료들과 비슷한 심정이었을까? 그래서 지금 내가 그 벌을 대신 받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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