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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내가 아이에게 저당 잡히다 Part.2

착각도 유분수

by 청크리

바닷가에서 놀다 아이가 낮잠이 들면 아이를 신랑에게 맡기고 해수욕장 제일 끝에 위치한 카페로 향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출렁이는 바다를 보고 있다 보면 일렁이던 마음이 조금은 잔잔해졌다.


하지만 그 고요함의 끝에는 이대로 그냥 바닷속으로 사라지고 싶다는 마음이 자라났다. 밀물이 들어오기 전 갯벌을 쭉 따라 들어간 뒤 바닷물이 서서히 차오르면 망망대해 한가운데 갇힌 채 영영 나오고 싶지 않았다.


해수욕장에 놀러 온 다른 평범한 가족들이 너무 부러웠고 돌쟁이마저도 어찌나 상호작용이 좋던지 날 뚫어지게 쳐다보고 “어어 아아” 소리를 내며 포인팅(손가락으로 가리키는 행동)을 하는 걸 보면 참 무기력 해졌다. 그 많은 수업을 들었는데 아직도 원하는 게 있으면 크레인만 하는 우리 아이가 미워졌다.

*크레인: 언어적, 비언어적 표현 대신 보호자 손을 잡아 끄는 행동. 예를 들어 배가 고프면 양육자를 쳐다보며 표현하거나 냉장고를 가리키는 대신 양육자의 손을 끌어당겨 냉장고 앞으로 간다.


그래, 그냥 콱 죽어버리자. 이렇게 살아봤자 뭐 해.

모든 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았다. 내가 노력해 봤자 바뀌는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큰 좌절감과 상실감으로 다가왔다.


카페를 박차고 나와 멍하니 무창포 해수욕장 모래사장에 앉아 반짝이는 윤슬을 바라봤다. 죽기 전 마지막 풍경 치고는 참 아름답다고 생각이 드는 내 감상이 3류 같았다.


그러다 불현듯 큰 깨달음이 다가왔다.

나는 지금 처음으로 죽고 싶은 게 아니라는 걸.


내 인생도, 나도 애초에 이렇게 무너질 만큼 완벽했던 적이 없었다는 걸 말이다.


1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나는 죽고 싶은 일이 있었다. 부러운 일도 많았고 초라한 적도 있었고 불공평하다 느끼는 일도 수두룩했다. 다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에 그 모든 일들이 미화되고 잊혔을 뿐이었다. 과거에 English Bay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던 나는 지금처럼 딱 죽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정확히 왜 인지는 희미해져 있었다.

*English Bay: 캐나다 밴쿠버에 위치한 해변지역. 도시의 중심에 근접하여 인기 있는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어느새 찬란히 주황빛으로 물드는 바다를 바라보며 미화된 과거의 내 결핍과 상처를 하나하나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어쩌면 배부른 소리라고 할 수도 있는 태평양 건너의 선진국에 사는 한 소녀의 상처였다. 그 아이의 정서적 결핍을 마주하기 시작했다.


7학년(한국의 중학교 1학년) 때 클라리넷을 살 형편이 안 되어서 친구들과 달리 나만 렌탈을 해야 했을 때, 하이스쿨(고등학교) 밴드부 유료 캠프를 가는 게 엄마에게 부담이 될까 미안해서 가기 싫다고 거짓말을 하고 빠졌을 때, 방학마다 한국으로 또 일본으로 너무나도 편하게 떠나는 넉넉한 유학생들을 보았을 때… 인정하기는 싫지만, 난 참 작아졌었다.


그리고 요즘 아이들도 여전히 이 slang (속어)를 쓰는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캐나다에서 고등학생 일 때만 해도 영어가 서툴고 갓 정착한 사람들을 FOB이라고 흔히들 불렀는데 중국 FOB 아이들은 나와 더듬더듬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어리숙 하게 웃다가도 교문을 나서서는 주머니 속 차키를 꺼내어 삐빅 하고 본인 BMW 차를 찾아 탔다. 붕 소리를 내며 낮은 차체가 방지턱 위에서 덜컹거리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들은 무료로 노래를 다운로드 받으려고 인터넷을 기웃거리는 나와 같은 16살이 아닌 것 같았다.

*FOB (Fresh Man Off the Boat): 갓 이민을 와 어리숙하고 언어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아직 채 적응하지 못한 사람을 일컫는 속어


그렇다고 아직 학생이던 내게 이런 경제적인 차이가 가장 큰 좌절감을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런 건 친구들과 까르르 웃고 떠들다 보면 금세 잊혔다. 날 제일 힘들게 했던 건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정서적 지원이 없이 크는 결핍이었다. 내가 클라리넷을 사지 못한 것보다, 그 어떤 상대적 박탈감보다 슬펐던 건 클라리넷 시험 전날 열심히 연습하는 내게 씨끄러우니 그만하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아빠의 모습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집안 사정이 안 좋아졌다 해도 내가 생계를 책임진다던지 학업을 중단한다던지 하는 일은 없었기에 내게 직접적인 타격은 없었다. 겉으로는 난 공부를 열심히 하며 학생 신분에 걸맞게 잘 성장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창 성장기라서 늘 돌아서면 배가 고파 끊임없이 먹었음에도 젖살이 빠졌고 키가 쭉쭉 자라 더더욱 다 큰애 같았다. 하지만 내면의 나는 누구보다도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했다.


가난이 대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이 창문으로 도망간다 했던가. 넉넉할 땐 꽤나 다정한 편이었던 부모님의 다툼은 일상이 되었고 난 적나라하게 그 현장에 노출이 되었다. 이혼을 하네 마네 엄마와 언니가 한편, 아빠와 내가 다른 편인 것이 당연시 돼버린 것이다. 난 둘 중 누구도 따라가고 싶지 않았기에 차라리 고아원에 버려 달라고 울던 날이 기억난다. 때린 사람은 기억도 못 한다고 아마 부모님은 기억도 못하시겠지만 난 아직도 그 장면이 나오는 악몽을 꾼다.


부모님은 늘 경제적으로 허덕이셨고 마음의 여유도 없었기에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배구팀에 속했는지 축구팀에 속했는지 잘 알지 못하셨다. 그러니 우리 배구팀이 다른 학교로 원정경기를 떠날 때 데려다줄 보호자가 없는 사람은 깍두기가 되어 서성이다 남는 자리가 생기는 다른 아이 부모님 차에 끼여 탄다는 것을 알리가 없었다. 그런 미묘한 챙김 받지 못하는 일들과 적나라한 가정불화가 나를 깊은 우울감에 잠식시키곤 했다. 오히려 챙김 받지 못해서일까 아이러니하게도 난 뭐든지 자립적으로 성실하게 해내는 아이로 성장했다.


선진국인 캐나다로 이민을 가 학교환경도 자연환경도 너무나도 좋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가정에서의 결핍이 만든 대비감과 괴리는 더 컸었던 것 같다. 게다가 가끔씩 1.5세 이민자로서 찾아오는 identity crisis(정체성 혼란)도 있었기에 난 한국인인 건지 뭔지 알 수가 없어 속이 항상 시끄러웠다. 하지만 늘 고성이 오가는 집안, 그리고 그로 인해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겪고 있는 언니를 보며 난 체할걸 알면서도 꾸역꾸역 나의 감정을 전부 다 삼켜버렸다.


이제는 엄마가 생계전선으로 뛰어들어 더 이상 한국에서처럼 하교 후에 날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씁쓸한 마음으로 빈집에 열쇠를 꽂고 들어가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건 13살이었던 내가 보호자 없이 홀로 있는 건 캐나다에서 불법이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아야 한단 것이었다. 그렇게 13살 아이는 집에 돌아와 후다닥 모든 블라인드를 다 내렸다. 신고정신이 투철한 캐나다 이웃에게 혼자 있는 걸 들킬까 봐 내내 마음을 졸였다. 그렇게 컴퓨터 본채를 발로 툭 쳐서 전원을 켜고 대충 밥을 퍼서 모니터를 보며 식사를 때웠다. 한국에서 자주 외식을 하고 웃고 떠들던 화목한 우리 가족은 점점 같이 식사하는 시간조차 없었고 그 누구도 나의 마음을 들여다 봐주지 않았다.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부터 내가 겪은 아픔을 하나하나 써내려 간다면 끝도 없을 테고 지극히 주관적인 이야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지난날의 나의 상처를 마주하며 깨달은 건 난 절대 완벽한 적도 없고 저당 잡힐 만한 건더기도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결핍 투성이의 불안전한 인간 그 자체였다.


아이로 인해 발생 한 예측불가한 미래와 증폭된 불안감으로 인해 모든 걸 아이가 망쳐놨다는 착각이라도 해야 마음이 편했던 걸까.


처음 아이의 발달지연을 알게 되었을 땐 많은 엄마들이 그렇듯 혹시 내 잘못이 아닌지 밤새 걱정하고 자책했었지만 죄책감에 시달리며 할 수 있는 모든 걸 시도해 봐도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많은 전문가들도, 느린 아이의 엄마들도 결국 그냥 일어난 일이라고, 타고난 것 이라던가 운이 안 좋다는 식의 결론을 냈기에 하필 내가 이 잔인한 복불복 게임에서 진 것을 한탄하는 결론에 다다랐던 것이다. 아이의 진단 이후 평범한 행복에서 벗어나 비정상적인 삶이라는 빚더미에 앉아버렸다고 말이다.


이런 오만방자한 나의 생각을 반성하며 눈앞의 반짝이는 윤슬을, 그리고 끊임없이 철썩이는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난 이미 너무나 오랫동안 불안해 왔다고. 나는 이미 비정상 이였다고. 애초에 내 인생은 해변가에 만들어 둔 무너지기 일보직전인 모래성 마냥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고. 보기 좋게 꾸며 놓은 내 인생의 민낯이 아이 덕분에 조금 더 일찍 드러났을 뿐이였다.


뒤돌아 보면 난 힘들고 무너질 때마다 진정으로 문제를 극복해 나간 것이 아니라 그저 삶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며 내면의 결핍을 다 덮어 버렸다. 초등학생이 중학생이 된 후 고등학생이 되고 또 대학생이 되듯 인생이란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단 이유만으로 내가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해 왔다. 게다가 결혼을 했으니 정말로 제대로 된 어른이 됐다고 믿어 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과거에 부모님께 받은 상처도, 나의 정서적 결핍도 다 지나 간 일로 치부 하면서 말이다.


회피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하는 내가, 나는 뭐든 정면승부 하는 승부사라고 쉽게도 얘기하던 내가 사실은 회피형 인간 그 자체였다니. 내 아이의 어려움을 겪으며 좋게 좋게 포장해 온 내 인생이 발가벗겨졌다. 즉 바꿔 말하자면 아이라는 존재가 내 인생을 망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미 망가져 있는 결핍 투성이인 내 인생에 아이가 들어온 것이 아닌가. 이 따위 엄마라니. 내 인생을, 또 아이의 인생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내 인생의 첫 흠이라고 여겨 온 아이의 발달지연이 처음으로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오히려 느린 나의 아이가 내 삶을 비로소 바로 잡는 새로운 원동력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완벽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는 것이 나의 오만한 착각이었다면 오히려 발달지연의 시련을 감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의 나는 내 행복한 인생을 아이에게 저당 잡혔다고 착각해 왔지만 앞으로는 아이와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자고 마음먹었다. 결혼을 한 후 제대로 커리어도 쌓아보지 않았으면서 안락함에 길들여지고 도태되었던 내가 지금부터 나의 인생도, 아이의 인생도 다시 시작해 보자고 다짐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현실을 바로 직시하고 나의 내면의 결핍을 덮어두지 않은 채 진정으로 나를 치유해 나가면서 말이다.


자포자기한 채로 모래사장에 철퍼덕 앉아 버려 엉덩이에 덕지덕지 묻은 모래를 손으로 탁탁 털어냈다. 나의 내적 갈등으로 엉켜버린 자아가 드디어 탈피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빨라진 발걸음으로 자고 있던 아이에게 돌아갔다. 아직도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아이를 한참 동안이나 지긋이 바라보았다. 임신 중 꾼 태몽에 나온 예쁜 복숭아처럼 아이의 뽀얀 얼굴에 붉게 지는 태양이 작렬해 부드러운 솜털이 소복이 보였다. 진단 후 처음으로 아들내미가 진심으로 사랑스러워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꾸준히 수업을 받으며 짬이 나면 계속해서 산으로, 바다로 떠났다. 이제는 아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해 주면서 말이다. 더 이상 내가 우울감에 휩싸여 있지 않으니 아이의 생떼에도 인내심이 생겼다. 꾸준히 지켜야 할 선을 알려주고 최대한 건강하게 먹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지켜나갔다.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한탄하고 좌절하는 일은 점점 줄어 들어갔다.


정상발달이냐 아니냐 하는 비교도 점점 하지 않게 되었고 육아는 누군가와 경쟁하는 것이 아닌 나만의 것이라는 걸 나 자신에게 계속해서 상기시켰다. 로키를 키우는 일이 내게 내려진 형벌 같다는 생각도 더 이상 들지 않았다.


나는 아이와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나만의 육아 가치관을 점점 갖추어 나갔다. 그렇게 늘 자아성찰을 하려 노력하고, 필요할 땐 거침없이 정신과도 갔다. 그리고 육아 관련 도서와 전문가에게 받는 부모수업을 통해 또 주변에서 전해주는 조언을 통해 나도 아이도 점점 더 중심을 잡고 성장해 나갔다. 우리는 드디어 우리만의 온전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여러 노력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매진했던 부분은 무엇보다 아이를 정말 진하게 사랑해 주는 것이었다. 로키가 아기일 땐 나의 산후우울증으로 인해, 그 후엔 진단의 여파로 인해 온전히 사랑을 주지 못한 날들이 늘 명치에 얹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아이가 나를 점점 더 잘 응시하고 한 음절이지만 말로 표현도 하고 끝도 없이 놀자고 보채기 시작했다. 아이는 많이 느리지만 그렇게 꾸준히 성장해 갔다.


그렇게 바쁘게 일상을 지켜가던 어느 날 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신랑이 운전대를 잡고 난 아이를 카시트에 앉힌 후 옆 좌석에 앉았다. 예전보다야 성숙해진 나였지만 그래도 늘 여러 가지의 고민이 있었기에 순간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찰나였다. 빠듯하게 받고 있는 여러 가지 수업이 아이에게 도움이 되고 있는 게 맞을까? 왜 여태 말이 술술 트이질 않는 건지… 개미지옥에 빠진 것만 같은 조급함이 가까스로 평정심을 찾은 줄 알았던 나를 또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때였다. 묵묵히 카시트에 앉은 아이가 창밖을 두리번거리더니 입을 떼었다.


“어디…“


“뭐라고 로키야?” 깜짝 놀란 내가 반문했다.


“어디… 가?”

아이가 나를 보며 물었다.


백미러를 통해 나와 눈이 마주친 신랑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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