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길만 걷게 해 줄게
꽃길만 걷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 아닐까.
나는 좁고 외로운 길을 간대도 적어도 내 자식만큼은 꽃길만 걸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그래서 우리는 계획하고, 대비하고, 여러 준비를 하지만 신을 웃기고 싶으면 신에게 너의 계획을 말해 보라 더니 (If you want to make God laugh, tell him your plans) 인간의 계획은 얼마나 쉽게 어긋나던가. 결국 삶은 예상치도 못한 방식으로 전개되고 이를 통해 나는 과연 얼마나 겸허 해질 수 있을까. 또한 내 아이를 통해 나는 얼마나 겸허 해 질 수 있을까. 오늘은 강박적일 만큼 삶을 통제하고 싶었던 나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 보려 한다.
우리 아들의 태명은 로키이다.
캐나다에서 자란 우리 부부가 익숙한 캐나다의 로키산맥처럼 멋지고 큰 아이가 되라고 로키라고 지었다.
로키를 낳기 전 마음 아픈 유산을 한번 겪었었기에 부디 건강하고 튼튼한 아이가 태어나기만을 바라왔었다. 지금은 아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도 없고 신랑과 지난 얘기를 하다 보면 "그때 로키가 없었다고?" 하며 화들짝 놀라고는 하지만 우리도 앳된 신혼부부 일 때가 있었다.
나는 25살에 일찍 결혼을 해서인지 아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사실 신랑을 만나기 전에는 꿈꾸는 결혼생활도 없었고 나 하나 챙기기도 버거운 세상인데 하나의 생명을 책임진다는 게 너무나 부담스러운 일로 느껴졌었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그리 좋지도 않은 세상에 내가 아파가면서까지 일부러 한 명을 더 추가해야 하나 싶었다. 극단적인 예시지만 학교가 싫으면 안 가면 되고 직장이 싫으면 때려치우면 되는데 아이는 다시 뱃속에 집어넣을 수도 없으니 그 막중한 책임감도 너무 무겁게만 느껴졌다.
반면에 신랑은 연애 때부터 종종 아이를 갖고 싶다고 했다. 그는 아이가 셋은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는 했는데 지금 내가 그 얘길 꺼내며 놀리면 혼비백산한 얼굴로 그땐 육아가 얼마나 부모의 영혼을 갈아 넣는 일인지 몰랐으니 가능한 소리였다고 한다. 아무튼 그렇게 단란한 가정을 꿈꾸던 신랑이었지만 아이는 엄마인 내가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해야 하는 한 여자의 선택임을 존중해 줬고 그렇게 우린 둘만의 신혼을 즐겼다.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고 약 4년 정도의 신혼기간을 보내다가 자연스럽게 아이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신랑은 아이가 꼭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고 나도 이 사람과 결혼을 한 이상, 이 사람과 끝장을 보자고 마음먹었으니 우리 사이에 아이 하나 정도는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슬슬 들었다.
하지만 계획 대로 될 리가 없는 인생. 우리에게 아기는 쉽게 찾아와 주지 않았고 용기를 내 찾아간 난임 병원에서는 내가 다낭성 증후군이 있어서 자연임신의 확률이 낮다고 했다. 그래서 병원을 다니며 배란주사를 맞으며 아이를 갖게 됐는데 그때는 이 사실이 왜 그렇게 주눅이 들었는지 쉬쉬 하게 됐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것도 오만방자함의 일종인 "잘난 내가 자연임신이 안된다고?" 하는 생각이었나 싶기도 하다.
*다낭성 증후군: 다낭성 난소 증후군(PCOS)은 난임을 유발할 수 있는 호르몬 불균형 상태로, 난소에 여러 개의 작은 낭종이 형성되는 질환
유산을 했던 때와 같은 형식으로 배란주사를 시도한 지 첫 달 만에 다시 임신이 되었고 우리는 참 행복했다. 하지만 나는 임신 테스트기에 두 줄이 희미하게 비칠 때쯤부터 이미 몸의 변화를 알아챌 만큼 예민했고 임신 내내 입덧이 매우 심했다. 먹덧, 토덧 등등 종류별의 입덧은 다 겪었다. 음식을 먹고 결국 다 토할걸 알면서도 공복 시 울렁거림이 너무 괴로워서(빈속을 못 견디는 먹덧) 나중에는 토하기 편한 음식을 골라 먹을 정도였다. 괜히 찜찜해서 먹기 싫었던 입덧약은 결국 만삭까지도 먹었으니 그 아픈 진통을 겪고도 출산 후에 사라진 울렁거림에 개운해서 날아갈 것만 같았다.
출산 당일의 새벽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새벽 3시쯤 쎄한 느낌과 사르르 한 복통에 화장실로 달려갔더니 이슬이 비춘 걸 보았다. 그리고는 정말 출산의 임박함을 알리듯이 양수가 폭포처럼 콸콸콸 흐르기 시작했다. 다급한 마음으로 병원에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간호사가 이제 겨우 시작이니 식사를 꼭 하고 오라고 사무적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진통이 시작된 그 시점에도 나는 토를 하느냐 결국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신랑의 손을 잡고 떨리는 마음으로 병원으로 향했다.
*이슬: 아기가 나올 준비가 되었을 때 자궁경부에서 나오는 맑고 투명한 물로 출산이 가까워졌다는 신호로 알려져 있음
분만실에 누워 연결된 모니터로 나의 심장 박동수와 뱃속 아기의 심장박동수를 같이 들으며 계속 올라가는 진통 그래프를 보고 있자 하니 “정말 출산을 하는구나” 하고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린 불룩한 만삭의 배도 꿀렁거리는 태동도 정말 안녕이겠구나.
아직은 가진통의 수준이라고 했지만 확실히 한 시간 한 시간이 지날수록 진통은 점점 더 세져갔다. 하지만 난 진통의 두려움보다는 불안함과 초조함이 더 컸다. 사실 난 출산의 고통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아기가 잘못되는 일이었다.
나는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 우렁차게 울고, 아기를 내 품에 안고, 내 두 눈으로 볼 때까지도 안심을 할 수가 없었다. 유산을 한번 했던 탓인지, 생각이 많은 성격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괜히 불길 했던 건지 그렇게도 불안했다. 그래서 아기만 건강하게 잘 태어날 수 있다면 그 어떤 고통도 두렵지 않았다. 제발 건강한 아기를 무사히 만나게만 해달라고 기도했다.
뱃속에 모든 장기가 뒤틀리는듯한 진통이 지속 됐고 그 고통에 나는 자포자기로 누워 있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아주 심한 배탈이 났을 때처럼 배를 부여잡고 온몸을 움츠리고 싶은 내 마음과는 달리 오히려 분만실 침대에서 등을 떼고 열심히 힘을 줘야 했다. 그렇게 자궁문이 많이 열렸고 적절한 타이밍에 무통주사를 맞기로 했기에 나는 만삭의 몸으로 겨우겨우 옆으로 누운 채 새우자세를 취했다. 척추에 무통주사를 놓는다고 해서 겁이 났었는데 진통에 가려져 주사의 통증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무통주사를 맞고 나면 산뜻한 기분일 줄 알았는데 하반신이 무감각 해지며 얼얼 한 불편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나는 불편함이고 뭐고 줄어든 통증 덕에 잠시 쪽잠을 잘 수 있었다. 계획형 인간인 나는 그 와중에도 계속 시간을 체크하며 이성적으로 내가 얼마나 더 힘을 줄 수 있을까? 출산 예상시간이 어떻게 될까? 하며 속으로 따져봤다. 난임병원을 거쳤지만 그래도 꽤나 순조롭게 계획 한 대로 임신이 되고, 계획 한 대로 자연분만을 하던 나는 그렇게 나의 육아도 계획대로 흘러갈 줄 알았나 보다.
잠에서 깬 후 의료진이 아기가 많이 내려왔다고 하며 무통주사 마취제의 주입을 껐고 이제부터는 나의 하반신을 온전히 다 느끼며 힘을 줘야 한다고 했다. 그때부턴 정말 낙장불입이었다. 이젠 아기의 머리가 내려온 걸 설명을 듣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상황에 다다랐지만 점점 내 힘이 빠지는 탓에 아기가 쑥 하고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난 고생은 고생대로 하다 결국엔 제왕절개를 하는 비운의 산모가 될 수는 없단 생각에 정말 죽도록 힘을 줬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탈진할 것만 같았고 운동과 비교하자면 윗몸일으키기를 연속으로 백번을 한 뒤 뻗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틈틈이 요가나 필라테스를 해와서 그런지 속골반이 좋아서 초산 치고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다 눈앞의 고지를 확인하고도 눈보라 속에 파묻혀 두 눈이 스르르 감길 것 같은 무기력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간호사가 다급히 말했다 "이러면 아기 위험해요!" 그 소리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건 나의 의지가 아닌 초능력의 영역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죽을힘을 줬고 아기의 어깨가 45도로 스르르 회전하며 빠져나오는 걸 고스란히 느꼈다. 무더운 여름의 끝자락 오후 2:31, 드디어 로키가 태어났다. 내게 영원히 각인된 시간이다.
그렇게 로키는 응애응애 울며 내 품에 안겼는데 너무 신기하게도 내 품에 안기니 잠깐 울음을 멈추고 한쪽 눈을 살며시 떠서 나를 보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감격스러운 순간이 앞으로 내가 죽을 때까지 또 있을까? 아기의 손가락, 발가락 개수도 세어보고 머리부터 발 끝까지 직접 내 두 눈으로 보고 나니 드디어 안심이 되었다. "드디어 해냈다. 아무 탈 없이 건강한 아기가 태어났구나!" 하고 마침내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서로를 바라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내가 무섭도록 간과한 것이 있었다. 출산은 고작 육아의 첫 시작점 일 뿐이란 것이다.
출산을 하고, 조리원을 거쳐 아기와 집으로 왔고 산후 도우미 선생님이 출근하시면 난 좀 쉬기도 하고 신생아 육아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다. 임신기간 내내 그토록 상상만 했던 나의 아기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예뻤다. 하지만 수면부족에 시달리고 나만의 시간도 없다 보니 몸도 마음도 지쳐만 갔다. 임신 내내 먹고 토하고 반복하다 16kg가 쪘었는데 별 노력 없이도 그 살이 쭉쭉 다 빠졌다.
초보엄마의 암흑기였지만 꼬물대는 신생아에게 오히려 내가 재롱을 떨며 은연중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몇 년만 키우면 말귀도 다 알아듣고 나랑 대화도 할 테니 그때까지만 잘 버텨보자. " 하지만 누가 알았겠는가. 나의 아이는 어느새 6살이 되었고 아직도 말을 잘하지 못한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대학병원 검사 중 애착검사를 진행하면서 엄마의 기질에 대한 검사도 했더니 나는 상호작용이 되지 않으면 큰 스트레스를 받는 유형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아이에게서 느끼는 가장 큰 기쁨이 아이의 리액션이란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자폐 스펙트럼 아이들은 고기능이어도, 고지능이어도 사회적 상호작용에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다. 주양육자가 아이로부터 기대하는 반응을 얻어 내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고기능 자폐 스펙트럼: 지적 능력이나 언어 발달이 정상 범위에 가까운 자폐 스펙트럼 장애로서 사회적 상호작용과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지만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함
*고지능 자폐 스펙트럼: 지능이 높은 자폐 장애로 사회적 상호작용에 어려움이 있음
그 얘기를 듣고 참 많은 실마리가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내가 처음으로 아이를 키우며 미숙했고 산후우울증이 있었기에 울적할 때도 많았지만 아이와 재밌게 노는 게 너무 어려워서 힘들었던 그 이유를 말이다. 24시간 아이만 바라보고, 관찰하고, 맞춰주는 일도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가 커갈수록 큰 반응이 없는 아이와 노는 것이 제일 어려워지고 있었다.
아이가 15개월에서 18개월쯤엔 그래도 나름 황금기였는데 아이의 인지가 높아지고 잘 걷기도 하니 둘이 카페에 자리를 잡고 음료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쫓아다니며 제지하는 시간이 반이었지만) 놀이터에 가서 꽤 길게 놀기도 했다. 하지만 점차 20개월이 되어가자 아이의 관심사도, 반응도 좀 일반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우선 아이와 제일 많이 했던 일과 중 하나는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내려 가 입출차 하는 차들을 하염없이 지켜보는 일이었는데 그때는 이걸 스펙트럼 세계에서 제한적 관심사라고 칭하는지 몰랐다. 그리고 아이와 외출 시 아이는 내 손을 잡고 걷기보다는 관심이 가는 방향으로 휙 뛰어가버려 위험천만한 일들이 많았다. 주변에 하소연을 하면 그맘때 남자아이들은 다 그런 거라고 했지만 뭔가 찜찜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나와 상호작용이 안된다는 느낌이 커서 그랬던 것 같다.
*제한적 관심사: 특정 주제나 활동에 과도하게 집중하는 자폐 스펙트럼의 특징
*상호작용: 상호작용은 다른 사람과의 의사소통이나 관계 형성을 의미하여 자폐 스펙트럼 아동은 종종 상호작용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음
내가 제지를 가하면 나를 보며 비언어적으로라도 본인 의사표현을 하며 찡그리거나 자기 맘대로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느낌이 아니라 내 말이 전혀 들리지 않아 우리 사이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제일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단연코 신발 신기기였다. 이제는 로키가 많이 둔감화 되었지만 그때는 발바닥 감각이 너무 예민해서 작디작은 모래알 하나만 들어가도 신발을 벗어던지거나 새로운 신발은 다 거부하고는 해서 자포자기 한 심정으로 겨울에 차디 차게 언 눈 위를 맨발로 걷게 한 적도 있다. "것봐 차갑지? 엄마 말대로 춥지?" 한겨울에 양말조차 신지 않은 아이에게 내가 이렇게 쏘아 대듯 물어도 아이는 날 보지도 않은 채 맨발로 꽁꽁 언 눈을 피하려 내 신발 위로 올라서려 하기만 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커지는 와중에도 아이는 계속 자라 두 돌을 향해 갔고 그 무렵에는 내가 아이를 보며 갸우뚱하는 시간이 점점 더 늘어만 갔다. 그때는 몰랐다. 그게 발달장애 세계에서 말하는 아이의 퇴행이라는 것을.
*퇴행: 자폐 스펙트럼 퇴행은 아동이 정상적인 발달을 하다가 특정 시점에서 사회적, 언어적 기술 등이 갑자기 후퇴하는 현상을 말함
로키는 전자레인지를 "띠띠"라고 표현하며 치즈를 전자레인지에 넣어 녹이지 말라는 뜻으로 "띠띠 no!"라고 말하고는 했는데 (자연스럽게 이중언어로 양육을 하여 영어도 함께 썼다) 어느 날부터는 그런 표현을 아예 하지 않았다. 한 번도 신경 쓴 적이 없다가 불현듯 아이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러봤는데 뒤돌아 보기는커녕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전문용어로 호명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자세히 보니 아이는 눈 맞춤도 약했고 갑자기 신이 나 hyper 하다가 또 축 쳐지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각성조절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호명: 이름을 부를 때 반응하는 행동. 자폐 스펙트럼 아동은 이를 어려워할 수 있으며 이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어려움과 관련이 있을 수 있음
*hyper(하이퍼): 과도하게 활발하거나 흥분된 상태를 의미함
*각성 조절: 자폐 스펙트럼에서 각성 조절 문제는 자극에 과도하거나 둔감하게 반응하여 사회적 상호작용과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
아이는 약 16개월쯤 이미 한국어와 영어로 1부터 10까지 소리 내어 숫자도 세고 출근 한 아빠가 보고 싶냐고 물어보면 눈물이 그렁그렁 한 채로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었지만 점점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희노애락을 잘 표현했던 아이라 아빠가 퇴근을 하고 오면 와다다 뛰어가 반가워하고 퇴근이 늦으면 현관문 쪽을 기웃거리며 아빠를 기다리기도 했었는데 두 돌 즈음엔 짜증을 내거나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기만 했다. 또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그렇게 우리가 "다녀오셨어요" 나 "안녕하세요"를 가르치려 아이 앞에서 배꼽인사를 해대도 아이는 단 한 번도 우리를 따라 하지 않았다. 연지곤지, 잼잼, 짝짜꿍 등 옛날부터 어른들이 자연스럽게 육아에 녹여낸 상호작용과 모방이 전혀 되지 않고 있었다. "우리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구나. 뭔가 잘못 됐구나" 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로키산맥처럼 크고 멋진 사람이 되라고 지은 로키라는 태명이 이제는 고난이 많은, 험난한 이란 뜻을 가진 rocky라는 형용사가 된 것만 같았다. 아이와 그저 꽃길만 걷고 싶었는데 괜히 태명을 로키로 지어서 가시밭 길을 자청한 것 같았다. 좀 더 평범하게 "복덩이" 나 "튼튼이" 같은 태명을 지었으면 아무 탈이 없었을까? 흔히 가수는 노래 제목 따라간다고 노래가 슬프면 가수의 인생이 평탄치 않다는 얘기가 불현듯 떠오르며 가슴이 아팠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난임병원을 다니며 애써 아이를 가진 게 잘못일까? 다 내 욕심이었을까? 별의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그러다 검색창에 아이의 증상을 주르륵 쳐보니 이 모든 불안감은 딱 하나의 키워드로 함축이 되었다. 자폐 스펙트럼.
그때부터 계획 중독자인 나는 벙진 채로 그 어떤 계획도 세울 수 없었다.
궁금하다.
그때 신은 날 보며 또 웃었을까 아니면 그때만큼은 나와 함께 울었을까.
계획에 없던 울퉁불퉁하고 험난한 길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우리는 그저 로키의 손을 꼭 잡고 그 rocky road 위를 하염없이 걸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