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난 얼굴을 한 여자가 좋다

<세상을 바꾼 변호인>을 보고

by Chaeyooe



구해령, 콜레트, 차현

여자들은 모두 화가 난 얼굴이었다. 19세기 초 조선의 사관(역사 기록과 편찬을 담당하는 관직) 구해령(<신입사관 구해령>)은 계집답게 내명부의 법도를 따르라는 상궁에게 사관이 왜 그래야 하느냐며 항변한다. 실존 인물이기도 한 20세기 초 프랑스의 작가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콜레트>)는 당신은 지금도 마스터가 필요하다며 매달리는 남편에게 단호히 이혼을 외친다.


2019년 한국의 대기업 임원 차현(<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직장 동료를 못마땅한 눈초리로 쳐다보다가 이렇게 말한다. “인류가 만든 최악의 개념은 정상이다. 이런 말이 있어요. 정상 비정상이 어디 있습니까. 누가 그딴 걸 정하죠?"


출처 = (왼쪽부터) 네이버TV <MBC 신입사관 구해령>, empireonline.com, 네이버TV <tvN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세 사람은 모두 올해 나온 드라마 또는 영화의 주인공이다. 나는 이들이 좋다. 예민하기 짝이 없는 눈, 분노에 차 벌렁거리는 콧구멍, 반박하고 싶어 안달이 난 입술을 가졌고, ‘복잡하고 결함 많고 씩씩한 여성(김애란, 「잊기 좋은 이름」, 2019)’으로 사는 존재들.


당연함을 깨부수려는 이 여성 캐릭터들은 자기 검열과 반성에 길든 현실의 여성 시청자 또는 관객에게 더 말하고 더 행동해도 된다는 용기를 준다. 그리고 구해령과 콜레트와 차현과 같은 얼굴을 한 올해의 여성이 한 명 더 있다. 바로 <세상을 바꾼 변호인>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다.

출처 = VOD <세상을 바꾼 변호인>


진짜 긴즈버그

다큐멘터리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나는 반대한다>(2018)가 증명하듯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실존 인물이다. 어린이 위인전에서도 볼 수 있는 그는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여성 연방대법원(우리나라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기능을 겸하는 곳인데, 후자 쪽에 더 가깝다) 대법관이다.


그는 1993년에 지명된 뒤 종신 법관제에 따라 우리 나이로 여든일곱인 지금까지도 현역이다. 미미 레더가 연출한 <세상을 바꾼 변호인>은 긴즈버그가 롤 모델로 불리기 이전, 그러니까 하는 일마다 초(初) 자가 붙던 20대 초반부터 30대 후반까지의 젊은 시절을 극화한 영화다.


출처 = VOD <세상을 바꾼 변호인>


수줍은 여대생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나를 사로잡은 긴즈버그(펠리시티 존스)의 화난 얼굴을 담은 장면은 세 가지다. 첫째는 하버드 로스쿨 일학년생인 스물셋의 긴즈버그가 계약법 기초 강의에서 발언권을 얻기 위해 손을 들고 있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그가 분노한 이유는 남성 교수에게 자신이 차별받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긴즈버그는 강의실 정중앙 자리에 앉아 누구보다 빠르고 높게 손을 들지만 교수에게 선택받지 못한다. 그를 못 본 척하고, 출석부에서 ‘R. 루즈버그’의 사진과 이름을 확인하고도 굳이 남학생의 이름을 부르는 교수의 시점 숏들은 교수가 여학생인 긴즈버그를 강의에서 배제하려 한다는 의심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긴즈버그는 굴하지 않는다. 그는 남학생의 변변찮은 대답을 정정하는 것으로 발언의 기회를 얻는다. 그의 의견을 교수는 웃음거리로 만들지만 나쁘지 않다. 승리의 미소를 짓는 쪽은 긴즈버그다.


출처 = VOD <세상을 바꾼 변호인>


평범한 아내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둘째는 릿거스 대학 로스쿨의 교수가 된 서른일곱의 긴즈버그가 남편 마틴(아미 해머)에게 자신의 본심을 외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그는 세상을 바꿀 법률가를 키워내는 훌륭한 일을 하면서도 왜 당신의 처지를 비관하느냐고 따져 묻는 마틴에게 내가 그 법률가가 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긴즈버그는 절망적인 얼굴을 하고서도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암 재발의 위험을 안은 남편을 위해 그가 취직한 로펌이 있는 뉴욕으로 거처를 옮기고, 로스쿨(컬럼비아)까지 편입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의 우회를 아내의 미덕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는 희생과 맞바꾼 자신의 꿈을 아까워한다. 그는 수석 졸업이라는 자신의 뛰어난 차이가 유대인, 여자, 아이 엄마라는 공통된 것에 밀려나는 현실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분노와 환멸로 가득한 얼굴을 한 긴즈버그를 보며 나는 그가 당연한 것들의 역사에 제동을 걸 준비를 이미 끝냈음을 알았다.


출처 = VOD <세상을 바꾼 변호인>


세상을 바꾸는 변호인의 얼굴을 하다

셋째는 긴즈버그가 변호인으로 나선 첫 재판에서 마지막 4분 변론을 하기로 하는 장면이다. 그는 앞서 1차 변론에서 판사들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그들을 설득하지도 못한다. 실패한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자리로 돌아가자마자 상대측 변호인 보자스의 터무니없는 변론을 듣는다. 그래서 그는 그토록 독기 품은 얼굴을 하는 것이다.


긴즈버그가 재판에서 깨부수려는 당연한 것은 조세법 214조다. 그것은 가족 보육자 자격을 여성으로 지정함으로써 남성 가족 보육자를 차별하는 동시에 보육을 여성의 몫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여성에게도 차별적인 법률 조항이기 때문이다.


긴즈버그는 연방대법원에서 이 조항을 위헌으로 판결하고, 이것이 미래의 무수한 재판에 판례로 쓰인다면 성차별 자체를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그래서 그는 마틴과 함께 어머니의 간병인으로서 간병인 보수에 대한 세금 공제를 국세청에 신청했음에도 남성이란 이유로 공제를 거부당한 찰스 모리츠의 공동 변호를 맡는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


긴즈버그의 전투력을 상승시켜준 보자스의 변론은 다음과 같다. 보자스는 조세법 214조의 정당성을 자연의 섭리에서 찾는다. 보육자의 본능이 여성에게만 있다는 것은 딱히 입증할 논문이 없어도 인류 역사 10만 년이 이를 명백히 증명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모리츠가 가진 보육자로서의 기술과 본능을 의심하고, 긴즈버그와 마틴을 사건을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을 얻으려는 불순한 변호사로 몰아세운다.


재판 내내 애써 두렵지 않은 얼굴을 연기하던 긴즈버그는 상대측의 공격에 그제야 진짜 자신만만한 얼굴이 된다. ‘급격한 사회적 변화(Radical Social Change)’라는 말로 시작하는 그의 마지막 변론은 해당 재판을 세기의 재판으로 만든다.


출처 = VOD <세상을 바꾼 변호인>


<세상을 바꾸는 변호인>을 보며 나는 「체스의 모든 것」(김금희, 2017)의 두 여성을 떠올렸다. 대학생 국화는 지인들 앞에서 난데없이 이렇게 포부를 밝힌다. 이기는 사람. 부끄러우면 부끄러운 상태로 그걸 넘어서는 사람, 그렇게 이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런 국화를 동료인 ‘나’는 이런 말로 지지한다. 나는 걔가 이기는 사람이 되라고 응원해,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거기에는 아무런 의심이 없다고 생각해.


나도 국화처럼 이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왕이면,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처럼 이기는 여성이 되고 싶다. 동시에 나는 ‘나’처럼 응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전부 말고, 지금도 어디선가 이기는 사람이 되려고 잔뜩 화난 얼굴을 한 여성에게, 당신은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 큰 소리로 말해 주고 싶다.





[chaeyooe_cinema]

세상을 바꾼 변호인 On the Basis of Sex

감독 미미 레더 Mimi Leder



청소년 위인전같이 너무 친절한 영화지만 분명 누군가는 이 영화로 전투력을 키울 것을 알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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