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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송이 Oct 21. 2021

휴직과 복직 사이

괜찮냐고 마흔이 물었다

꿈 많던 이십 대 시절, 그 많던 직업의 세계를 뒤로하고 청운의 꿈을 품고 공직의 길에 들어섰다. 첫 직장은 면사무소였다. 시청에서 발령장을 받고 나를 데리러 와준 고마운 사송 주무관님 용달차에 올라타 시골길을 달려 도착한 그곳. 면장님께 인사를 드리자마자 온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차를 나눠 타고 어디론가 향한다. 그곳은 바로 마을 회관이었고 마을 어르신들에게 신규 직원이라고 인사를 드리고 자리 잡고 앉자 내 앞에 던져진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개 먹을 수 있어? 개 못 먹으면 닭을 줄까?"

 이렇게 개냐 닭이냐의 선택의 기로에서 내 공직 생활은 시작되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전라도 촌 동네인데 태어나 한 번도 그곳을 떠나본 적이 없다. 그렇게 처음 고향을 떠나 직장을 잡은 곳은 경기도. 그 서울 옆 경기도 말이다. 난 도시 사람이 된 거라 여겼었다. 온 동네 사람이 마을 회관 앞에 돗자리 깔고 앉아 보신탕을 나눠 먹는 풍경이 내 눈앞에서 펼쳐지기 전까지 말이다. 

 전라도민이 경기도민이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경기도도 경기도 나름이지 내가 근무하는 '안성'은 도농복합도시로 농촌의 색채가 더 짙은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난 그저 전라도 농촌에서 경기도 농촌으로 삶의 반경이 달라졌을 뿐이다. 

 첫 휴직은 첫아이 임신하고 서다. 면사무소에서 3년을 근무하고 드디어 본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직 어린 9급 신규 공무원의 눈에 면사무소보다는 시청 저 큰 건물 안에서 일하는 것이 뭔가 더 공직자다워 보였다. 민원대에 앉아 주민등록등본 혹은 인감증명서나 발급하는 일은 내가 생각해오던 공무원의 삶이 아니라 여겼다. 나보다 먼저 본청에 입성해서 척척 승진하는 입사 동기들을 보면서 조바심을 냈다. 며칠을 고민하다 인사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인사고충을 이야기하고 입사 3년 만에 하게 된 본청 근무였다.

 청내 천여 명의 급여가 내 손을 거쳐 나갔다. 첫 달은 급여가 안 맞아 문제점을 찾아내느라 밤을 새워야 했지만 새로운 업무 환경과 일이 보람차다 생각도 될 찰나, 헛구역질과 메슥거림이 시작되었다. 몇 달을 채 근무하지도 못하고 당연히 승진도 하지 못하고 육아휴직을 했다. 아이를 기르기 위한 휴직. 입덧이 너무 심해서 뱃속 아가를 기를 때부터 난 휴직을 시작했다. 그렇게 첫아이가 돌이 되자 젖을 떼고 다시 직장에 복귀했다. 

2년 정도 지나 또다시 시작된 헛구역질. 첫 째 딸과 두 살 터울로 이번엔 아들이 태어났다. 둘째가 돌이 될 무렵 복직을 준비했다. 그런데 몸이 이상하다. 여지없이 다시 시작된 헛구역질. 아직 둘째 젖을 먹이고 있었기에 아닐 거라 확신하며 산부인과에 들어섰다. 

"임신이시네요."

"네? 저 지금 모유 수유 중인데요?"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모유 수유 중에도 임신이 되기도 해요. 얼른 젖 끊으셔야 해요. 아가가 젖을 빨면 자궁 수축이 일어나 유산 위험성이 있어요."

이렇게 셋째는 희박한 가능성을 뚫고 형아의 젖을 강제로 떼면서 우리에게 왔다.

복직은 당연히 물 건너갔고 복직 대신 세상에 나와있는 두 아이와 뱃속의 또 다른 아이들을 키우며 육아휴직을 연장했다. 연년생으로 셋째가 그렇게 태어났다. 셋째가 돌이 되어 서서 걷자 나도 조금씩 복직을 생각했다. 

그렇게 휴직 3년 만에 회사에 복귀했다. 3년 동안 집안에서 애 키우고 살림하다 다시 사회인으로 사는 것이 흐뭇하고 좋았다. 육아와 직장 일을 병행하는 데서 오는 여러 눈물 나는 일들이 수시로 벌어졌으나 그러나 역시 나는 집 안보다는 집 밖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교통정책과에서 주차위반 차량들에게 주차위반 과태료 부과하는 침익적 행정행위를 하는 것이 나의 업무였고 살면서 욕을 가장 많이 얻어들었다. 전화벨은 끊임없이 울려대고 받으면 여지없이 불평, 불만 심하면 욕이 튀어나왔다. 내 행위가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원성을 듣는 일은 고되고 보람 없는 일이었다. 

이번엔 뭔가 좋은 일을 해주고 좋은 소리를 듣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드디어 인사발령이 났고 이번엔 토지민원과. 토지대장, 지적도, 토지이용계획 확인원 이런 토지 관련 서류들을 발급해 주니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야 마음이 놓였다. 일하고 늘 하는 일이 욕먹는 일이었는데 이번에는 일하고 가끔은 칭찬도 들으니 그렇게 감사하고 좋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근무했던 교정정책과 그 자리는 늘 직무기피부서로 선정되는, 모두가 근무하기 꺼리는 자리였고  그 후 근무하게 된 민원실은 애 키우는 엄마들이 가장 근무하기 원하는 선호도 1 순위 자리였다. 최악의 자리는 나를 강하게 만들었고 최상의 자리에 앉게 되었을 때 감사와 행복을 부풀리는 데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애 키우며 근무하기 좋은 이곳에서 착실히 휴직 없이 근무하다 7급 승진도 하고  아이 세 명 키우면서 일하면 되겠다 싶었다. 내 인생의 그 어느 때보다 안정되고 열정도 끓어오르던 차였다. 아이를 세 명이나 키우면서도 씩씩하고 밝게 일하는 워킹맘. 그것이 내 모습이었고 안정되고 평탄한 길이 내 앞에 펼쳐졌다.

속이 메슥거린다. 불 맛 나는 매운 짬뽕 생각만 난다. 그렇게  맛있게 먹어대던 구내식당 흰쌀밥을 한 숟가락도 입에 넣고 싶지가 않다. 정말 인정하고 싶지도, 상상조차 하기 싫었지만 내 자궁 깊숙한 곳에서는 이미 그 무엇이 꼬물 락 거리고 있었다. 다음날 임신 테스트를 하고 바로 병원에 가서 임신 확인을 받자마자 직장에 휴직을 통보했다. 후임자 올 때까지만 버티라는 말도 7급 승진이 코앞이라는 말도 무용했다. 난 그저 방바닥에 드러눕고만 싶었다.

그렇게 또다시 시작된 육아휴직이 지금 5년 차다. 그러고 보니 공직에 입문한 지 13년 차인데 아이 네 명을 낳고 키우느라 공직에서 비켜서 있던 시간이 더 많다. 예상치 못한 '코로나'라는 비상시국이 이렇게 오랫동안 집 안에 붙들어놓는 계기가 되었다. 학교도 어린이집도 가지 못했던 네 명은 다 집에 머물렀고 그 시간 동안 난 밥 짓고 어린아이 돌보면서 초등학생들의 온라인 학습까지 도와야 했다. 밥 지으며 눈물과 한숨도 함께 짓는 날이 많았다. 

내년이면 첫째는 5학년, 둘째는 3학년, 셋째는 2학년, 넷째는 다섯 살이 된다. 나는 회사에 복귀한다. 아이 네 명을 돌보며 직장 생활을 해낼 수 있을지 걱정되고 두렵지만 해 보려고 한다.  복직 전 누릴 수 있는 육아휴직의 시간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바빠졌다.  하고 싶었으나 육아하느라 미뤄둔 일들을 하나하나 해보고 있는 중이다. 회사 복귀하면 이 시간이 얼마나 사무치게 그리울 것을 알기에 지금 내가 서 있는 시간들이 이렇게 귀하고 감사할 수가 없다. 휴직과 복직을 거듭하며 아이 네 명을 낳고 돌보고 난 다시 복직을 준비한다.  육아휴직이 육아를 위한 휴직이 아니라 육아로부터의 휴직이라면 모를까  난 이제 육아휴직은 그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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