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연철 Dec 02. 2023

글자를 배우는 건 커다란 기쁨

한글 공부, 절대로 시키지 마세요 (2)

이번엔 영화, ‘차일드 인 타임’의 한 장면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유명 동화작가, 스티븐(베네딕트 컴버배치 분)은 영국 정부 아동교육위원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언어교육 전문가의 어이없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 전문가는 뇌의 통합적인 발달을 위해서는 11-12세가 될 때까지 읽기와 쓰기 교육을 미루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스티븐은 발끈하면서, “스웨덴의 연구결과에 따르면...”으로 시작하려는 전문가의 말을 가로막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영화, '차일드 인 타임'에서 스티븐의 반박 장면


“3살짜리 아이가 자기 이름을 처음으로 썼을 때 그 기쁨을 아세요?”

“4살 아이가 간판이나 포스터의 낱말을 읽거나 이해했을 때 매우 멋지고 감동적인 대화로 이어지는 기쁨 말입니다.”

“상상해 보세요. 아이가 부모의 무릎 위에 앉아 그림책을 소리 내어 읽을 때, 대부분의 낱말을 엉터리로 읽더라도 그 의미 없는 글자들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그로 인해 아이와 친밀해지고 마음이 따뜻하고 행복해지고 편안한 상태로 잠자리에 들 수 있게 된답니다.”     


얼마 전 사랑하는 딸 케이트가 마트에서 실종되어, 스티븐은 정신적으로 힘든 상태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정신 나간(?)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으니 더욱 화가 났던 것입니다. 반박하는 내내, 스티븐은 케이트와의 즐겁고 소중했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전문가의 말은 정말 엉뚱했습니다. 영화대사이긴 하지만 그래도 전문가 말이니 신빙성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스웨덴 논문을 찾아보았습니다. 11-12세 이전에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논문은 없더군요. 없는 게 아니라 어쩌면 못 찾은 것일 수 있습니다. 중요 논문이 아닌지라 최선을 다해서 검색하진 않았으니까요.

사실 그런 연구가 있든 없든 상관없습니다. 아무리 스웨덴이라고 하더라도 읽기와 쓰기 교육을 그렇게 늦게 시작하진 않습니다. 나라마다 다르긴 하지만, 유럽에서는 5-7세 정도에 ‘형식적인 언어교육’을 시작합니다. 그러니 그 전문가가 했던 말은 더 이상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전문가 이야기는 잊어버리고 그 대신 스티븐의 말에 대해 더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지난 이야기에서는 만 3세 아이도 읽고 쓰기를 배울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스티븐이 했던 말도 다르지 않습니다. 3살 아이가 글을 배우는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빼앗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스티븐 말대로 읽기와 쓰기를 배운다는 것은 기쁨이고 행복이고 즐거움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 즐거움을, 다른 영화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영화, ‘인어공주’의 주인공 연순(전도연 분)은 물질해서 동생 뒷바라지하느라 학교를 다니지 못했습니다. 연순은 우체부 진국(박해일 분)을 남알게(?) 짝사랑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진국은 멋있고 마음 따뜻한 국어 선생님이 되어 연순에게 한글을 가르쳐줍니다. 그 당시 연순의 삶은, 한글을 읽을 수 있기 전과 후로 나뉩니다. 읽기를 배우고 나니까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래 왼쪽은 연순이 길거리의 간판을 읽으며 즐거워하는 장면입니다. 오른쪽은 동네 아이들의 담벼락 낙서를 읽으며 당황하는 장면입니다.    

  

영화, '인어공주'의 한 장면


담벼락엔 ‘조영호 왕XX’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조영호는 연순의 남동생입니다. 사랑하는 진국씨 옆이라 더 당황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당황도 사실은 커다란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글자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기쁨입니다.     


여기에서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연순씨는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로 체계적인 한글 공부를 했습니다. 자음과 모음을 익히고, 초성과 중성, 그리고 종성이 어우러져 글자를 이루는 체계를 배웠을 것입니다. 그렇게 배웠으니 비교적 정확한 읽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틀리거나 모르는 글자가 있을 수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정확한 읽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티븐의 딸 케이트는 어땠을까요? 케이트가 3살 때 처음으로 쓴 자기 이름은 그냥 끄적거리기에 불과했을 수도 있습니다. 케이트가 4살 때 읽은 간판이나 포스터도 완전히 엉뚱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스티븐의 주장은 ‘형식적인 언어교육’에 관한 것이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만 3세부터 자음과 모음의 결합법칙을 가르치거나 글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을 깨우치게 도와주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만 3세가 되기 훨씬 이전부터, 우리가 사는 세상이 수많은 언어의 얽힘과 설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안에서 수많은 의미가 생성되고 소멸된다는 것을 경험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이야기였을 것 같습니다.


글자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기쁨입니다. 그 점에서만 본다면 인어공주의 연순씨나 스티븐의 딸 케이트 모두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연순씨는 체계적인 한글공부를 통해 글자를 깨친 성인문맹자이고, 케이트는 아직 형식적인 글자공부를 시작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 아이입니다. 기쁨의 크기는 같을지 모르지만, 그 두 사람이 글자를 접했던 방식은 전혀 달랐을 것입니다. 케이트는 정확하게 읽진 못했지만 연순씨가 누렸을 즐거움을 누렸을 것입니다.

    

만 3세 아이도 읽고 쓰기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별 낱글자가 어떤 음가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배워야 한다는 의미는 아닐 수 있습니다.




인어공주 (My Mother The Mermaid, 2004년, 박흥식 감독)

차일드 인 타임 (The Child in Time, 2017년, 줄리안 파리노 감독)

이전 01화 게젤이 틀렸다는 걸 확실하게 증명한 우리나라 학부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