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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정아 Sep 04. 2022

일주일, 두 번의 부고

카톡과 페북으로 전해오는 요즘의 이별

첫 번째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할머니가 두 분 계셨다. 할아버지는 그 시절 가끔 볼 수 있었던, 두 명의 아내를 두신 분이었다. 내 아버지와 고모를 낳아주신 첫째 부인, 손주들과 불과 서너 살 터울의 남매를 낳은 두 번째 부인이었다.


그 시절 꽤 많은 조강지처와 첩의 관계가 그랬듯 우리 집의 두 할머니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던 걸로 기억한다. 우리가 작은 할머니라 불렀던 두 번째 할머니는 어차피 도시에서 자녀 둘과 살고 계셨고 명절이나 제사 때에나 자녀들과 함께 시골집에 오셨다.


명절 때 고모와 삼촌을 보는 건 큰 즐거움이었다. 우리와 나이대가 가장 가까운 고모와 삼촌이었기에 우리는 사촌지간처럼 친하게 지냈다. 텃세가 있거나 설움이 있거나(그들의 입장에선 어땠을지 모르지만) 언니보다 겨우 서너 살 많은 고모는 명절 때 대가족 식사가 끝나면 어른스럽게 설거지를 하겠다고 자처하기도 했고, 그럼 나와 언니도 거들며 하하호호 즐겁게 설거지를 했다.


같은 도시에 살며 우리는 종종 왕래하며 지냈고, 내가 아주 어릴 때엔 엄마가 급한 일이 있어 나를 할머니 댁에 반나절 맡긴 적도 있어 할머니가 해주시는 떡볶이를 먹고 놀다 온 기억도 있다. 할머니가 우리 자매에게 똑같은 색동저고리 한복을 맞춰주신 적도 있고, 내가 고3이 되었을 무렵 할아버지가 작은 할머니 댁으로 거처를 옮겨 연락이 서로 뜸해지기 전까진 큰 소음이나 문제없이 지낸 관계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아빠와 삼촌은 연락을 하고 지낸다고 들었고, 삼촌은 아빠에게 깍듯이 형님 대접을 하며 연락을 하고 챙긴다고 들어서, 멀리 사는 딸 입장에선 고맙게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작은 할머니 소식을 들은 건 작년 여름, 손주들과 함께 시골에 방문하신 날이었다. 고모와 삼촌이 둘 다 결혼해 초등학생 자녀 둘씩을 데리고 시골에 와 찍은 사진을 카톡으로 받았다. 와 삼촌 딸들이 벌써 저렇게 컸어? 일찍 결혼한 고모 아들들은 초등학교 고학년이라고 했다.


어느새 손주 넷의 할머니가 된, 어엿한 한 가정의 큰 어른이 된 작은 할머니는 편안하고 안정되어 보였다. 우리 할머니에 비하면 한참은 젊은 할머니였다. 앞으로도 20년은 거뜬 없으실 것 같은 모습을 보니 요양원에서 거동도 불편하게 계시는 우리 할머니가 생각나 부럽고 속상했다. 연세가 한참 더 아래라고 했으니 아직 정정하신 게 신기한 일도 아니었지만. 한 살이라도 더 나이가 많다는 것, 늙는다는 건 결국 갈수록 점점 더 불리하고 불공평해지는 건가 싶어 슬펐었다.


그로부터 겨우 1년 후 작은 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5년의 백수 프리랜서 생활을 끝내고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3주 차로 접어든 어느 날 아침이었다. 언니에게 온 카톡으로 소식을 들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느끼는 건 세상에 허무하지 않은 죽음이 있을까 하는 거다. 수많은 죽음 중에 허망하지 않은 죽음은 얼마나 될까? 그런 게 있긴 할까?


할머니의 죽음도 그랬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킥보드 하나에 같이 올라타고 있던 남학생 두 명과 부딪혀 입원하셨다가 2주 만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처음엔 정신도 또렷하시고 대화에도 문제가 없었는데 며칠 사이 급 악화되신 건 아마도 뇌출혈 때문이라고 들었다. 사고사여서 경찰 수사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고 스케줄이 꼬여서 장례식 일정에도 차질이 생기고 뭔가 어수선하고 쓸쓸한 마지막이었다고 했다. 아빠와 장례식장을 다녀온 언니가 마음 아파하는 게 느껴졌다.



그게 화요일에 들은 소식이었는데 금요일 저녁 페이스북을 보다 또 다른 비보를 접했다. 뉴욕에 유학 와 처음 다녔던 사운드 엔지니어링 학교 교수님 중 한 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당시 학교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인 교수님들이 계셨지만 이분은 믹싱 수업 1,2를 가르쳐 주시며 몇 달을 함께해서 기억이 또렷하게 있는 분이었다. 왕년에 밴드에서 활동한 실력 있는 기타리스트이자 그래미 상을 수상한 믹싱 엔지니어 교수님은 성격도 쾌활하고 대부분 학생들이 좋아했다.


수업 내내 믹싱 한 음악을 들려드리며 검사를 맡을 때면 늘 어떤 피드백이 있을지 긴장하곤 했었다. 평소 학생들에게 날카로운 비평도 서슴지 않던 분이라 어느 날 내 음악을 들으시며 미간을 찌푸리시는 걸 보고 순간 긴장했는데 한참을 들으시더니 “So smooth”라고 하시며 씩 웃으시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믹싱에 소질 있나 싶어 스튜디오 쪽으로 일을 알아본다고 하니 스튜디오는 너무 어둡고 우울하다며 너는 비즈니스 쪽으로 나가야 한다고 강력하게 말씀하신 분이었다.


엔지니어가 되면 햇볕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도 모른 채 하루 종일 사람 얼굴 볼 새도 없이 기계만 만져야 한다. 너는 음반 레이블로 나가서 사람답게 살라고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하게 조언을 주셔서 나는 저작권 협회를 거쳐 결국 레이블에 갔었다.


페이스북에 학교 계정과 졸업생, 교수님들과 연결되어 있는데 피드에 누군가 올린 글을 본 건 첫 출근 3주 차 금요일 밤이었다. 할머니의 일생과 허무한 죽음이 아직도 하루에도 수시로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었는데 이 교수님도 아직 이렇게 가실 연세는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에 연결의 끈이 거의 사라진, 지금의 내 삶엔 조금의 영향도 없는 두 분이 한 주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마음이 너무 허하고 싱숭생숭했다. 사실 그들에 대한 게 아니라 나와 내 삶에 대한 지극히 이기적인 고민일 뿐인지도 모른다. 삶이란 뭘까? 죽음이란 뭘까? 하는 의문이 그들의 죽음으로 문득 선명히 다가온 건지도 모른다.


교수님의 페이스북에 가보니 많은 사람들이 글을 올리며 슬픔을 나누고 있었다. 가족과 친지들의 글도 보였다. 2022년의 죽음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공유되고 퍼진다. 댓글과 포스팅으로 슬픔을 표하고, 좋아요와 우는 모양 이모지로 애도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그에 대한 추억과 좋았던 시절의 이야기를 공유하며 나름의 방법으로 슬픔을 나눴다.

2022년의 죽음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공유되고, 좋아요와 우는 모양 이모지로 애도한다.

입사 3주 차인 나는 오롯이 시간을 가지고 애도할 틈 없이 그저 일상을 살뿐이었다.


그러나 생각하지 못하는 찰나에 그들의 죽음은 불쑥 머릿속에 떠올랐다.


오늘 점심은 밥을 먹을까 면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불쑥, 퇴근길 플랫폼에서 지하철이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불쑥, 출근길에 피어있는 나팔꽃을 보고 기분이 좋다가도 불쑥.


까만 여름밤 반딧불이가 파르르 불을 밝혔다 사라지듯 두 분의 죽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내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꺼졌다.


8월 중순 뉴욕의 지하철과 후덥지근한 날씨, 거리에 냄새나는 홈리스와 퇴근길 찾은 베이커리에 마지막 딱 하나 남은 플레인 크루아상 사이 어딘가, 순서도 없고 연관성도 없는 내 일상에 뒤죽박죽 끼어든 찰나의 순간에 나는 그들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그들의 웃음, 생전 그들과 함께 했던 길고 짧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면 순간 마음이 무거워졌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길 반복했다.


미국 생활 20년이 다 되어가니 이런 식으로 조용히 애도하는 것에 익숙하다. 해외 생활을 오래 하면 부고 소식을 전화나 카톡으로 전해 듣는 게 대부분이다.


유난히 상심이 클 때는 5번가 세인트 패트릭 대성당에 가서 돈을 얼마 내고 초를 한두 개 밝히고 기도를 하기도 한다. 그들의 평화로운 영면을 빌어주고 나오면 나도 멀리서나마 마음을 전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 유난히 작은 할머니의 생각이 더 떠오른 건 고인의 마지막 길이 어수선하고 쓸쓸했다는 얘기를 들은 후였다.


호적에 올라있지 않은, 가족이지만 객식구 같았던 작은 할머니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한 적도 없고 오히려 우리 할머니와 아버지 편에 있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보니 결혼식을 하지도 누구의 아내라고 나서지도 못하고 심지어 죽어서도 같은 곳에 묻히지 못하는 한 여자의 일생이 같은 여자로서 마음이 쓰렸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장 직원 분이 작은 할머니를 가리키며 저분은 누구시냐고 물었다. 그분 말씀에 따르면 장례식 첫날에 가족처럼 보이셔서 누구시냐고 여쭤봤는데, "저는 아무도 아닌 사람이에요"라는 대답을 들었다며 그게 무슨 뜻이냐고 나에게 물어온 것이다. 누군가의 어머니고 아내고 할머니였지만 일생의 대부분을 그림자같이 살았을 그녀의 편안하고 안정적인 모습을 본 게 겨우 1년 전이어서 마음이 더 먹먹했다.


아무리 연세가 있어도 백세 시대에 백세에 가까운 시점의 소수를 뺀 모든 죽음은 다 허망하다.


우리는 대부분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죽는다. 출근한다고 나간 게 마지막 모습이었거나, 내일 만날 거니 아무렇지도 않게 헤어진 게 마지막일 수 있는 건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지극히 흔한 현실의 이별이다.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일들은 매일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그러니 세상에 허망하지 않은 죽음이 없다. 사람들은 다들 백 년을 살 것처럼 살지만 사실은 어느 날 상상도 못 한 끝을 맞이할 거란 걸 생각하면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지, 소중한 시간을 어떤 사람들과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 생각하게 된다.


후회 없는 인생을 위해선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하라고 한다: 복권에 당첨되어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면 지금 무엇을 하겠는가? 돈을 받지 않아도 기꺼이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이상적인 삶을 산다는 게 어디 쉬운가. 그저 최대한 그에 가깝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하고 고민하며 조금씩 나아갈 뿐이다.



5년 만에 백수를 탈출하고 매일 출퇴근하니 오랜만에 삶을 꽉 채워 사는 느낌이다. 늘 같은 자리에서 일하는 동료들과 조금씩 알아가고 친해지는 것도 삶을 충만하게 해 주고, 재능을 살리는 일을 하며 인정받는 것도 보람 있다. 적성에 맞는 직업은 단순한 경제활동이 아니라 자아실현이기도 하다는 걸 체감하는 감사한 나날이다.


출근길에 보이는 사람들은 저마다 하루 중 가장 말끔한 얼굴을 하고 있다.


정성껏 한 메이크업은 아직 부은 얼굴에 보송하게 착 붙어있고 나름의 직업에 맞게 각자의 스타일을 살려 갖춰 입은 옷에는 티끌 하나 묻은 것 없이 깔끔한 모습이다. 퇴근 시간에는 찌들어 있을지언정 우리는 아침마다 최선의 모습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런 날들로 하루하루 채우며 삶이란 걸 살아간다.


삶의 생생한 에너지를 느끼며 출근을 하는 길은 나도 하루 중 가장 살아있는 느낌을 받는 시간이다. 이렇게 삶이라는 걸 모처럼 만끽하고 있는데 급하게 떠난 두 분의 소식을 들으니 새삼 내게 주어진 삶이라는 여정에 감사를 느낀다.


특별하고 거창한 인생은 아니어도 오늘 하루 할 수 있는 걸 하며 살다 보면 어느 날 갑작스레 떠나도 "이 정도면 하고 싶은 거 다 해봤어"하며 그럭저럭 아쉬움 없이 떠날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의 죽음을 안타까워만 하기보다 그들의 삶을 축복하고 오래 기억하고 싶다. 이 글이 죽음이 아닌 삶에 관한 글로 읽혔길 바란다.


당신은 수많은 별들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우주의 당당한 구성원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당신은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맥스 에흐만



우리는 모두 동등한 우주의 구성원이고 우리는 모두 빛나는 별이다.





두 분의 찬란했던 삶을 기억합니다. 편히 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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