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한 달 살아보기
#1. 여기는 꼭 가보고 싶어 - 미니양
한 달 동안 리스본에서 리스본 탐험을 해도 좋겠지만, 그래도 기왕 온 김에 근교 소도시들도 보고 싶었다. 신뜨라와 호까, 그리고 까스까이스까지 묶어서 하루에 많이 보고 간다고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난 한 군데만 겨우 보기 바빴다. 첫 유럽여행 때도 호카를 다녀오니 신뜨라는 거의 보지 못했고, 이후에는 아예 근교도시를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왜냐면 난 아주 느리고 게으른 여행자인데다가 리스본에서의 시간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야말로 근교 도시들을 좀 볼 수 있겠다 싶어 이 곳, 저 곳 찾아보다가 신뜨라에서 버스로 30여 분 달리면, 아제냐스 두 마르라는 곳에 닿는다고 했다. 한국에서 TV에서 본 풍경 한 조각에 이끌려 난 아제냐스 두 마르에 찾아가보기로 했다.
"미니야, 오늘 우리 신뜨라 가요?"
"응. 근데 난 아제냐스 두 마르라고 하는 곳에 가고 싶어."
"신뜨라만 가는 게 아니고?"
"사실 아제냐스 두 마르가 더 궁금해."
신뜨라만 보지, 뭘 거기까지 가지? 하는 분위기를 풍기는 고래군. 그런 고래군의 표정을 못 본 척하고 길을 나섰다. Portela de Sintra역에 내려 버스를 타고 가는 길, 신남과 기대감에 가득했던 나와는 달리 고래군은 멀미에 시달려 상태가 좋지 못했다. 또 한 번 나는 그런 고래군의 표정을 못 본 척하고 버스기사가 아제냐스 두 마르에 내려주길 기다렸다. 시골길을 달려 30여 분 후 드디어 도착한 아제냐스 두 마르.
"우와~ 우와~"
작지만 조용하고 한적한 마을.
숙소를 구하고 당장이라도 살고 싶었던 마을.
그냥 좋았더랬다.
(아제냐스 두 마르에서의 시간때문에 신뜨라는 돌아오는 길에 들른 중간 기착지처럼 되어버렸다.)
#2. 나를 만나다- 고래군
아제냐스 두 마르 Azenhas do Mar의 풍경은 마치 그림 같았다. '그림 같은'이라는 수식어가 꽤나 적확한 표현일 수밖에 없는 것이 하늘과 바다, 그리고 절벽 위 마을이 이루는 수평과 수직의 구도가 그만큼 조화로웠기 때문이다. 아마 바닷가를 그리는 풍경화를 연습한다면,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이 순간을 그대로 옮기기 위해 노력하기만 하면 될 것 같다.
절벽 위에 올라앉은 마을 안으로, 그녀와 함께 길을 걸었다. 길을 미처 모두 걷기도 전에 문득 옆의 골목이 나를 부른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저기 골목 들어가보자!"
나는 왜 이리 골목만 보면 기웃거리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15소년 표류기>나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모험 이야기가 담긴 책을 읽을 때면, 나는 언제나 아직 넘기지 않은 다음 페이지에 손가락을 바스락거리곤 했다. 그리고 낯선 골목 길, 그 너머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난 길을 만날 때 내가 느끼는 것은 바로 그 페이지의 가장자리에서 손가락이 느끼는 그 감촉과도 같은 간질거림이다.
언덕길을 오르다가 만난 그 골목길은 약간 아래로 경사져 있었다. 그리고 보이지 않던 그 골목길을 안쪽에는 벤치 하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하늘과 파도, 그리고 절벽이 지키고 있는 땅을 즐길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관람석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앉은 나는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는 파도'라는 이 진부한 표현이 비유가 아닌 묘사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함께 말없이 바다를 향해 앉아있던 그녀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나는 두 손을 깍지껴서 머리 뒤에 포개었다. 그리고 다리를 뻗어, 앞의 난간에 걸쳤다.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덕분에 '나'를 느낀다.
생각이라는 것은 언제나 '언어'의 지배를 받는다.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순간, 아주 잠시 그것의 존재를 알게 되는 찰나가 지나가고 나면, 나에게 포착된 모든 사물은 내가 알고 있는 언어의 질서 안에서 정립된다.
문득 그러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생각보다는 '느낌'이나 '깨달음' 정도가 더 어울릴 것 같다. 나는 그저 숨을 쉰다. 그리고 느낀다. 햇살을, 하늘을, 바다를. 온도를 통해, 소리를 통해, 냄새를 통해. 나의 숨결과, 나의 피부와, 나의 눈과 코와 귀. 그냥 나를 통해 세상을 느낀다.
잠시 나의 생각이 멈추고,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나'를 느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