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아이를 꾸미는 말 중 하나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이 즐겁고 습득력이 빠른 편인 나는 어원을 배우는 것도 꽤 재미있어한다. 하지만 자폐라는 단어는 속속들이 찾아보기도 전에 거부감부터 들었다. 어감 자체에서부터 느껴지지 않는가.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다는 그 부정적인 뉘앙스가.
*자폐(自閉):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자기 스스로를 닫다 는 뜻으로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어려움을 겪는 특성을 나타 냄
반면 영어로는 자폐 스펙트럼을 Autism Spectrum Disorder, 짧게 ASD라고 하는데 나는 이 용어가 더 마음에 든다. 영어로는 “He's on a spectrum" (그는 스펙트럼 선상에 있어)라고 비교적 가볍게 표현하기도 하는데 여기엔 신경다양성을 존중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 사람들의 뇌가 다르게 발달하고 기능한다는 것을 인정하며 자폐증, ADHD, 난독증 등 다양한 신경학적 특성을 자연스러운 차이로 보고 이를 존중하고 포용하는 개념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문화를 담는다. 그래서 나는 영어로 "Rocky is on a spectrum"이라고 얘기를 하는 것이 "우리 로키 자폐예요"라고 얘기하는 것보다 훨씬 나의 가치관과 문화에 맞아떨어져 마음이 편하다. 그렇게 하면 우리 아이의 상태를 좀 더 정확히 표현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자폐라는 말이 우리 아이를 설명할 수 있을까? 로키는 분명히 자신만의 세계가 있다. 사회성이 높은 편도 아니고 또래보다 상호작용의 질도 낮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을 하기가 참 조심스럽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 우리 모두 어느 정도 다 자폐 스펙트럼의 선상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에 어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어떤 사람들은 어폐가 있다며 이런 말 때문에 고달픈 상황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전형적인 자폐인의 모습이 아니면 많이들 "나도 좀 그런데? 네 아이 자폐 아니야"라고 말한다고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자폐의 전형적인 모습과 다르면 쉽게 반박하고 멋대로 판단해 버린다.
나는 양쪽 의견을 모두 이해한다. 내가 독특한 면이 있다고 해도 이건 스펙트럼을 얘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남이 보기엔 어불성설 일수 있고 반대로 내가 내 자신을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내 자신 안에 갇혀 있다는 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런 혼란을 가중시키는 자폐 스펙트럼이라는 용어보다는 neurodivergent (신경다양인) 이란 표현 더 적절하다고 생각하는데 한국에서는 아직 이 용어가 북미에서 만큼 통용되지 않는 것 같다.
신경다양성이라는 용어는 북미와 일부 서구 국가들에서는 점점 더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많이 생소하다. 나 역시 아이의 발달지연을 몰랐을 때에는 이 용어를 듣도보도 못했으니 말이다. 신경다양성이란 개인의 신경학적 차이를 존중하고, 자폐증, ADHD, 학습장애 등 다양한 발달 차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개념인데 한국에서 이 개념이 제대로 알려지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아직 더디지만 점차 한국사회가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기에 긍정적인 변화를 예상해 본다. 예를 들어 10년 전만 해도 우울증이나 공황장애에 대한 인식은 지금에 비해 부족했지만 현재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커졌고 그만큼 우리의 대화의 폭도 넓어졌으니 말이다. 따라서 신경다양성도 점차 사회적 인식이 확장되면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꼭 그랬으면 좋겠다. 다양한 발달의 특성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문화가 점점 더 확산되면 그에 따른 교육, 정책, 미디어의 역할도 커지기 마련일 테니까. 다름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개념이 널리 퍼지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본다.
이제 다시, 현재 나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나는 우리 아이의 자폐 스펙트럼을 지금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고찰을 하면 할수록 나도 신랑도 참 독특한 사람들이라 우리도 신경정형인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코리안 캐네디언이라는 아직까지도 국내에서는 흔치 않은 자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동서양의 자폐에 대한 인식이 내 안에 여러 가지로 섞여 나만의 시각으로 자폐 스펙트럼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신경정형인(Neurotypical): 신경다양성이 없는, 즉 사회적으로 평균으로 여겨지는 신경 발달을 가진 사람을 칭함
*코리안 캐네디언 (Korean Canadian): 한국의 뿌리를 가지고 캐나다에서 생활하며 두 문화의 영향을 동시에 받는 한국계 캐나다인을 의미함
흔히들 자폐라는 단어가 일본의 잔재인 줄 알지만 사실 자폐는 그리스어 autos(자기)와 pathos(고통)에서 유래한 단어로, 자기 자신에게 고통을 겪는 이라는 뜻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럼 우리 아이는 정말 이 어원처럼 고통 속에 있을까? 그렇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아이의 20개월쯤 시작된 퇴행으로 인해 나도, 아이도 점점 생기를 잃어 갔고 아이의 상태는 두 돌이 지난 25개월쯤 곤두박질을 쳤다. 아이와 눈을 맞추려 하면 할수록 아이는 내 눈을 피했고, 알 수 없는 말이나 똑같은 영어 문장을 반복해서 말하며 혼자 웃고, 두리번거리고, 하염없이 걷거나 우리 집 거실을 뱅글뱅글 돌기도 했다.
"A... big... CAR!"
"Car"이란 단어를 특히나 크게 말하며 25개월에서 26개월쯤 로키가 하고 또 했던 말이다.
드디어 말이 트인 건가? 하고 기대하던 것도 잠시. 대학병원의 소아정신과 의사는 이렇게 문장을 통으로 외워 반복하는 것이 자폐 스펙트럼의 특징 그 자체라고 했다. 하지만 그 당시 로키가 즐겨 보던 페파 피그 (Peppa Pig)에서도, 우리의 일상에서도 정확하게 저 문장을 말한 경우는 없었기에 말을 못 하는 아이가 대체 어떻게 저런 문장을 조합해서 말했던 건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Peppa Pig: 장난기 많은 돼지 페파와 그녀의 가족, 친구들이 일상에서 겪는 모험을 그린 영국의 인기 어린이 만화
이러한 아이의 독특한 모습을 알게 된 후 시작한 조기개입 덕인지 로키는 그동안 많은 진전을 보였다. 그래서 6살이 된 지금, 아직도 대부분 한 음절로만 표현하는 걸 빼고는 꽤나 정상 발달아 처럼 보일 때도 있다. 참 정상이란 게 뭐길래 난 아직도 로키가 정발아 같단 얘기를 들으면 묘하게 기분이 좋아지는 걸까.
*조기개입: 발달지연 조기개입은 아동의 발달 지연을 최소화하고 정상적인 발달을 촉진하기 위해 초기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맞춤형 교육과 치료
사람들을 긴가민가 하게 하는 로키의 상태는 결국 현재 통용되는 말 그대로 스펙트럼의 영역이기 때문에 무 자르듯 모든 걸 명확히 알 수가 없다. MRI를 찍어 눈으로 사진을 볼 수도 없고 피검사를 해서 완전한 수치를 알 수도 없다. 물론 CARS나 ADOS 같은 자폐 검사가 있긴 하지만 모르는 선생님과 낯선 공간에서 보낸 시간 동안 받은 점수를 가지고 아이의 전부를 파악할 수도 없거니와 아이의 예후는 더더욱 세세하게 알 수가 없다.
*CARS( Childhood Autism Rating Scale): 자폐 스펙트럼 장애의 진단을 위한 평가 도구. 이 검사는 아동의 행동과 특성을 기준으로 아동의 사회적 상호작용, 의사소통, 행동패턴 등을 평가하여 자폐 스펙트럼 장애의 여부를 판단하는 데 도움을 줌
*ADOS (Autism Diagnostic Observation Schedule):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진단하기 위해 아동의 사회적 상호작용, 의사소통 능력, 놀이 및 행동을 평가하는 표준화된 검사
이미 내 지난 글을 접한 분들은 이쯤 되면 아시겠지만 나는 계획하고 예측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다. 불안도가 높아서인지 그래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리 쭉 짜인 커리큘럼을 따라 살던 학생으로서의 날들이 안정감을 느끼기 최적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자폐 스펙트럼 아동의 엄마로서 이런 성격은 참 상극이라고 볼 수 있겠다. 대부분의 육아가 그렇겠지만 우리 아이는 그 어떤 것도 명확히 파악되지도 예측되지도 않는다. 이제는 예전에 비해 많이 유연해진 사고로 어느 정도 받아들인 이 숙명이 자스맘 초보 시절엔 너무나도 큰 스트레스였다.
*자스맘: 자폐 스펙트럼(ASD) mom의 줄임말로, ASD를 가진 자녀를 둔 어머니를 지칭하는 용어
그리고 예전의 나는 멋쟁이 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꾸미고 다니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아이의 진단 이후로는 그 흔한 선크림 하나 안 바른 맨얼굴에 칙칙한 옷만 입고 다녔다. 아니, 며칠 내내 똑같은 옷을 입기도 하고 아침, 저녁으로 씻어대서 피부가 건조하기까지 하던 내가 5일 동안이나 씻지 않은 적도 있다. 나도 모르게 나는 꾸밀 자격도 편히 씻을 자격도 없다고 여기며 나를 자학했던 것 같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우울증이 심하면 단순히 씻거나 아침에 일어나는 일과가 어렵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이 대뜸 물었다, 요새 왜 이렇게 하고 다니냐고. 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순간 난 얼어붙었다. 그녀는 그저 가벼운 호기심에 물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초췌해진 나를 애잔하게 생각해서 꺼낸 말일수도 있지만 나의 진짜 속마음은 상상도 못 했을 것 같다.
"장례식에 검은 옷 입고 가잖아요."
이 말이 목구멍에 걸려 차마 나오지 않았다. 그냥 요새 아이 신경 쓰느냐 정신이 없어서 그렇다고, 이제 좀 꾸미고 다녀야겠다고 말하며 나의 시린 마음을 꼭꼭 숨겼다. 그렇다, 나는 아이의 진단 이후로 나도 아이의 삶도 죽음을 맞이했다고 느끼며 마치 애도기간을 갖는 것처럼 짙은 옷을 입고 그림자 진 얼굴을 한채 살고 있었던 거다.
저때의 내가 딱 한국 엄마로서 아이의 자폐를 받아들이며 탈이 났던 때인 것 같다. 많은 발전이 있었음에도 아직까지 한국에 널리 깔린 장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소아정신과 에서의 차디찬 반응도 나는 이렇게 우울하게 살아야 마땅하다고 하는 것 같았다.
"장애아의 엄마로 나는 평생 불행하겠지."
"우리는 평생 소외 되겠지."
나를 갉아먹는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 잡혀 약 2년 정도는 이렇게 눈 뜬 송장처럼 지냈던 것 같다. 매일 평점심을 찾으려 발악했지만 웃어도 웃는 게 아니었고 아무리 맛있는 걸 먹어도 맛이 느껴지지 않았고 세상은 모든 빛을 잃은 것처럼 흑백으로만 보였다.
나중에 더 길게 다룰 내용이지만 그러던 와중에 우리 세 식구는 나의 친정이 있는 캐나다로 한 달 정도를 떠났고 거기에서 만난 캐네디언 선생님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수업을 통해 나는 비로소 다시 눈을 뜬것 같다. 마치 익사하기 일보직전인 사람이 겨우겨우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숨을 헐떡이는 것처럼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겨우 숨통을 튼 것만 같았다.
그때 만났던 선생님을 K라고 부르겠다.
캐나다에 온 김에 현지 수업과 ASD에 관한 인식이 궁금해진 나는 온라인으로 여러 선생님을 찾아보고 K 선생님의 이력이 맘에 들어 예약을 한 뒤 수업을 받으러 갔다. 보통 데스크에 한 명이 근무하는 형태로 체계화되어 있고 엄마들이 조용히 앉아 기다릴 수 있게 여러 소파가 있는 한국 센터와는 다르게 협소했지만 밝은 공간이었다.
한눈에 베테랑의 면모가 돋보이는 훤칠하고 인자한 선생님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아이에 대해 소개를 하며 "우리 아이가 아직 어려서 확실치는 않지만 자스 일수도 있는데..."라고 말을 꺼내자마자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Oh he's autistic for sure!" (쟤는 자폐아이고 말고!)
*자스: 자폐 스펙트럼의 줄임말
왜 이렇게 해맑게 저 얘기를 하는 거지?
그리고 만난 지 5분 만에 판단하는 건 한국만 그런 줄 알았는데 여기도 이러기냐?
예상치 못한 초면인 선생님의 말에 짜증이 나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하고 뭐라고 반문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턱 막혔다. 선생님은 나의 당황스러움을 알아챘는지 본인이 전문의는 아니지만 지난 20년간의 산경험을 통해 꽤나 확신한다며 말을 이어갔다. “And he's a smart boy. Look at him. You have nothing to worry about!" (그리고 쟨 똑똑한 녀석이야. 쟤 좀 봐봐. 엄마 걱정 할 거 하나도 없어!) 새로운 선생님과 인사를 나누든 말든 장난감을 발견하자마자 돌진해 놀고 있는 로키를 보며 선생님이 말했다.
그의 말에 난 마치 몽롱한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 들었다. 선생님은 로키가 자폐를 가지고 있다고 얘기하며 분명히 웃고 있었다. 입만 웃는 것이 아닌 그의 푸른 눈이 반짝이며 정말로 미소 짓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절대로 찾아볼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래 자폐 스펙트럼 맞아. 그게 왜? “라고 얘기하는듯한 이 자연스럽고 당당한 에디튜드가 내게는 왜 없었던 걸까? 남들이 우리 아이를 자스로 보든 말든 우리 애가 특이하든 말든 로키는 로키일 뿐인데.
*에디튜드(attitude): 사람의 태도나 성향을 뜻하는 단어
이제까지 나는 제 아무리 아닌 척을 해봐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 아이가 자스인지 아닌지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끊임없이 저울질해 왔던 것이다.
사실 나를 일깨우친 K 선생님의 모습에서 우리 신랑이 줄곳 취하던 스탠스가 보였다. 난 항상 로키를 보며 대체 얜 정확히 어떤 상태일까 궁금해하고, 헷갈리고, 답답해하며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탈 때도 늘 신랑은 한결같은 입장이었다. 로키는 스펙트럼의 선상에 있는 것 같지만 아무 상관이 없다고, 아이는 분명히 잘 성장할 거고 우리만 잘하면 된다고.
*스탠스 (stance): 특정 문제나 상황에 대해 갖는 태도나 입장을 의미함
쳇 남편 말이 다 맞았던 건가?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길 때쯤 K 선생님이 몸을 낮추며 능숙하게 로키에게 다가갔다. 그는 천천히 로키를 관찰해 나가며 금세 가까워지더니 한 시간 수업 내내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내게 통역을 부탁했지만 곧 아이와 충분히 잘 통한다면서 내게 조금 떨어져서 수업을 지켜봐 줄 것을 정중히 부탁했다. 또한 보조 선생님이 계신 것도 인상적이었고 그분도 참 좋으셨는데 계속해서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고 K 선생님과 함께 아이의 흥미를 따라가 주셨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다양성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국 내 로키가 쭉 성장하는 건 건 무리라는 판단을 했기에 언젠가는 캐나다로 돌아가려 생각해 왔다. 그래서 이참에 K 선생님께 캐나다 학교에 대해 물어보고 비슷한 친구들의 이중언어 사례도 물어보며 당시 5살이었지만 모국어인 한국어도 트이지 않은 로키가 캐나다에서 영어를 잘 배울 수 있을지,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잘 살 수 있을지 궁금해했다.
K 선생님은 특유의 온화한 얼굴로 로키와 비슷한 친구들 중 모국어를 잘하는 친구도 있고 이중언어를 구사하는 친구도 있으며 아직 성인이 돼 가지만 non-verbal이라서 AAC 디바이스로 소통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캐나다의 공립학교는 기본적으로 통합교육 시스템이기 때문에 다들 일반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non-verbal: 무발화라는 말로 소리를 내어 언어표현을 하지 않고, 몸짓, 표정, 패드 등을 이용해 다른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함
*AAC( Augmentative and Alternative Communication): 의사소통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텍스트나 그림을 사용해 의사를 전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디바이스 (예: 스마트 패드, 타이핑 보드 등).
긍정적인 얘기를 들으면서도 초조해하는 우리의 마음이 느껴진 건지 그는 조금은 의아한 표정으로 로키는 언제든 캐나다에 와서 생활해도 된다고 안심 하라며 말했다, "He's gonna be fine" (얜 문제없을 거야). 그러더니 우리도 로키도 참 좋아 보인다면서 앞으로도 잘할 거라고 격려해 주었고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을 달라며 웃었다.
이런 얘기를 하며 웃는 것이 처음인 나는 어색한 미소로 화답을 하느냐 안면근육이 떨려왔다. 그렇게 애써 웃으며 여태까지 내가 무의식적으로 얼마나 우리 아이의 정체성을 자폐 그 자체라고 규정 지은채 살았던 건지를 몸소 느꼈다. 우리 아이가 가지고 있는 특징 중 하나를 가지고 그게 마치 아이 그 자체인 것 마냥 대하고 또 그 고정관념을 입 밖으로 내뱉었던 한국에서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반대로 로키가 정발아로 보일 때면 내심 기뻤던 이유 또한 "정상적"인 것을 아이의 정체성으로 연결시켜 버렸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캐나다에서는 영어로 아이를 어떻게 표현하는지 곰곰이 떠올리게 되었다.
아이가 감기에 걸리면 "He has a cold"라고 얘기하지 "그는 감기예요"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아이에게 당뇨가 있으면 "He has diabetes"라고 얘기하지 "그는 당뇨예요"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이에게 자폐 스펙트럼이 있으면 "우리 애 자폐예요"가 아닌 "My child has autism"이라고 얘기한다. 아이에게 자폐가 있다는 것이지 아이가 자폐 그 자체가 아니란 것이다. K 선생님처럼 "He is autistic"이라고 "그는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이야"라고 형용사로서 표현할 수도 있다. 마치 "He is tall" 그러니까 "그는 키가 커"라고 그저 한 사람이 가진 특징 중 하나를 묘사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언어적 차이에 몰두된 채 건물 밖으로 걸어 나오니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캐나다의 짓궂은 날씨와는 상반 되게 나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아이의 자폐 진단 후 엄마들이 제일 힘들어한다는 첫 2년이란 시간의 끝에 다다라서인지 아니면 K 선생님의 따뜻한 말 한마디 한마디와 아이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그 태도가 내 마음을 변화시킨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이 세상의 색이 다시 조금씩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고개를 드니 벚꽃나무에 연분홍빛 봉오리가 오밀조밀 돋아 있었다. 어느새 다시 봄이 찾아왔다.
그렇게 K 선생님을 접하고 한국에 돌아온 나는 서서히 큰 꿈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과거의 나처럼 주저앉아 울고 있는 엄마 아빠를 도와주고 싶다는 꿈 말이다.
아이의 발달에 이상이 생겼다는 걸 알고 난 뒤 어쩌면 부모로서 거쳐야만 하는 눈물 섞인 통과의례 같은 고통의 시간을 함께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당신이 속한 세계의 모든 색이 다 바래져 가겠지만 꼭 다시 새빨간 장미를 볼 수 있을 거라고, 가을이 수놓는 오색빛깔 단풍의 향현이 눈에 들어오는 날이 꼭 올 거라고 얘기해주고 싶은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계속해서 나의 아이가 흑인지 백인지 고민하게 되겠지만 그 어떤 진단도 아이의 정체성이 또 나의 정체성이 될 수 없다는 말을 과거의 내가 들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이가 받은 진단이 맞던 틀리던 양육자로서 느끼는 죄책감과 무력함을 이겨내는 큰 원동력이 되었을 텐데 말이다.
사실 나는 K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도 불안해하는 코리안 맘의 자아를 가진채, 또 획일화된 모습을 바라는 나의 한국인 페르소나를 통해 자폐를 대하다 지칠 때면 영어로 된 자폐 콘텐츠나 원서를 보기도 했었는데 그런 순간에나마 조금은 트인 시야로 아이를 바라볼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보통의 한국 엄마는 언어와 문화의 장벽으로 인해 이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페르소나(Persona): 사회적 상황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특정한 성격이나 역할을 의미함
나의 깨달음이 모두에게 정답은 아닐 테지만 그 어떤 길잡이도 없이 망망대해를 향해하는 것 같은 부모가 있다면 나 같은 사람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아이의 다름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삶을 대하는 태도와 사랑이 있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독특한 아이를 양육 중에 있고 이중언어를 구사하는 코리안 캐네디언 엄마인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나는 한국어를 할 때의 나와 영어를 할 때의 나를 비교해 봤다. 한국어를 할 때에는 좀 더 보수적이고 표정이 많지 않으며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유교사상에 따른 예의범절을 지키려 노력한다. 그리도 누가 봐도 엄마인 티가 많이 나는 것 같다. 반면에 영어를 할 때의 나는 여전히 내성적이지만 좀 더 편하게 수다를 떨기도 하고 표정은 매우 풍부하며 사고가 훨씬 더 유연해지고 나의 주장을 비교적 자유롭게 펼친다. 이렇게 다른 페르소나가 그나마 내 안에 있었기에 로키의 한계를 정해두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내 안의 코리안 맘이 주눅이 들고 초라해질 때면 캐네디언 맘이 불쑥 나타나 "그게 뭐 어때?" 하며 어깨를 으쓱거리면 좀 살만 해졌다. 또 반대로 캐네디언 맘이 "왜 아이를 있는 그대로 못 받아들여? 수업이고 뭐고 그냥 편하게 살아"라고 얘기할 때면 코리안 맘이 주먹을 불끈 쥐고 "지금 할 수 있는 거 다 안 하면 나중에 후회해! 할 건 해야지!" 하며 채찍질했다.
나는 한국 자스의 세계에 이런 다양한 페르소나가 좀 필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인만 겪고 있는 일이 아닌데 왜 이렇게 우리끼리만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 같은지. 아이의 발달지연을 받아 드리거나 진단명을 오픈하는 것이 이렇게 두려운 일이어야만 할까.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시기가 다가오는 것이 이렇게 초조한 일이 되어야만 할까. 우리가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여러 생각을 접한다면 우리도 아이들도 좀 더 행복 해지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단 한 명에게라도 닿기 위해 이렇게 나의 아픔과 깨달음을 적나라하게 담은 글을 쓰기 시작했고 자폐 스펙트럼을 주제로 한 부모 대상의 온라인 영어강의를 시작하였으며 신경다양성에 대해 더 공부를 하여 언젠가는 강연을 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당신은 꿈은 무엇일까. 과거의 나처럼 꿈은 둘째치고 죽고만 싶을 수도 있다.
그 캄캄한 터널을 빠져나오는 것은 한 마리의 새가 스스로 알을 깨고 부화하듯 오롯이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곳을 빠져나온 뒤 함께 희로애락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전 세계에 퍼져 있고 나도 그중에 하나이다.
"그래 우리 애 자폐 맞아. 그게 왜?"라고 하루아침에 내뱉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속으로 한번 생각만 이라도 해보는 게 어떨까. 우리 아이가 자폐인 것이 아니라 우리 아이는 자폐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뿐이라고. 당신의 생각과 언어가 아이의 정체성을 제한할 수도 확장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자스맘 초보시절에 꿈도 못 꾸던 일이지만 당신은 조금 더 빨리 당신의 틀을 깨고 다양한 모습의 아이들이 뛰어노는 신경다양성의 세계를 알게 되면 좋겠다. 돌이켜보니 아이의 진단 이후 이 세상이 한순간에 흑백이 되어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흑백의 색안경을 골라 썼던 것 같기 때문이다.
당신은 정발아 대 자폐아라는 딱 두 가지로 나뉜 세상에서 나보다는 일찍 벗어나 다채로운 신경다양성의 색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두 갈래의 길이 아닌 각자 고유의 빛을 지닌 스펙트럼이라는 무한대의 인생을 걸어 나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니 제발 당신의 아이를 그 어떤 형용사 안에도 가두지 않기를 바라본다. 아이의 진단명이 절대로 아이의 정체성이 아니란 것을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아이의 진단 이후 망망대해를 헤매다 내가 깨달은 것은 로키의 자폐 스펙트럼이란 무서운 장애도 아니고 아이의 정체성도 아닌 그저 아이를 꾸미는 형용사 중 하나일 뿐이란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