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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헤더 Mar 20. 2020

도쿄로 교환학생

그때만 할 수 있는 생각

"교환학생 어땠어?" 한국으로 돌아와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6개월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도쿄로 교환학생을 다녀왔다. 사실 그 정도 주기로 보던 친구들도 있는데 한국에 왔다는 핑계로 더 약속을 잡았다. 그럴 때면 잘 먹고 놀았다는 대답을 거의 하게 된다.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는 팩트다. 교환학생 경험이 있는 지인은 '한 마디로 설명 못하겠지?'라고 했다. 당시에 어땠다고 말하기에는 내 생각이 정리된 것 같지 않았다. 가끔은 시간이 지난 뒤에야 깨닫는 것들이 생긴다.

도쿄로 교환학생을 가는 건 계획에 없던 일이다. 1학년 때는 파리로 가고 싶었고, 3학년 때는 북유럽에 가고 싶었다. 브랜딩에 빠져있던 새내기의 나는 자매학교에 유명한 미술 대학이 있는 것을 보고 파리를 꿈꿨고, 디자인 수업을 듣기 시작하던 3학년 무렵 북유럽 디자인 이런 류의 글을 몇 개 주워 읽고 그곳에 가면 좀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2018년에 '퇴사 준비생의 도쿄'라는 책을 읽고 도쿄 여행을 다녀왔는데, 처음으로 도쿄라는 도시에 흥미를 가졌다. 여러 가지 인사이트들이 흥미로웠고, 좋아하는 디자이너가 생겼다. 여행 중 건축물에 관심을 갖게 되기도 했다. 이런저런 여건이 안되어 교환학생 지원을 포기하고 있다가 도쿄 파견 모집 공고가 매력적으로 느껴져 충동적으로 지원했고 정말 운 좋게 붙었다. 큰 기대 없이 넣었던 거라 부모님께 말씀도 안 드렸는데, 붙어서 머쓱하게 일본으로 교환을 가게 되었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일본어 하나도 못하는데.

전공이 광고다 보니 똑같은 걸 보더라도 다르게 보려고 의식해왔고, 브랜드를 좋아해 왔으니 여기서 새로운 브랜드 뭐라도 더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가기 직전엔 창업 동아리를 1년간 했어서 스타트업과 비즈니스에도 관심이 많던 차였다. 재작년부터 유독 도쿄의 기획 관련된 콘텐츠가 많았다. 그래서 왠지 도쿄라는 도시에서 사는 5개월이 재밌고 많이 배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런저런 콘텐츠를 만들어볼까, 가서도 재밌는 프로젝트를 하나 해볼까 두루뭉술하게 생각했다. 가기 전에 틈틈이 가고 싶은 곳을 리스트업 해두었다. 도착해서 정리를 하고, 카페에 앉아 교환학생에서 이루고 싶은 것을 주르륵 써 내려갔다.


하지만 많이 느끼고 많이 경험해야지라고 생각했던 나는 그러지 못했다. 뭐라도 해나갈 계획 했지만 제대로 하지 못했다. 뭔가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찾아서 간들 그냥 발도장 찍기 식이었고, 내 경험이 아니라 남들이 좋다니까 '나 여기 가서 이것도 봤다'식이 되었다. 좋은 것을 많이 접하고, 따라 해 보라는 말을 꾸준히 들어왔다. 베끼는 것이 아니라 훔쳐서 내 것으로 만들라고. 지금까지 많은 배움을 준 방법이기도 하다. 여기서도 그럴 생각이었고, 그것들을 통한 특별한 경험에 대한 집착이 생겼던 것 같다. 너무 머릿속에 넣는데만, 남에게 보이는데만 익숙해진 건 아닌지.

뭘 위해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그걸 못하는 것 같아 자괴감이 드는 상황이 지금 생각하면 참 모순적이다. 당시 눈에 보이는 성장도 없다 보니 초조했다. 막 학기를 앞두고 있는 상태라 괜히 자기소개서도 써보고, 화상으로 면접도 봤다. 남이랑 비교도 잘 안 하고 자존감도 높다고 생각한 내가 여기서 멈춰있는 것 같아서 생각이 너무 많았고, 잠을 못 이루기도 했다. 그런 생각은 내가 컨트롤한다고 해서 뇌에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는 자연스럽게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내가 무언가를 느끼고 싶다고 느낄 수 있는게 아니다. 그래서 그냥 맛있는 거 먹고, 과제 있으면 하고, 친구랑 놀았다. 다음날 수업시간에 좀 더 잘 참여하고 싶어서 언어 공부를 했고, 가까운 미래에 도움이 되진 않지만 해보고 싶은 것들에 조금씩 눈이 갔다. 일상적인 것에 나중에서야 집중했다. 딸기우유는 패밀리 마트에만 판다는 사실, 옷에서 우리 집 냄새가 사라지는 사소한 슬픔. 일기를 살펴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날그날 일상에 좀 더 집중하게 된 것 같았다.

왜 순간을 즐기는 법을 잊게 된 건지, 왜 이 시간들을 또 성장에 목메어 아등바등 살아가려 했는지. 사실 그것만이 성장이 아닌데 말이다. 오히려 정보 중독자에 탈피하여 일상에 집중한 삶이 나다움을 더 성장시킨다. 뭐라도 배우려고 했던 습관이 미미하게 남아있는 상태가 오히려 좋아하는 것을 스스로 알아가는 힘을 길러줬다. 그래서 교환학생 동안 새로운 것을 얻어가기보다 기존에 하던 생각을 숙성하는 시간을 보냈다. 타지에서 주변 사람들의 의식하지 않은 채,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5개월이 지났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책임지는 삶을 이제야 조금이나마 경험했구나 싶었다. 뭘 배우지 않았어도, 후회되는 순간들이 있어도,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지내다 온 시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교환학생은 좋다. 자주 갈 수 없는 그리운 동네 하나가 생긴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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