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이 더러워지는 건 티가 잘 나지 않는다. 안경알에 먹던 음식이 튀거나 빗물이라도 덮치면 모를까. 먼지가 조금씩 들러붙는 정도는 여간해서 알아채기 힘들다. 아침에 눈 떠서 밤에 눈 감을 때까지 매 순간 렌즈를 통해 바깥 풍경을 응시하며 사는데도 말이다. 그냥 세상이 원래 이 정도는 탁하겠거니, 하고 눈이 서서히 적응하는 듯하다. 그러다 시야를 방해할 정도로 먼지에 오염되고 나서야 뒤늦게 안경을 닦고는 한다. 닦고 나면 늘 같은 생각이 든다. 이렇게 눈앞이 더러웠는데 용케도 돌아다녔네.
지난해, 겨울이 막 찾아왔을 무렵 한 친구가 찾아왔다. 서울에서 회사 다니던 시절 매일 만나던 직장동료였다. 내가 춘천에 차린 작은 가게에서 우리는 실컷 수다를 떨거나 각자 자리에서 책을 읽으며 반나절을 흘려보냈다. 해질 무렵 친구는 떠나는 길에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안경닦이였다.
“이거 엄청 깨끗하게 닦여. 일본 거래. 나도 써봤는데 다른 안경닦이랑 확실히 다르더라고.”
그냥 천이 아닌 극세사랬나, 뭐랬나 했는데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평소 안경에 무심했던 나는 이제껏 그냥 안경점에서 주는 천 조각만 사용해왔다. 선물을 준 친구 앞에서 안경을 닦은 뒤 다시 써보니 이게 웬걸, 정말 그간 써온 것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렌즈가 깨끗해 있었다. 극세사 재질이 무슨 마법을 부린 건지 달라붙은 먼지 하나 없이 마치 새 안경을 낀 기분이었다. 친구에게 연신 고맙다고 말하며 새 안경닦이를 서랍 맨 위칸에 넣어두었다. 가장 자주 꺼내는 물건들만 모아둔 서랍이었다.
그 후로 세 차례 계절이 바뀌었다. 가게 앞 라일락나무가 꽃을 폈다 잎이 무성해졌다 조금씩 지는 사이 그 안경닦이는 내가 한결같이 가장 자주 꺼내드는 애장품으로 자리매김했다. 워낙 효능감이 높다 보니 예전보다 안경 닦는 일도 부쩍 잦아졌다. 자연스럽게 안경이 더러워지는 현상도 예전보다 더 일찍 감지하게 되었다. 렌즈를 자주 닦아주니 눈이 오염물질에 부적응하기 시작한 셈이다. 두 눈으로 마주하는 세상도 한 꺼풀 더 맑아졌으리라.
이렇게 잘 닦이는 무언가로 안경을 닦으며, 더러는 마음의 안경을 닦는 일까지 생각이 닿기도 한다. 누구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한 겹의 렌즈가 덧씌워 있을 것이다. 여태 살아온 경험과 배워온 지식이 여과한 대로 세상을 인식할 테니 말이다. 그 렌즈를 나는 얼마나 자주 닦으며 살고 있을까. 아마 그것 또한 이 안경닦이를 만나기 전 내 안경알처럼 스며들 듯 조금씩 더러워졌을 테다. 그래서 닦아낼 생각을 잘하지 못하고 살아온 것 같다. 그사이 나는 시나브로 오염되어가는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편견과 고정관념을 보편의 사고로 착각하며 지내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다 원래 이 정도는 탁하겠거니, 하고 서서히 적응하면서. 그 마음의 렌즈도 이 안경닦이처럼 잘 닦이는 무언가로 닦아낼 수만 있다면, 그런 무언가를 내가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안경닦이를 선물해준 친구는 그 후로도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찾아왔다. 올 때마다 두 손에는 바리바리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그는 내가 어른이 되어 만난 가장 맑고 투명한 인간이다. 십수 년을 만나며 남을 험담하거나 깎아내리는 모습을 한 번도 보이지 않은 사람. 그리고 자신의 삶에 끼어든 한 톨의 먼지도 부끄러워하며 사는 사람. 그래서 가끔 안경을 닦으며, 그가 준 안경닦이가 그를 빼닮았다는 생각이 들고는 한다. 그의 마음이 담긴 물건으로 내 안경을 닦다 보면 나도 그처럼 맑게 세상을 인식할 수 있겠다는 기분 좋은 착각마저 든다. 어쩌면 그 친구가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마음의 렌즈를 닦아주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