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이섬 Jun 25. 2019

어떻게 생각하세요?

82회_이글_누구에게나 잠시, 미래가 보이는 순간이 있다_181121

지난 주말에 있었던 일입니다. 평소와 다르게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습니다. 주말에는 마냥 누워만 있고 싶었는데, 그렇게 무기력한 적이 있었는가 싶게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었지요. 목욕탕에 가서 때를 밀까, 머리를 잘라 볼까, 어쩔 줄 모르고 고민하다가 둘 다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먼저 자르고 목욕탕에 가서 때를 밀었습니다. 단장을 좀 하고 나니까 자신감도 생기는 것 같고, 잘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 동호회 모임이라는 게 아무래도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관심사나 취미가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서 같이 시간을 보내다가 운이 좋으면 서로의 짝도 만나게 되고, 아니 어쩌면 짝을 만날 수 있을까 해서 같은 관심사나 취미를 가진 사람들을 떼로 만나는 것 같기도 한, 뭐 그런 거죠.


아, 물론 저도 책 좋아합니다. 고르는 것도, 사는 것도, 읽는 것도 다 좋아하죠. 보통은 혼자 읽고 마는데,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책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뭐 겸사겸사. 마지막 연애가 4년쯤 전이었나. 일 년쯤 만나고 헤어졌는데, 그 사 개월을 네 번씩 보냈으니 이제는 같이 책 이야기도 도란도란 나눌 수 있는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모임의 주제는 ‘정의’, 책은 ‘정의란 무엇인가’였습니다. 모두가 관심 있어 할 만한 주제와 모두가 알지만 누구도 읽지 않았을 것 같은 책. 꽤 괜찮은 조합이었습니다. 전부 책을 읽어오기도 했고요. 처음에는 다들 발언에 소극적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데다, 그냥 대화도 아니고 정의에 관한 자기 의견을 말하는 자리였으니 불편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나마 모임에 탄력이 붙은 건 공정함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였습니다.


백인 여성인 셰릴 홉우드는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라 자력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텍사스 로스쿨에 지원했다. 그녀는 떨어졌지만, 그녀보다 점수가 낮은 아프리카계·멕시코계 미국인이 합격했다. 소수인종 우대 정책 덕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소개한 사례입니다. 이것은 공정한가요? 아니면 불공정한가요?


절반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그 일이 불공정하다고 말했습니다. 노력한 만큼 점수를 받는 것이고, 받은 점수를 기준으로 합격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논리였습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이 맞다고 꼭 저 말이 틀린 건 아닙니다. 다수의 의견과는 다소 다르지만, 애초에 소수인종들이 차별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그들을 제도적으로 우대하는 것이 한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 보면 더 공정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공정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렸습니다. 노력해서 기여한 만큼에 비례해 받는 것이 공정이라고 믿는다면, 저 사례는 불공정합니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보편적으로 평등한 권리를 보장받는 것이 공정이라고 믿는다면, 저 사례는 공정합니다. 이것을 각각 비례 원리와 보편 원리로 부르는 시사인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아무튼 다수인 비례 원리 사람들의 목소리가 크긴 했지만, 소수의 보편 원리 사람들도 자신들의 의견을 바꿀 여지는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이견은 좁혀지지 않았고, 대화는 그 자리를 맴돌았습니다. 오래전에 어딘가에서 읽었는데, 누구에게나 잠시, 미래가 보이는 순간이 있다고 합니다. 그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대화 사이에서 저는 미래를 봤던 것 같습니다.

이 모임은 망했구나. 서로가 정의라고 외치는 이 사람들은 이 방에서 나가면 다시는 만나지 않겠구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말하겠구나. 세상에는 노력하지 않고 거저먹으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혹은 자기들 손에 가득 쥐고 있으면서 조금도 내려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모임 종료 시간을 훌쩍 넘겨서까지 이어지는 대화를 남겨두고, 조용히 일어나서 그 방을 빠져나왔습니다. 문 앞에서 한숨을 돌리는데, 저 말고도 한 분이 더 나오시더군요. 그분도 조심스럽게 나오다가 저와 눈이 마주치고는 둘이 더 조심스럽게 웃어버렸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그분한테는 연락을 해봐도 괜찮지 않을까요?

모임이 망했다고, 저까지 망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이전 16화 내일 만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