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수업이 있는 날이라 아침 일찍 일터로 나갔다. 공원과 산이 붙어있는 곳이고, 그 옆에 바로 초등학교가 있다. 올해에도 이 학교의 1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아이들과 만나 함께 공원과 산을 탐험하고 있다. 수업 전 한 바퀴 둘러볼 요량으로 공원을 걷는데 앞에 1~2학년으로 보이는 여자아이 셋이 보였다. 제 몸 만한 가방을 덩그렁덩그렁 둘러매고, 아침부터 군것질거리를 우물거리며 울멍줄멍 걸어가는 아이들. 그 모습이 귀여워 몇 학년이냐 말을 붙여보니 1학년이란다. 그중 한 아이가 나를 바라보며 반색을 하더니 외쳤다.
“어? 소림 선생님이다!”
예상치 못한 때에 너무도 정확히 내 이름을 외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나를 어떻게 아느냐 물으니 일곱 살 때 숲에서 만났단다. 알고 보니 작년에 한두 번쯤 맡아 수업했던, 그 동네 유치원 출신 아이였던 거다. 정말 신기했다. 그동안 수많은 선생님과 어른들을 만났을 텐데 지난해 만나 한 시간쯤 같이 시간을 보냈던 나를 기억하다니. '소림'이라는 이름이 아이들에게 쉽거나 친근하지도 않을 텐데 말이다. 실제로 수업을 시작할 때 이름을 말해준 다음 수업 중에나 끝날 때쯤 "내 이름 기억하는 사람!" 하고 물으면, 눈만 굴리며 웃고 있거나 눈썹 사이를 찌푸리고 가물가물한 기억을 헤집어 보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한두 번 스친 이름 두 글자를 해를 넘기고도 기억해 준 것이 고마워 아이의 이름을 물었고, 꼭 기억하겠노라 약속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아이 덕분에 행복하고 기분 좋게 아침을 시작했다.
활동 장소를 한 바퀴 돌아본 후 오늘 만날 2학년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저 뒤쪽에서 또 내 이름이 들렸다.
“어, 소림 선생님이다!”
30분 전에 들었던 말 그대로다. 마치 데자뷔를 겪은 듯한 느낌에 고개를 돌리니 따로 현장학습을 나온 3학년 아이들이 있었다. 소리의 근원지로 가니 한 남자아이가 배시시 웃고 있다. 지난 학기에 나에게 수업을 들었단다. 그랬더니 옆에 있는 아이들도 눈을 빛내고 웃으면서 알은체를 해왔다. 낯익은 듯한 얼굴이었지만 그간 워낙 많은 아이들을 만난 터라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았다. 내 이름도 기억하고 불러주었는데 미안했다. 한두 번 만난 이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렀을 때, 놀라고 고마워하는 표정 다음 가벼운 난처함과 미안함이 섞인 표정이 얼굴에 떠오르곤 했는데, 그때 그들이 느낀 게 이런 감정이었겠구나 싶었다.
숲에서 만난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건 일종의 나의 마음 씀이며 고마움과 애정의 표현이다. 모든 이의 이름을 기억하진 못하지만, 여러 번 만난 아이들의 이름을 그다음 달에, 혹은 이듬해 만났을 때 불러주기도 한다. 그때마다 아이들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는 걸 보며 덩달아 기분 좋아지곤 했는데, 그 마음을 오늘 확실히 알았다.
누군가 나를 떠올려 주는 것,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는다는 것은 얼굴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환히 밝혀주는 일이구나! 아침부터 어여쁜 선물 꾸러미를 받은 기분이었다.
어떤 이들이 그 기억 속에 담긴 나에 관해 이야기해 줄 때면, 그들이 기억하는 나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바라건대 봄날의 햇살처럼 포근하고, 가을의 낙엽처럼 풍성하다면 더욱 좋겠다. 그런 모습이길 상상하며 그를 닮아가기 위해 또는 그보다 더 좋은 사람이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기억 속의 그때보다 더 성장하고 더 멋있어진 사람이고 싶은 마음인 거다. 한두 번의 짧은 만남일지라도 이런 사람들은 내가 더욱 좋은 사람이 되게끔 한다. 고맙다. 그런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나와의 기억이 마음 한편에 행복한 조각으로 남을 수 있도록, 마음을 담고 정성을 들여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채우는 일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