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에서의 유의미함은 매우 중요합니다. 분명히 겪긴 했으나 분명히 그 자리에 있긴 했으나 그 상황과 사건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면... 그 상황과 사건은 그냥 겪은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건 경험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렇게 겪은 일은 휘발성이 강해서 조금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유의미한 경험만이 ‘경험’입니다.
경험과 관련해서 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저희 부부는 주말마다 어디든 다녔습니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주로 미국에서 살았는데, 거긴 참 넓잖아요! 가는 데만 하루가 걸리는 곳도 있어서 금요일 저녁에 출발해서 아내와 제가 번갈아 가며 밤새 운전하다가 새벽녘에야 목적지에 도착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전시회나 미술관, 박물관을 갈 때는 무척 바빴습니다. 그때도 인터넷이 있긴 했지만 지금처럼 정보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관련 자료를 모두 외우기도 했습니다. 그랬으니 미술관에서는 어느 도슨트보다 설명을 잘해줄 수 있다고 자만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설명은 잘해준 것 같은데, 설명을 마치고 나면 제 머릿속에 해당 내용이 별로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의 머릿속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모두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치 벼락치기 공부를 한 것처럼, 유효기간이 지난 지식은 휘발성이 강했습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유아교육을 전공했기 때문에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아이들이 어렸을 때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알고는 있었지만 알지 못했습니다. 고백하건대, 그때는 경험이 어떤 것인지 잘 몰랐습니다. 많이 듣고 많이 보는 것 자체가 곧바로 경험이 되진 않습니다. 그 보고 들음이 아이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때도 그런 걸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잘 몰랐습니다. 머릿속으로만 알고 있었으니 잘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 아이가 어렸을 때 그렇게 무리해서 여행을 다닐 것이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동네 놀이터에서 재미있게 놀았다면 어땠을까?’ 경험의 유의미성만 생각하면 어쩌면 그게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최연철, 2024. 2. 20. (Prompt Search로 그림)
예전엔 태교 해외여행 패키지도 있었고, 유아동반 해외여행 패키지도 있었습니다. (코로나 시기엔 거의 사라졌었는데 요즈음엔 그런 패키지 상품이 다시 나오기 시작하더군요.) (여행사를 운영하시는 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런 여행은 가면 안 됩니다. 태중의 아이가, 막 걷기 시작한 아이가, 가이드를 따라다니는 해외여행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게 될지 조금만 상상해 보면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많이 듣고 많이 보는 것 자체가 곧바로 경험이 되진 않습니다. 그 보고 들음이 아이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 해외여행이 아이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어렸을 때의 경험,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어딘가 새로운 곳에 갔다고 해서 그게 바로 경험이 되진 않습니다. 그 겪음이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경험의 유의미성을 강조한 학자의 말에 귀 기울이면 좋겠습니다. 듀이(John Dewey, 1859년~1952년)라는 학자, 그는 셀 수 없는 명사인 ‘경험(Experience)’ 앞에 셀 수 있는 명사 앞에만 붙이는 ‘an’이라는 부정관사를 붙여서 ‘an Experience’라고 불렀습니다. 경험의 유의미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유의미한 경험의 원천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미적인 것에 대한 듀이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궁극적으로 정평을 얻은 형식의 미적인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흔한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주의 깊은 사람의 이목을 끌어, 보고 듣는 사람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기쁨을 주는 사건이나 광경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질주하는 소방차, 땅에 거대한 구멍을 파는 굴착기, 파리처럼 절벽을 기어오르는 사람, 높은 대들보 위에 앉아 작열하는 볼트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람들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Dewey, 2003: 19쪽).
예술의 원천 또한 그렇습니다.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예술에 있어서 새로운 주제란 없다. 영원한 주제의 새로운 체험만이 문제 된다. (이성복, 2001: 10쪽)
이성복(2001).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이성복 아포리즘. 서울: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