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연철 Feb 23. 2024

백옥 같은 내 얼굴...

이야기에 경험을 담는 건 어떤가요? (4)

저는 어렸을 때부터 얼굴이 백옥 같았습니다. 정말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도 어느 부모님이나 ‘공부’, ‘공부’ 이야기를 많이 하셨죠. 그래도 아이들은 조금만 틈이 보이면 바깥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니 새까만 얼굴이 많았죠. 하지만 제 얼굴은 달랐습니다. “공부 잘하게 생겼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던 것도 바로 얼굴색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옥 같은 얼굴, 그 얼굴색은 저에게 커다란 아픔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코피를 자주 흘렸습니다. 조금만 무리하면 코피가 났습니다. 코피가 그냥 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조금 과장하면 한 바가지씩 '쏟았습니다.' 그러니 항상 핏기 없는 얼굴이었고 그 얼굴이 백옥처럼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원인도 알고 있었습니다. 원인은 너무 단순했습니다. 코 안의 모세혈관이 피부바깥으로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고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중요한 계기가 생겼습니다. 고등학교 때 레이저로 모세혈관을 지지는(?)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아무리 무리를 해도 코피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게 나중에 문제가 되긴 했습니다. 편도선은 몸에 이상이 생기기 전에 미리 신호를 보내주는 알람 시스템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코피는 이제 그만 쉬라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다섯 살 때 편도선 제거수술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나중엔 코피 나는 기제마저 원천 봉쇄해 버렸습니다. 그러니 무리하고 있는데도 무리하는지 모르고 무리하다가 갑자기 ‘픽’ 쓰러지곤 했습니다.)   


수술 이전에는, 그깟 ‘코피’ 하나 때문에 정말 힘들었습니다. 슬픔, 고통, 열등감...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코피 하나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전 병원에 있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는, 몇 날 며칠을 중환자실 앞에서 넋 놓고 앉아있기도 했습니다. 생사의 기로 앞에 서 있는 환자들을 보고 있으면서도, 한가하게 코피 이야기나 하고 있으니 정말 한심하고 부끄럽기까지 하군요.)


‘철분 보충제’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긴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오랫동안 철분 보충제를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 싸한 철분냄새에 매우 민감합니다.


코피가 멎은 다음에는 운동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과 같이 하는 운동은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혼자 할 수 있는 철봉 운동을 열심히 하곤 했습니다.


최연철, 2024. 2. 23. (Midjourney로 그림)


철봉을 잡을 때마다 열등감을 생각했습니다. 철봉에서 '철분 보충제' 냄새가 났기 때문입니다. 철봉과 친해지면서 그 정도가 심해졌습니다. 철봉은 항상 그간의 상처를 상기시켜 줬습니다. 새벽에 철봉을 잡으면, 싸한 냄새가 더합니다. 안개까지 끼면 '쇠' 냄새가 머릿속까지 가득 찹니다.


이렇게 경험에는 항상 감각이 관여합니다. 아이들이 유의미한 경험을 쌓길 원한다면, 어른부터 감각에 대해 민감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조향사처럼, 포도주 감별사처럼, 절대적인 감각에 민감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절대감각을 지녀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감각적 경험에 담긴 의미에 민감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감각을 담은 이야기(시) 두 편 읽어보겠습니다. 먼저 1966년에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어린이의 시입니다.


살구 (홍성호 경북 안동 대곡분교 3학년)


승영이와 살구나무에 올라가

살구를 따 먹으니 쓰다.

승영아, 니는 안 쓰나? 하니

승영이가 니는 안 쓰나? 해서

나는 웃었다. (1966. 11. 6) (이오덕, 2017: 278쪽)

     

다음은 박지원 님의 글입니다.


개구리 소리는 마치 멍청한 원님 앞에 사나운 백성들이 몰려와 소송을 제기하는 것 같고, 매미 소리는 공부를 엄격하게 시키는 서당에서 시험 일이 닥쳐 글을 소리 내어 외우는 것과 같으며, 닭 울음소리는 올곧은 한 선비가 자기 임무로 여기고 바른말을 하는 것 같았다. (박수밀, 2013: 74쪽 <취해서 운종교를 거닌 이야기>의 내용 가운데)  

     



박수밀(2013). 연암 박지원의 글 짓는 법. 파주: 돌베개.

이오덕(2017).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 서울: 양철북.


이전 16화 이렇게 다치면 아플까요? 안 아플까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