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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댁이 둘인 며느리

로키의 할아버지 이야기

by 청크리 Mar 14. 2025

나는 두 개의 시댁이 있는 며느리다.

신랑이 이혼가정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아버님 쪽의 새로운 가정이 하나, 어머님 쪽 새로운 가정이 하나씩 따로 있다.


10년 전 이른 나이에 결혼할 때 너도나도 축하해 주던 친구들도 이 얘기를 들으면 흠칫 놀라고는 했다. 내게 대놓고 얘기는 못했지만 "시자가 싫어서 시금치도 안 먹는다던데 그 시댁이 둘이나 된다고?" 하는 반응이었던 것 같다. 지금보다 한국의 정서에 대해 무지했던 때라 이런 형태의 가족이 좀 드문가 보다 하고 말았는데 지금의 내게 누군가 곧 시댁이 둘이 될 거라고 하면 나 같아도 두 눈이 똥그래질 것 같다.


하지만 과거의 나는 그 어떤 편견도 없었고 오히려 이혼가정 속의 아픔이 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신랑이 바르게 잘 자라 준 것이 또 그렇게 양육을 해주신 시부모님이 참 멋지고 감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좁고 깊은 관계를 선호하는 내향적인 내게 새로운 가족이 될 시댁이 둘이나 된다는 건 큰 부담감으로 다가올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콩깍지란 게 뭔지 그때는 이 사람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 내 성향이고 뭐고 따지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결론적으로 어린 나이에 멋모르고 한 결혼을 후회한다거나 그때의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나는 참으로 용감하긴 했다.


인생은 실전이라 했던가. 별생각 없던 코리안 캐네디언 새댁에게 매년 찾아오는 명절은 스트레스와 혼란 그 자체였다. 종갓집 며느리처럼 제사를 지내야 한다던지 시댁 어른들 밥상을 차려 드려야 한다는 종류의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스트레스는 캐나다에서 자라면서도 한국 미디어에서 자주 봐온 익숙한 모습이었기에 이해는 되지 않더라도 예측은 됐을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게 시댁이 둘이라 함은 이렇다 할 전통이나 공식의 부재 속에서 모두를 만족시키는 지혜를 발휘하는 곡예를 해야 한단 뜻이었다. 그 누구도 내게 그렇게 하라고 대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난 만인의 며느리였기에 지켜보는 눈이 많았고 나 나름대로의 무거운 책임감에 시달렸다.


우리 신랑은 차남이지만 일가친척 중에 우리가 제일 먼저 결혼을 했고 양쪽 시댁 내 기혼이 된 자식에 관한 그 어떤 전례도 없었다. 그래서 대소사를 챙길 일이 있거나 명절이 되면 정해진 것 하나 없이 그저 흘러가는 대로 따라 움직여야만 했다. 매해 명절마다 난 어디로 가서 누구를 만나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고 양쪽으로 이어진 시댁 식구가 많다 보니 내가 마음을 써야 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렇다고 복잡한 상황을 뒤로한 채 연휴 핑계로 훌쩍 여행을 떠나버리기엔 우리의 결정을 고할 대상도 허락 아닌 허락을 받을 사람도 너무 많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심지어 딱 하나로 정해진 시댁이나 기준이 없으니 너도나도 내 시어머니 역할을 자처했는데 정신없는 그 와중에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오리지널 시어머니와 잘 맞는 편이었단 것이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어린 새댁으로서 여러 우여곡절과 해프닝을 겪으며 나는 애증의 마음으로 어머님께 꽤나 의지를 하며 지내온 것 같다.


강산이 변한 그 세월 동안 참 별에 별 일이 많았는데 그걸 다 얘기하자면 밤을 새울 것 같고 오늘 할 얘기는 사실 따로 있다. 바로 현재 우리 시어머니의 남편 되시는 신랑의 새아버지 이야기다. 앞으로 H 시아버지라고 칭하겠다.


결혼식을 올리기 전 고급 중식당에서 H 시아버지를 처음 뵀던 날이 생생히 기억이 난다. 키는 작으셨지만 다부진 체격의 소유자로 눈빛이 날카로우셨고 중저음의 목소리가 참 멋있으셨다. 일평생 워라밸 따위 없이 그저 일에 올인하고 자수성가하신 분이라서 그런지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강인함이 느껴졌다.

*워라밸: Work-Life Balance의 줄임말로 일과 삶의 균형을 의미하며 업무와 개인 생활 간의 적절한 조화를 추구하는 개념


나는 가부장적인 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남자 어른을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는데 강인해 보이시는 분은 특히나 더 어렵게 느껴졌다. 그래서 오랜 시간에 걸쳐 H 시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하고 여행을 다녔음에도 내겐 한결같이 어려운 분으로 남아있었다. 게다가 우리 신랑이 성인이 되고 나서야 새 가정을 꾸리셨기에 신랑과 한 지붕 아래 살아본 친밀감도 없어서 나뿐만 아니라 신랑 역시 깍듯이 대하는 분이었다. 그렇게 어색함을 느끼며 쭈뼛거리는 우리임에도 뵐 때마다 맛있는 걸 사주시고 인생에 대한 조언도 아낌없이 해주시고는 했다. 이 세상에는 여러 형태의 가족이 존재하지만 여전히 한국에서는 피가 물보다 진하다고 하는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고, 함께 식구로 살아 본 적도 없는 우리 부부에게 애정을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만약 내가 그 입장이었다면 어색한 젊은이들에게 선뜻 마음을 내줄 자신이 없어서 더더욱 감사했던 것 같다.


H 시아버지는 평생을 새벽같이 기상하시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출근을 하시며 칼같이 루틴을 지키며 사셨다. 매일 운동을 하시고 하루 세끼 건강식을 드셨는데 그렇게 여러모로 자기 관리가 철저하셔서 그런지 늘 가깝고도 먼 강인한 분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늠름하시던 분이 지금은 삶의 마지막 장에 서계신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좀처럼 낫지 않는 기침에 평소에 그리 멀리 하시던 병원에 가셨던 게 불과 작년 가을쯤이었다. 안타깝게도 엑스레이를 찍은 그날 바로 폐암 4기 판정을 받으셨다. 젊은 우리보다 힘들이지 않고 산을 오르시고 황톳길 맨발 걷기를 즐겨하시던 분이 병상에 계신 모습을 떠올리니 지금도 마음이 저릿저릿 아프다. 암을 너무 늦게 발견한 탓에 사실상 손쓸 수 있는 것이 없었지만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대학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당신의 상태를 알고는 계셨지만 누구나 그렇듯 갑작스러운 삶과의 이별을 쉽게 받아들이진 못하시고 계셨다. 100세 시대에 걸맞게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며 사셨으니 이렇게 갑작스레 떠난다는 것이 나 같아도 믿기지 않을 것 같다.


처음으로 입원실의 문을 열고 병상에 누워 계신 모습을 본 날 나의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하지만 내가 눈물을 보이면 행여나 더 불안하고 두려워지실까 봐 눈도 잘 마주치지 못한 채 로키의 손을 잡고 애써 눈물을 꾹 참았다. 평소에는 늘 우렁찬 목소리로 로키를 맞아주셨었는데 시어머니의 부축을 받아 겨우 몸을 일으켜 앉으시는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아픈 기색이 역력하신 채로 로키를 바라보시는 모습이 낯설고 무서운지 로키는 내게 계속 매달리며 안아달라고 했다. 내 품에 안긴 채 자기를 지긋이 바라보시는 할아버지를 힐끗힐끗 보다가 품에 더 파고들기를 반복했다. 말로 다 표현을 못하는 아이임에도 할아버지가 왜 저렇게 아파 보이는 건지, 왜 아이의 마음도 덩달아 아파오는 건지 혼란스럽다고 하는 것만 같았다.


사실상 멀다면 먼 피를 나누지 않은 사이임에도 이렇게 우리 모두의 마음이 아픈 이유는 3년 전 로키의 자폐 스펙트럼 진단 이후  H 시아버지와 진정으로 가족이 되었기 때문이다. 로키의 발달지연이 아니었다면 한집에 살 일도,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눌 일도, 또 함께 웃고 울 일도 없었을 텐데 뒤돌아보니 이 모든 게 하늘의 뜻이었던 걸까.


2022년 아이의 첫 진단 이후 지방에 살던 우리는 시댁에서 살다시피 하는 생활을 시작하였다. 진단의 충격으로 나는 심한 우울증에 걸려 일상이 버거웠고 밤늦게나 퇴근을 하는 신랑을 포함 한 주변 모두가 걱정이 많았다. 외국에 계신 친정 부모님께 도움을 바라지도 않았지만 당장 내게 달려오실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에 기댈 곳 없이 아이와 고군분투해야 하는 내 모습이 모두에게 위태로워 보였던 것 같다. 나 역시도 밝은 모습으로 아이와 일상을 유지하며 센터를 잘 다닐 자신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게다가 그 당시 우리는 소아정신과 의사의 말대로 aba 수업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믿고 있었는데 집 근처에서는 마음에 드는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유로 일주일의 대부분을 서울 근교에 있는 시댁에 머물며 강남에 위치 한 센터를 다녔다. 그 외의 시간은 다시 지방에 있는 우리 집으로 내려가 지냈고 아이를 약 3-4일 정도 집 근처 어린이집 오전시간에만 짧게 보냈다. 그 뒤엔 또 시댁으로 올라가서 서울의 센터를 오가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주말을 함께 보내는 이런 생활을 약 2년 정도 지속했다. 신랑은 퇴근이 너무 늦으면 시댁에 오지 못할 때도 있었고 낮에는 일을 하느냐 바빴기에 시어머니가 장롱면허인 나를 대신해 운전대를 잡아주셨다. 그 덕분에 아이와 편하게 센터를 다녔고 어머님과 추억도 참 많이 쌓았다. 게다가 그때 열심히 병행하던 로키의 CFGF 식단을 위해 요리연구도 하시고 밥도 차려주시며 정말 물심양면 애써주셨다.

*CFGF(Casein-Free, Gluten-Free): 이 식단은 카제인과 글루텐을 제한하여 자폐 스펙트럼 아동의 소화 건강, 식이 알레르기 개선을 목표로 함


H 시아버지는 자녀가 있으셨지만 젊은 시절 일에 매진하셨던 탓에 자식들의 성장과정을 제대로 본 적이 없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느린 로키지만 시간이 흐르며 성장하는 모습에 늘 진심으로 감탄을 하셨다. 매주 아이의 힘이 얼마나 더 세졌는지, 얼마나 키가 컸는지, 어떤 음식을 잘 먹는지, 우리와 어떻게 노는지를 관찰하시며 경이로워하셨다.


로키가 지금은 사람을 참 좋아하고 새로운 사람을 봐도 경계가 덜 하지만 그때만 해도 불안도가 훨씬 높았던 때라 소스라치며 H 시아버지를 밀칠 때가 많았다. 말도 잘 못하는 아이가 "가! 가!" 하며 손으로 발로 밀고 차기도 했고 할아버지가 드시던걸 무작정 뺏기도 해서 엄마인 난 제지를 하면서도 가시방석일 따름이었다. 꽤나 불쾌하실 수 있는 상황에서도 허허 웃으시며 그 모든 걸 재밌어하시고 기특해하셨는데 그게 너무나도 감사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고단한 하루가 저물어 가는 밤이 되어 H 시아버지가 침대에 누워 쉬시고 계실 때면 내가 말릴 새도 없이 아이가 벌컥 안방 문을 열고 침대 위로 올라가 방방 뛰기도 했다. 깜빡 잠이 드시려던 참이셨던 것 같은데도 할아버지 보러 왔냐며 환히 반기셨다. 나는 말 그대로 동공지진이 된 상태로 아이를 말려댔지만 실컷 뛰게 두라며 에너지 넘치는 게 좋다고 하셨다. 또 한 번은 퇴근 후 샤워를 하고 계시는데 로키가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려 나는 따라 들어가지도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나오라고 사정사정을 한 적도 있다. 이런 일들이 당황스럽거나 귀찮으실 만도 한데 H 시아버지는 천방지축 로키의 모든 걸 사랑스러워해 주셨다. 내가 H 시아버지의 입장이었다면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결코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로키는 이렇게 할아버지께 막무가내로 다가갈 때가 있는 반면 평균적으로는 싫은 내색을 하는데도 계속해서 다가오는 할아버지를 귀찮아했다. 그래서 인상을 쓰고 짜증을 내며 "바이!"라고 말하고 거부했지만 그 모습마저 늘 예뻐해 주셨다. 로키를 보면 늘 안아주시고 뽀뽀해 주시며 아낌없이 애정표현을 해주셨다.


하지만 아이와 가까워지고 싶어도 함께 노는 법을 잘 모르셔서 로키가 혹 할만한 과자나 아이스크림으로 환심을 사시고는 했다. 아니나 다를까 로키는 원하는 걸 얻고 나면 다시 “바이"라고 말하며 세차게 손을 흔들고 할아버지를 밀쳐내기 바빴다. 그래서 아이로부터 제일 많이 듣던 말이 "바이" 인데도 불구하고 로키가 우리 집으로 내려가고 나면 집안이 휑하다며 이놈이 뛰어다니고 소리를 지르고 해야 집 같다고 하셨다.


여름이 되면 난 아이에게 늘 흰색 런닝을 입히는데 그 모습을 보실 때마다 전형적인 한국 아저씨 같다며 껄껄 웃으셨던 것도 생각이 난다. 또 어느 날은 우리가 육아하는 것을 이렇게 가까이서 지켜보니 아이 키우는 일이 왜 고된 건지 이제야 아시겠다며 우리 부부를 존경한다고 까지 해주셨다. 발달지연 아이의 엄마로서 죄책감에 허덕이던 와중에 그런 말을 들으니 눈물이 핑 돌았다.


H 시아버지는 생일이나 기념일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무뚝뚝한 옛날분이셨음에도 로키 생일에는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장어집에 가서 밥도 사주시고 함께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시며 케이크의 초도 부셨다. 그리고 우리 부부와 시어머니가 로키가 한 음절로만 말을 하는 것에 스트레스 받아하거나 초조해할 때면 "그게 어디야“ 라고 하시며 유쾌하고 통찰력 있는 말을 해주시곤 했다.


물질적인 지원은 물론이고 정서적으로도 받은 것이 너무나도 많은데 현재 이 시각에도 고통 속에서 사경을 헤매시는 H 시아버지께 그 어떤 도움도 못 드리는 것이 가슴에 사무친다. 언젠가 로키가 원활하게 소통을 할 수 있게 되면 할아버지와 시시콜콜한 대화를 하며 웃는 날이 올 거라는 청사진을 그려왔는데 이제 꿈에서나 그런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걸까.


우리가 처음으로 대학병원에 다녀와 로키가 받은 진단을 설명드리던 날이 떠오른다. 내가 고개를 떨구고 이내 눈물을 흘리자 괜찮다고 다 잘 될 거라고 위로해 주셨던 모습이 생생하다. 평소에는 감정표현에 서투신 분임에도 신랑의 어깨를 살며시 토닥여 주시니 이내 신랑의 얼굴에도 참던 눈물이 흘렀다. 또 하루는 아이에게 올인하고 고군분투하는 우리가 안쓰러우셨는지 "이렇게 바쁘지 않아 봤자 할 것도 없어"라고 하시며 바쁜 게 좋은 거라며 응원해 주셨다. 나중에 모든 일이 다 잘 풀리고 나면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것이 뿌듯할 거라며 "멋지지 않냐"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에 그늘졌던 나의 얼굴에 피식하고 웃음이 번졌다.


그렇게 H 시아버지는 우리 인생에 폭풍우가 몰아치던 2년 내내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우직하게 우리를 지켜주셨다. 아이와 밖에서 놀다 저녁시간이 되어 식사를 하고 들어가겠다고 말씀드리면 계속 집에 와서 같이 먹자고 맛있는 게 많다고 전화를 주시기도 했다. 우리는 그렇게 함께 밥을 먹는 게 당연한, 말 그대로의 식구가 되어있었다.


다 같이 식사를 하고 후식으로 비비빅을 자주 드셨는데 로키는 매의 눈으로 지켜보다 할아버지의 하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로키의 식단에 철저한 할머니와는 다르게 이 세상 맛있는 건 모두 로키에게 다 주고 싶은 할아버지가 의견충돌로 실랑이하는 사이 로키가 하드를 냅다 베어 물었다. 그 모습이 참 웃기고 귀여워서 다 같이 한바탕 웃고는 했다. 그렇게 시댁에 모여 앉아 사소한 일로 함께 웃던 것이 당연했던 여름날이 생생한데 우리는 이제 할아버지를 뵈려면 대학병원으로 가야 한다. 의사 선생님이 모두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아직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마음의 준비라는 게 정말 할 수 있는 일이기나 한 걸까.


이렇게 애타는 우리의 마음을 몰라주는 속절없는 시간에 쫓겨 이제는 정말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가 되었다. 우리에게 위로해 주셨던 것처럼 다 잘될 거라는 말을 꼭 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병마를 이기고 나면 뿌듯하실 거라고 암을 이겨 낸 모습을 생각만 해도 멋지지 않냐고 말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H 시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서 내가 유일하게 드릴 수 있는 감사의 마음을 전하려 한다.


애써 웃지만 기운 없이 어깨가 축 쳐진 우리에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라고 말씀하시며 의지만 있다면 방법이 있을 거라고 다독여 주셨기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고 말이다. 불굴의 의지로 한평생 근면성실 하게 살아오신 그 꺾이지 않는 마음가짐을 우리도 이어나가겠다고 약속드리려 한다. 그동안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을 그리고 우리가 가족으로서 함께한 희로애락을 잊지 않겠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언젠가 로키가 말을 잘하게 되면 하늘을 향해 할아버지의 성함을 외치며 꼭 감사 인사를 전할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로키는 평소처럼 할아버지께 제일 많이 했던 말로 마지막 인사를 전하게 될 것 같다.

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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