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모르는데도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기억 못 하는데도 마음이 아픕니다. 게다가 목이 메고 눈물까지 흐릅니다. 그래도 어쨌든... 난 당신을 모릅니다.
그럴 수 있나요? 그럴 수 있습니다! 잊어버리고 싶으면... 잊힙니다. 때로는 시간이 도와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시간이 도와주지 않아도 잊어버리려고 굳게 마음먹으면… 잊을 수 있습니다. 정서는 우리의 기억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정서가 경험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합니다.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 그건 정서가 하는 일입니다. 어떤 경험이 절대로 잊히지 않게 하는 일, 그것 또한 정서가 하는 일입니다.
‘심리학을 만나 행복해졌다’라는 책의 ‘야생마 엔딩’ 가운데 일부입니다.
아프리카 초원의 야생말은 흡혈박쥐를 제일 무서워한다. 흡혈박쥐는 동식물의 피를 빨아먹으며 산다. 늘 야생마의 다리에 달라붙어 말이 아무리 화를 내도 끝까지 태연하게 피를 빨아먹고 나서야 떠난다. 그 말은 결국 산 채로 죽음을 맞는다. 동물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흡혈박쥐가 빨아먹는 피는 극소량이며 야생마에게 전혀 치명적이지 않다. 즉 야생마가 목숨을 잃는 진짜 이유는 흡혈박쥐에게 당한 이후 느끼는 분노 때문이었다. (장원청, 2020: 70쪽)
최연철, 2024. 2. 24. (Leonardo.AI로 그림)
물론 동물학자라고 해도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닐 테니, 잘 모르고 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책에서 인용한 동물학자의 말에 따르면, 야생마가 목숨을 잃는 이유는 정서 때문이랍니다. 그만큼 정서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도 데카르트 이래로 느낌(feeling)과 감정(affection), 정서(emotion) 등은 오랜 세월 동안 평가절하되어 왔습니다. 물론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감정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교육학 분야에서는 아이즈너(Eisner) 같은 학자가 오래전부터 인지에서 감정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비교적 최근에는 뇌과학자들도 느낌, 감정, 정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다마지오는데카르트와 동시대를 산 스피노자가 이미 300여 년 전에 현대 뇌과학을 예견했다고 주장합니다. 즉, 데카르트와는 달리 스피노자는 느낌과 정서, 감정이야말로 인간성의 중심이라 보았다는 겁니다.
정서에 대해 생각하다 아이들과 할 수 있는 놀이도 떠올려보았습니다. 괄호 안을 채우는 겁니다.
( )보다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 )보다
( )를 더 좋아한다.
새로운 놀이는 아닙니다. 많이 하고 있는 놀이입니다. 시인도 그런 놀이를 합니다.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
도스토예프스키보다 디킨즈를 더 좋아한다. (...)
초록을 더 좋아한다.
모든 것이 이성의 탓이라고 말하지 않는 편을 더 좋아한다.
예외를 좋아한다. (...)
시를 쓰지 않을 때의 어리석음보다 시를 쓸 때의 어리석음을 더 좋아한다.
(Szymborska, 2021: 297-298쪽, ‘선택의 가능성’이라는 제목의 시 가운데 일부를 군데군데 인용했음.)
장원청(2020). 심리학을 만나 행복해졌다. (김혜림역). 고양: 미디어숲 다빈치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