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삶 Apr 09. 2023

나의 첫 정신과

업무 스트레스가 불안장애와 우울증으로 나타나다 

20대 후반, 직무를 바꾸면서 겪은 스트레스가 계기였다. 나는 막 새 부서에 발령받은 참이었다. 이전 경력과 연관성이 별로 없는 데다 일 많기로 유명한 곳이었지만, 지긋지긋하던 옛 부서를 탈출해 새출발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던 나머지 그런 염려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얼른 적응해서 제 몫을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일단 가서 열심히 하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사회 초년생의 나이브한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이었다. 새로 익혀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설상가상 내가 온 지 석 달 만에 사수가 회사를 나갔고, 제대로 된 인수인계도 없이 그가 하던 일들이 파도처럼 내게 밀려왔다.

 

겨우 일이 손에 익을 무렵, 이웃 부서에 결원이 생겨 다시 한번 이동 발령을 받았다. 이리저리 휩쓸리다 보니 변화의 정도가 내 적응력을 뛰어넘었다. 점점 밀려드는 일들에 물 속으로 익사하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퍼포먼스는 저조했고 매일 상사에게 지적을 당하니 한없이 위축되었다. 무엇보다 절룩대고 있는 나 자신을 내가 참을 수가 없었다.

 

심장이 턱 밑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순간이 많아지고, 과도하게 긴장하느라 머릿속은 과포화된 데다, 계속해서 실수한 것과 혼난 것만 반복해서 생각났다. 어느 날부터는 사람들이 나를 뒤에서 욕할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나 정상이 아니구나 싶었다. 지도앱을 열어 주변의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다. 회사에서 적당히 멀어 눈에 띌 일은 없지만, 점심시간에 택시를 타고 재빨리 다녀올 수 있는 곳으로. 

 

살면서 정신과를 방문할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우울이라는 감정조차 느껴보지 못한 나, 자존감 빼면 시체였던 나, 무슨 일이 있어도 회복 탄력성을 자랑하던 나였는데... 인생은 정말 모르는 거였다. 


'스스로에게 많이 엄격하신 편인가요?' 
'남들한테 민폐를 끼치고 있다는 느낌이 드나요?'
'왠지 몸도 요즘 들어 안 좋아진 것 같나요?'


여러 가지 문진과 검사지를 통한 진찰 후, 경증 불안장애와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선생님은 중증으로 진행되기 직전에 병원에 온 건 정말 잘한 결정이고, 나와 같은 증상으로 내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서 얘기해 주셨다. 생각보다 흔한 병이라고 하니 조금은 위로가 되었고, 내가 힘들었던 이유를 의학적으로 인정받으니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불안을 감소시키는 신경안정제와 2주 정도 지나야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세로토닌흡수억제제를 한 뭉치 받아 들고 병원을 나왔다. 일단 처방해 주니 받긴 했는데, 이걸 먹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됐다. 두툼한 약봉지를 보고 있자니 왠지 패잔병이 된 느낌이 들기도 하고, 괜히 조금 있으면 나아질 걸 유난을 떨었나 싶어 착잡하다가도, 힘든 순간을 어떻게든 극복해보려고 애쓰고 있는 스스로가 좀 대견하기도 했다. 


많은 감정의 교차와 망설임 끝에 일 년간 꾸준히 통원하며 진료를 받았고, 더 이상 떨면서 회의실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휴직으로 가는 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