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바보 혹은 아내천재
“내가 우리 애 36개월 골든타임이 다가오는 게 무섭다고 그때까지만 살고 죽고 싶다니까 신랑이 뭐라 한 줄 알아? “
화가 머리 끝까지 나고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새어 나왔다. 아이의 자폐 스펙트럼 진단을 받던 그 청천벽력 같던 날의 당일에도 대학병원까지 와서 내 손을 부여잡고 나보다도 더 울던 20년 지기 친한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설마 그러래?”
“아니 차라리 그게 낫겠다! 48개월 까지가 진짜 골든타임이니까 애를 위해서 그때 죽으래!”
내가 내 입으로 말을 하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내가 정말 죽는다는데 신랑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얼굴로 아이의 골든타임엔 엄마가 있어야 한다며 좀만 더 참다 죽으랜다.
시간을 좀 거슬러 올라가 핑크빛 연애시절 얘기를 해보자면 우리 엄마는 나와 신랑이 “실과 바늘” 이라며 어쩜 그렇게 할 얘기가 많고 잘 통하냐고 흐뭇해했고 주변에선 우리를 늘 부러워하고는 했다. 그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난 다 우리 같이 사는 건 줄 알았다. 그랬던 우리가 이 따위로 싸우다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우리는 같은 이민 1.5세 캐나다 교포로 다른 지역의 고등학교를 다녔지만 학창 시절부터 알고 지냈고 대학교 때 연애를 시작한 뒤 3년간 교제를 하고 내가 고작 25살, 신랑이 27살 때 결혼을 했다.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평생 이렇게 한마음 일 거라고.
나는 신랑의 유하고 따뜻하고 배려심 많은 모습이 너무 좋았다. 성격이 급하고 생각도 많은 나는 감정기복이 심한 편이었는데 신랑을 만나고 감정이 요동치는 일이 줄어갔다. 내 자존감이 떨어질 때에도 나의 가치를 알아주고 있는 그대로 나를 사랑해 주는 이 사람과 함께 한다면 이 세상 어디에서도 행복할 거라고 자신했다.
내 운동화 끈이 풀리면 나보다 먼저 알아채 무릎을 꿇어 묶어주고 아주 사소한 기념일도 다 챙겨주는 사람이었다. 결혼 한 뒤에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약을 매년 잊지 않고 선물하고 늘 캐나다와 부모님을 뒤로 한채 자신이 일하고 있는 한국으로 와준걸 고맙고 미안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시들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내게 더 잘해주는 진국인 사람이 내가 뭘 해도 예쁘다 해주니 천생연분이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인가 싶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제일 좋았던 건 대화가 너무 잘 통했다. 관심사도, 가치관도, 입맛, 성향까지도 너무 잘 맞아서 신혼 때는 아침에 눈 뜨고 잠들 때까지 수다를 떨 정도였다. 개그코드가 잘 맞아서 너무 웃다 배가 땅겨서 데굴데굴 구를 정도로 웃고는 했다. 성향은 같으나 성격은 너무 달랐는데 그게 오히려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는 우리도 다툴 때가 있었지만 친구에게 신랑 흉을 보거나 조언을 구하려다가도 나는 깨닫고는 했다. 그 상대마저도 신랑보다 적격인 사람이 없다는 걸. 그래서 티격대격 하면서도 계속 얘기를 하다 보니 골이 깊어지지 않았기에 앙금이 하루를 채 가지 못했던 우리였다. 우리는 서로의 베스트 프렌드였으니까. 아니 소울메이트 그 이상의 관계였다.
물론 우리도 남들처럼 아이를 낳고 난 뒤 하루아침에 바뀌어 버린 일상에 허덕였다. 잠도 부족하고 힘에 부치니 많이도 다퉜다.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던 퍼즐 같던 우리가, 우리의 찰떡궁합 시너지가 육아라는 동업을 하며 빛을 바라갔다. 아이를 키우며 전쟁모드에 돌입해 멀티 태스킹을 하며 움직이고 매사에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마음이 편했던 나는, 늘 그랬듯 유하고 느긋한 신랑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육아에는 정답이 없다지만 정말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았다. 돌아가신 우리 외할머니가 좋아하시던 아침마당 프로에 나올법한 농담인 “너 없으면 못 살겠어” 의 마음으로 결혼해서 “너 때문에 못 살겠어” 가 된다는 그 말이 진심으로 와닿는 아줌마 아저씨가 되어있었다.
정신없이 아이를 키우느라 오해가 생겨도 그때그때 풀지 못하고 서로에게 귀 기울여 줄 수 있는 시간도 턱 없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서로를 딱하게 생각하며 버티고 있었다. 임신을 했을 당시부터 코로나가 기승이었고 출산 이후에도 난리였기 때문에 아이와 외출하는 것도 겁이 났고 잠깐 코에 바람 쐬기도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난 아이와 단둘이 외딴섬에 덩그러니 버려진 것만 같았고 극심한 우울감에 침식되고 있었다. 하지만 난생처음 가장의 무게를 느끼며 일하는 신랑의 뒷모습도 안타까워 속내를 다 털어놓지도 못했다. 좁혀질 줄 알았던 초보 엄마아빠의 간극은 발달지연을 알아채며 더 극명하게 커져만 갔다.
아무리 그래도 대학병원에서 만큼은 정말 같은 반응 일 줄 알았다.
“스펙트럼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라고 첫 번째 의사가 얘기했을 때에도 “스펙트럼입니다. 카스(K-CARS) 점수를 대략적으로 알겠네요”라고 두 번째 의사가 말했을 때에도 내 머릿속은 아이보단 우리 부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K-CARS: 한국판 아동기 자폐 평정 척도 검사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지? “
”우리 신랑 불쌍해서 어떡하지? “
“우리가 뭘 잘못했지? 왜 이런 벌을 받아야 하지?”
아름답고 아련한 우리 부부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나야 이민 후 가정형편이 기울어져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아보기도 하고 10대 때부터 아르바이트도 하고 학자금 대출도 받으며 아등바등 살아봤지만 고생 한번 안 하고 유복하게 꽃길만 걷고 산 신랑이 가시밭길을 걷게 되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신랑이 나의 첫째 아들인 것 마냥 가슴이 아팠나 보다.
그때만 해도 발달지연과 자폐 스펙트럼의 다양성에 대해 무지했고 그저 대학병원 의사의 말이면 다 믿고 추앙했던 때라서 진단의 충격이 심했다. 내가 아무리 미숙한 엄마라지만 애지중지 키운 아이가 자폐라니.
의사의 진단에 머리가 끝도 없는 의문과 질문으로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숨을 고르고 최대한 침착하게 한 가지만 골라 물어보았다. 아이가 나와 애착이 있기는 한 거냐고. 엄마 껌딱지에 몇 마디밖에 못 하는 아이임에도 “안아 안아”라는 말을 제일 많이 하는데 우리 아이가 정말 내가 영화 “말아톤”에서 봤던 자폐아일까. 아니면 그보다는 나아 보이는 포레스트 검프 (Forest Gump) 정도로 크는 걸까. 일론 머스크도 (Elon Musk) 아스퍼거라던데 좀 특이해도 그 정도로 성공하면 소원이 없겠다. 별의별 생각이 머릿속을 다 헤집어놨다.
*아스퍼거 증후군: 자폐 스펙트럼 장애 (ASD) 중 하나로 고기능 자폐에 속하는 경우로서 전반적으로 언어적 의사소통과 인지능력의 발달지연 없이 사회적 상호작용 및 비언어적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다
의사는 아이가 나를 엄마로 인식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라고 했다. 당시 25개월이었던 아이가 너무 어리기도 했거니와 자폐아는 엄마가 그저 자신의 니즈(needs, 필요)를 제일 빨리 알아주고 채워주는 자신과 좀 친밀한 사람인 정도로 인식을 한다고 하면서 말이다. 우리 아이는 호명반응도 안 되고 상호작용도 안 된다면서 하루빨리 ABA (Applied Behavior Analysis, 응용행동분석 치료)와 언어치료를 시작하라고 날 재촉했다.
”진료실 5분 컷“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대학병원 소아정신과 의사들은 용한 무당처럼 아이가 진료실 문을 열고 딱 들어올 때부터 바로 안다던데 우리 애가 그렇게 튈 정도로 심한 상태인 건가. 아이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깨달은 순간부터 수백 번 들락날락거린 느린 아이 엄마들의 카페에는 세돌은 지나야 확진을 한다던데 벌써 이렇게 진단을 내린다고?
어느 정도 각오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귓가에 삐 소리가 울리며 다음 예약을 잡자는 간호사의 말도, 수납처를 설명하는 말도 잘 들리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듯 아이의 손을 꽉 잡았지만 살짝 휘청 거리는 나를 간호사는 익숙한 광경인 듯 기다려줬다. 그렇게 애써 담담한 척을 해봐도 의사의 단호함에 우리 아이의 장애는 아무리 내가 노력을 해도 나을 수 없는 불치병이라는 게, 평생 비정상적인 아이를 키우게 됐다는 게 크나 큰 형벌처럼 느껴졌다.
특히나 첫 번째 병원의 의사는 세게 말하는 스타일이었는데 아이가 진료실 안의 어떤 장난감을 흔들어 귀에 대고 소리를 내는 것을 보더니 “보셨죠. 저거 청각추구예요” 라며 그때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날 더 불안하게 했다. 상호작용은 어떠냐고 묻길래 내 머리를 빗어주기도 하고 함께 웃기고 하고 한다니까 겨우 그거냐며 두 돌 치고 상호작용의 질이 너무 낮다고 무안을 주었다.
나는 아이 없이 자유롭고 행복했던 우리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지금의 우리가 너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심지어 마음 아픈 유산을 한번 겪고 다시 용기를 내 난임센터를 다니며 가진 아이였는데도 말이다. 나는 당연히 신랑의 생각의 회로도 이렇게 흘러간 줄 알았다. 아무리 우리가 좀 멀어졌어도 우리는 소울메이트 이니까 그게 당연한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날 정신없이 진료실을 빠져나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던 내게 신랑은 눈도 맞추지 않은 채 오로지 아이에게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애가 불안해하는 거 같으니까 지금 울지 마.“ 이 사람이 내가 알던 사람이 맞나? 정말로 눈물이 쏙 들어갔다.
티비나 영화에선 아이가 어떤 식으로든 아프면 다들 아이 다음으로 엄마를 제일 안쓰러워한다.
백이면 백 안아주고, 위로해 준다. 하지만 현실에선 20년 지기 친한 언니 빼고는 아무도 내 마음을 들여봐 주지 않았다.
친정 부모님은 태평양 건너 캐나다에 계셨고 애초에 난 부모님께 힘든 일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고 기대는 딸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내바보인 신랑이 있으니 걱정이 없었는데 나는 이제 누구에게 내 속을 털어놓으냔 말이다. 내가 아이의 주양육자이고 이제 난 아이의 손을 잡고 기나긴 마라톤을 뛰어야 할 텐데 목 축이는 곳이 중간중간 에라도 있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그렇게 아내바보에서 아내천재로 돌변해 버린 신랑은 무너지는 내 마음을 공감을 해주기는커녕 모든 감정을 다 배제시킨 채 이성적인 말만 늘어놓고 있었다.
병원에서 돌아와 우리는 멍한 채로 밤을 꼴딱 새우고 그 다음날 바로 행동력 갑인 시어머니의 인솔 하에 발달센터로 향했다. 대체 여기가 뭐 하는 곳일까 하는 생각에 문을 열었는데 생각보다 무거운 분위기도 아니고 선생님을 기다리며 아이가 놀 수 있는 공간도 있어 다행이었다. 그때부터 만나는 선생님마다 우리가 일찍 아이의 발달상태를 알게 돼서 다행이라며 로키는 기능이 좋으니 예후도 좋을 거라는 말을 했다.
*로키: 캐나다 로키산맥의 로키를 따온 것으로 아이의 태명이다. 앞으로 아이를 이렇게 지칭함.
그때부터 36개월 골든타임 대막의 장이 열렸다. 나는 마치 지상파 오디션 프로그램 속 간절한 참가자가 된 것처럼 매 순간 엄마의 자질을 평가받는 것 같았고 조금만 삐끗해도 탈락할 것 같은 두려움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아이가 어릴수록 뇌 가소성(neuroplasticity)에 기반하여 잘 치료하면 완치가 된 경우도 있다더라, 알고 보면 오진인 경우도 있다더라 하는 글들을 밤새 찾아보며 “우리도 그 경우인 게 아닐까?” “하늘이시여 제발 우리가 그 경우가 되게 해 주세요!” 하고 빌고 또 빌었다. 정말 티비 속 참가자처럼 펄쩍펄쩍 뛰며 “픽미 픽미” 노래라도 부를 판이었다.
*뇌 가소성: 뇌의 구조나 기능이 경험이나 환경적 자극에 따라 변화한다는 이론. 말 그대로 뇌의 가소성을 활용하는 치료로써 뇌의 회복이나 개선을 도와준다. 이는 더 나은 사회적, 언어적, 인지적 기능을 향상한다.
하지만 부모의 갖은 노력이 무색하게도 결국 장애등록을 하고 평생 독립을 하지 못하는 말 그대로 중증자폐아를 키우는 가족들이 더 많은 게 현실이었다. 처음에는 희망 가득한 글 위주로만 읽던 나는 이젠 중증장애아 가족의 다큐까지 찾아보고 있었다.
모래시계 속 잡히지 않는 수 없이 많은 곱디고운 모래알처럼 아이가 정상발달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은 그렇게 매 순간 바닥이 나고 있었고 난 나만의 상상 속 장정이 된 로키를 죽을 때까지 돌봐줄 자신이 없었다. 아니, 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결심한 나는 신랑에게도 선전포고를 했다. 눈 딱 감고 아이의 골든타임인 36개월까지만 살아보기로.
그랬던 내가 이제 6살이 된 아이를 키우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진단을 받은 그 순간부터 로키아빠의 유일한 방어기제는 이성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는 걸. 힘들면 언제든 떠나가라고 혼자 로키를 키우겠다고 덤덤히 말하던 모습 뒤에 남몰래 가슴 아파한 날들이 있었다는 걸.
내가 감정에 복 받혀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고 하소연할 때 아무 말도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던 로키아빠. 다 포기하고 싶다고 주저앉아 목 놓아 울던 내 어깨에 조심스레 손을 올리던 로키아빠. 그는 이성이라는 최전방의 기지에서 소리 없는 전쟁을 하며 내가 때때로 미칠 수 있도록 싸워주고 있었다.
로키가 한창 각성조절이 안 되어 새벽에 깨고 허공을 보며 혼자 깔깔 웃을 때에도 놀란 기색 없이 시종일관 밝은 얼굴을 하고 기꺼이 같이 웃던 그다. 나는 그런 아이를 두고 몰래 옷방으로 가 흐느낄 수 있도록 그렇게 그는 나를 지켜주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삼켰을지 이제는 안다. 오로지 나아갈 생각만 하느라 무너질 겨를도 없이 힘들어 하는 건 사치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런 그도 사실은 무너지는 마음을 부여잡고 혼미해지는 정신을 겨우 차리고 있었기에 날것 그대로 아파하던 나를, 내 엉킬 대로 엉킨 실타래 같은 감정을 풀어줄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내게 48개월까지만 이라도 살아보라는 모질고도 절박한 말을 했던 것이다.
그 사무치는 기억을 뒤로 한채 이제는 안다. 내가 죽고 싶다고 해서 죽지도 못하고 내가 도망가고 싶다고 해서 도망도 못 가는 그는 여전한 아내바보라는 걸.
그리고 아이의 48개월이 되던 날, 난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