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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연철 Feb 21. 2024

어제는 KTX, 오늘은 SRT, 내일은 ITX?

이야기에 경험을 담는 건 어떤가요? (2)

자서전적 소설이 아니더라도 모든 소설은 그 소설을 쓴 작가의 자서전이라는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아무리 허구라도 자신의 경험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소설가의 소설도 그러하고 아이들의 이야기도 그러합니다.


유의미한 경험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아이라면 당연히 그의 이야기에 그 경험이 반영될 수밖에 없습니다. 경험이 반영되지 않은 이야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야기를 잘하기 위해서라도 풍부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의미한 경험을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열차에 ‘꽂힌’ 아이가 있었습니다. 3월에도, 5월에도, 그리고  6월에도 열차... 이지은 선생님 반의 만 5세 수아의 이야기는 모두 기승전 ‘열차’입니다.


2번 열차도 놓쳤어요. 빨리 문이 닫혀서 갔는데 3번 열차인데 KTX 열차였어요. (3월 7일)


할아버지가 2호선을 타려고 했는데 관철역 열차가 왔어요. 그리고 출입문이 열려서 타고 엘산역까지 갔어요. 거기는 SRT가 있는 곳이었어요. 그래서 SRT를 타고 가는데 이번에는 부산역까지 갔어요. 그리고 ITX 열차로 갈아타고 일찬역까지 갔어요. (5월 3일)


최연철, 2024. 2. 21. (Midjourney로 그림)


마을에 갔는데 열차인데 1번 출구로 갔더니 당선행 열차가 마이너스 1점 열차였어요. 그거 타고 서울역까지 갔는데 이번에 ITX를 타려고 SRT를 탔고 이번에 ITX 타려고 온찬역으로 가서 ITX를 타고 아까 전에 100층으로 갔던 부산역에 가서 이번에는 무한층으로 가서 오래오래 더 살았어요. (6월 8일)


어떤가요? 이야기 속에서 경험이 생명력을 얻고, 그렇게 살아난 경험이 다시 이야기에 숨을 불어넣어주고 있지 않나요? 저는 사실 ITX가 뭔지 몰랐습니다. 찾아보니 한국철도공사가 운영하는 특급열차의 등급명이라고 하더군요. 수아가 이미 알고 있었을 수도 있지만 열차 이야기를 하면서 열차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졌고 그래서 열차에 대해 공부하다가 ITX에 대해 알게 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기차를 타본 경험도 다른 아이들보다 많겠지요!


아이들의 경험이 바탕이 되는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매우 적절합니다. 하지만 꼭 그런 주장을 해야 할 필요조차 없긴 합니다. 왜냐하면 허무맹랑한 이야기에도 아이들의 현실적인, 일상적인 삶이 반영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이들의 이야기에서 아이들의 경험을 읽어주고,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경험을 방문, 재방문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이야기가 아이들을 바꾸어줄 수 있습니다. 단지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경험이 풍부해지고 튼튼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기 자신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의 경험이 담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경험이 이야기 속에서 생명력을 얻고 이야기가 풍요로워집니다. 아이들의 이야기에서 경험을 읽어주면 이야기와 경험은 서로 상승작용을 하게 됩니다. 이야기하고 나면 경험이 더 두터워지고, 경험이 유의미해지면서 이야기가 더 풍성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은 김우남 님의 시입니다.


보리밭 

안동 임동 동부 대곡 분교 2학년 김우남


나는 어머니하고 보리밭을 매러 갔습니다. 밭을 매다가 아가가 울어서 어머니가 “아가 보로 가거라.” 합니다. 나는 “예.”하고 갔습니다. 가서 보니 자꾸 웁니다. “어머니 가셔요.” “오냐.” “어머니 빨리 가셔요.” “어머니, 아가가 자꾸 울어요.” 아가가 오줌을 쌌습니다. 어머니가 기저구를 한데 내놨습니다. “인지는 안 운다. 니가 봐라.” “예, 보지요.” 어머니는 어두워질 때까지 밭을 자꾸 매다가 손이 부풀었습니다. (이오덕, 2005: 34쪽).


김우남 님의 일상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습니까? 김우남 님의 시선으로 그의 경험을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누군가 자신의 경험을 들어준다면, 자신의 경험을 담은 이야기를 읽어준다면, 정말 신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럼 바뀌게 되는 게 있습니다. 자신의 현재 경험을 보다 더 잘 들여다보게 됩니다.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그럼 아무 것도 아닌 일상이, 이야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훌륭한 경험이 되어버립니다. 그럼 이야기가 풍요로워집니다.




이오덕 (편) (2005).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 파주: 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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