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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고래 May 17. 2018

영화 <트립 투 스페인>

두 중년남성 배우들의 ‘진짜’ 여행이라는 ‘픽션’



 마이클 윈터바텀Michael Winterbottom 감독의 ‘더 트립 The Trip’ 시리즈 최신판 영화 <트립 투 스페인The Trip to Spain>(2017)이 2018년 5월 17일 한국에서 영화로 개봉했다. 전작으로는 <트립 투 잉글랜드>(2010, 한국에서는 2015년 개봉)로 알려진 <The Trip>(2010)과 <트립 투 이탈리아The Trip to Italy>(2014, 한국 2015년 개봉)가 있다. 참고로 한국에서는 시즌 2인 ‘이탈리아’ 편이 먼저 개봉했다. 더 참고로, 모든 작품들이 사실은 TV 시리즈이다.


 ‘더 트립’ 시리즈를 일찌감치 보아왔던 독자 또는 관객이라면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이 시리즈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점은 두 명의 중년 남성 주인공을 연기하는 배우들 ‘스티브 쿠건Steve Coogan’과 ‘롭 브라이든Rob Brydon’이 영화 속 캐릭터로 자기 이름을 가지고 등장한다는 점이다. 굳이 표기하자면 ‘스티브 쿠건(스티브 쿠건 분)’, ‘롭 브라이든(롭 브라이든 분)’이 되는 셈이다.


세상이 곧 영화 속이다,
영화-속-영화 film-within-a-film 형식

 여기에서 독자 또는 관객들이 미리 알아두면 좋을 사실 한 가지가 있다. 사실 이 형식은 윈터바텀 감독의 전작인 <수탉과 황소 이야기Tristram Shandy: A Cock and Bull Story>(2005)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 영화에서도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든’이 주인공들인데, 영화에서 이들은 각각 어떤 영화의 배역들을 연기하는 배우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든’으로 영화 <수탉과 황소 이야기>에 등장하는 것이다.


 윈터바텀 감독은 이러한 ‘영화-속-영화film-within-a-film’ 형식을 기반으로 해서, 두 배우들과 함께 2010년에 TV시리즈 <The Tirp>을 제작한다. 이 작품은 영국의 일요 매거진 《옵저버Observer》의 의뢰로,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두 중년남성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든’이 잉글랜드 북부 지방을 여행하며 겪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후 시리즈에서도 ‘옵저버’의 의뢰로 여행을 떠난다는 플롯은 꾸준히 유지되면서, 이 점은 ‘더 트립’ 시리즈의 특징 중 한 가지가 된다. (물론 배우가 자기 이름으로 이야기에 등장하는 것은 시트콤 형식의 특징이기도 하다. 어쨌든 한국에서는 영화 형식으로 독자 또는 관객들에게 제시되고 있으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영화-속-영화’ 형식은 영화의 내부 공간과 영화 외부의 ‘현실’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영화의 내용이 독자 또는 관객들과 같은 시간과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영화 <트립 투 스페인>도 마찬가지인데, 독자 또는 관객들은 그 안의 내용이 허구처럼 느끼는 동시에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두 사람의 여행에 대한 기록물(다큐멘터리)처럼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입 또는 엉덩이,
스티브는 무엇을 선택했을까?

 그들의 스페인 여행은 산탄데르에서 시작해서 지브롤터에서 끝을 맺게 된다. 그곳에서 롭은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떠나기 전 그들의 여행에 잠시 합류한 ‘엠마Emma(클레어 키란Claire Keelan 분)’와 함께 나누는 대화에서 스티브는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인 ‘ISIS’에 대한 농담을 꺼내고, 여기에 엠마가 《돈 키호테》로 유명한 스페인의 소설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알제 해적들에게 5년 동안 포로로 잡혔던 일화를 덧붙인다. 처음 납치되었을 때 몸값으로는 형제인 로드리고를 먼저 돌려보내고 세르반테스가 대신 남게 되었다. 그 이후 그는 네 번의 탈출시도를 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결국 5년이 지나고 나서야 몸값이 도착해서 풀려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탈출을 시도했는데도 세르반테스는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냐는 질문에, 엠마는 그가 우두머리의 ‘애인’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입’이 아니면 ‘엉덩이’였을 거라고 말이다.


 그런데 스티브는 홀로 배를 타고 모로코로 건너가게 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영화 <트립 온 스페인>은 두 개의 장면을 교차하여 제시한다. 스티브가 외로움을 못 이기고 다시 연락한 연인을 만나는 꿈 속 장면, 그리고 황무지 한가운데에서 연료가 떨어진 차에서 깨어난 후 한 무리의 낯선 이들이 트럭을 타고 그에게 질주하는 장면이 연이어 제시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연료가 떨어진 ‘레인지로버’와 러너의 비유이다. 영화에서 스티브와 롭은 운동 삼아 꾸준히 러닝을 한다. 영화는 그들이 여전히 활기차게 뛰어다닐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면서, 이와 함께 여행을 지속하는 탈것으로 ‘레인지로버’를 보여준다. 즉 ‘삶/여행’이라는 은유를 ‘러너/레인지로버’가 대유 또는 환유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자동차의 연료가 떨어진 것은, 더 이상 뛸 수 없는 러너를 의미하게 된다. 스티브와 롭이 자꾸 외면하고 부정하려는 ‘늙음’ 혹은 ‘죽음을 향한 러닝’이라는 진실에 대한 영화적 은유로도 볼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하나를 생각해볼 수 있게 된다. 세르반테스는 알제 해적들에게서 ‘입’ 또는 ‘엉덩이’로 생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쩌면 ISIS처럼도 보이는 트럭 탄 무리에게서) 스티브는 입과 엉덩이, 어느 쪽을 선택했을까.


 영화는 마지막으로 스티브의 묘하게 찡그린 표정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준다. 아마도 짐작하기로는 그 표정은 ‘만약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했을 때 우리가 지었을, 바로 그 표정일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고약한 영화

 ‘더 트립’ 시리즈를 보기 위해서는 독자 또는 관객들이 먼저 몇 가지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다. 첫째는 마음의 문을 열고 영국식 유머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고, 둘째는 해당 여행 지역에 대한 문화적·역사적 상식이 어느 정도 있는 것이 좋다는 점이며, 셋째는 영국과 미국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지식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트립 투 스페인>의 두 주인공 ‘롭’과 ‘스티브’는 영화 속에서 수많은 연극과 영화, 극작가와 배우들, 노래와 가수들을 끌어들여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들의 이러한 인용(引用)은 코미디, 즉 희극 형식을 통해 이뤄진다. 그런데 그들의 이 ‘코미디’가 다름 아닌 ‘영국식 말장난’과 다른 배우나 가수들의 흉내 내기로 구성된다.


 이로 인해 독자 또는 관객들은 ‘문화적 기표’와 ‘역사적 기표’의 범람을 마주하게 된다. 영화에는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 ‘파블로 피카소’, ‘안소니 홉킨스’, ‘데이빗 보위’, ‘로저 무어’, ‘믹 재거’ 등등 전부 열람하기도 버거운 ‘문화적 기표’들이 넘쳐흐른다. 심지어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든’의 실제 생애까지도 말이다. 덕분에 수많은 문학 작품들과 연극, 영화, 대중음악 등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보게 되면, 영화 <트립 투 스페인>은 그저 우스꽝스러운 ‘몸개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어 버린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역사적 기표’들이다. 로마시대 히스파니아 시기에서 8~15세기 무렵의 이슬람 문화권 시기 및 ‘카스티야, 아라곤, 그라나다, 나바라’ 왕국 시기를 거쳐 대항해시대의 에스파냐 왕국, 그리고 20세기 프랑코 정권의 독재기까지 이르는 ‘역사적 기표’들이 도처에 나타나게 된다. 주로 ‘스티브’의 대사를 통해 전달되는 이 내용들은, 영국인들이 생각하는 ‘여행’의 개념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적어도 스티브와 롭에게 있어 여행이란 ‘낯선 곳’의 음식으로 대표되는 문화뿐만 아니라 역사까지도 ‘직접 가서 보고 경험하는’ 행위로 정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다시 가고 싶은 스페인


 영화를 보는 중간, 문득 ‘여행 가고 싶다 스페인’ 하는 생각이 계속 끼어들었다. 아직 그곳을 여행해보지 못한 이들에게 있어, 영화 <트립 투 스페인>은 어쩌면 그의 여행을 대신하는 영화적 환상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마 이 점은 한 번이라도 그곳을 여행했던 사람이라면, 그 생각에 ‘다시’라는 부사가 따라 붙었을 것이 분명하다. 아름다운 햇살과 유쾌한 사람들, 그리고 하몽이나 초리쏘 같은 멋진 음식들에 대한 추억이 되살아나면서 말이다.


 아아. (다시) 여행 가고 싶다, 스페인.


사진출처 : https://watcha.net/mv/the-trip-to-spain-2017/m1wn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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