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책이글 84회_이글_"걔는 요즘 어떻게 지낸대?"_181211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었다. 어렸을 때는 하루가 멀다고 붙어 다녔지만, 자기 인생을 스스로 보살펴야 하는 때가 되면서 일 년에 한번 모이기도 힘들어졌다. 그래도 연말이라고 그 시절 친구들이 거의 모였다.
어렸을 때 어른들이 그랬다. 고등학교 친구까지가 진짜 친구고, 대학 가고 사회 가서 만난 친구들은 그만큼 친해지기 어렵다고. 다들 알게 모르게 잇속만 차리고 진심으로 마음을 나누기는 어렵다고.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을 다니는 동안 매일 붙어 다녔던 또 다른 친구들이나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만난 직장 동료들, 지인들을 만나면서도 어릴 적 이 친구들이 그리웠다.
이 녀석들을 만나야 거리낌 없이, 감추는 것 없이, 내 안의 후진 부분까지 드러낼 수 있었다. 근 일 년 만에 만난 친구들은 역시 여전했다. 변한 것이 없었다.
한 녀석이 먼저 말을 꺼냈다. 자기 회사에 고 부장이라는 미친놈이 있는데 사이코패스임이 틀림없다고 한다. 그 친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른 친구의 말이 이어졌다. 고 부장 얘기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기 직장생활 얘기도 아니고, 비트코인 얘기였다. 요즘 암호화폐 가격이 많이 떨어졌다고 했다. 적금도 깨서 돈을 넣었는데, 이제 다 망해버렸다고 연신 욕을 해댔다. 그 친구의 욕이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친구가 말을 꺼냈다. 서울 외곽 쪽 어디에 아파트를 한 채 분양받았다고 했다. 똘똘한 집이라고 하는데, 집이 어떻게 똘똘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집이 자기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말하는 도중에 또 다른 친구가 말을 채갔다.
행복한 남자는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남자는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불행한 남자들은 자신의 불행을 과시한다. 누군가가 자기보다 더 불행한 것을 견디지 못한다. 이 구역에서 제일 불행한 건 나여야 한다.
“야,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이라는 말을 앉은 자리에서 다섯 번은 연달아 들었던 것 같다. 불행배틀은 언제나 짜릿하다. 열 번쯤 했던 얘기도 괜찮다. 늘 새롭다.
다만 불행배틀에는 마감 시간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곤하고 지친다. 그래서 하나둘씩 불행에서 빠져나오는 사람들이 생긴다. 남은 사람들의 기분이 완전히 납작해지기 직전에, 언제나 성공하는 분위기 반전 카드가 나왔다.
“걔는 요즘 어떻게 지낸대?”
가라앉던 분위기가 단번에 달아올랐다. 특정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았다. 학창시절 제일 유명했던 친구. 잘 노는데 공부도 잘하고, 잘 생기고 운동도 잘했던 그 친구. 이 모임도 졸업하고 나서 그 친구가 거의 주도해서 만들었었는데, 언젠가부터 발걸음이 뜸해지더니 2년 전쯤부터는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 친구는 이제 얼굴 대신 이야기로 존재했다.
말짱하게 잘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창업을 한다, 사업을 한다,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다가, 뭔가 좀 그럴싸한 걸 한다는 것 같더니, 언젠가부터 소식이 점점 뜸해졌었다. 얼굴은 가물가물한데 추락담은 생생했다.
그렇게 시작된 그 친구 이야기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다들 기분이 조금씩 나아졌고, 그걸로 충분했다.
요즘 그 그룹의 멤버, 걔 누구더라.. 이름이 생각이 안나네. 아무튼 걔 죽이지 않냐? 걔보다는 얘가 낫지. 뭐래, 당연히 걔가 낫지. 요즘도 아이돌이나 보고 있냐. 너네도 이제 주식해야지. 내가 좋은 종목 하나 찍어줘? 야 됐고, 이번에 새로 나온 그 차 봤냐? 아, 출근하기 싫다. 어디서 로또라도 안떨어지나.
모두가 말을 하고 있었고, 누구도 듣고 있지 않았다.
어른이 되고 보니, 그 시절 어른들의 말은 틀렸다.
집에 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