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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내가 아이에게 저당 잡히다 Part.1

뜻밖의 변수

by 청크리 Feb 07. 2025

나는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유년시절 한국에서의 큰 기억은 아빠가 대기업에 다니며 야근이 잦으셨고 늘 묵직한 검은색 서류가방을 들고 다니신 모습이다. 엄마는 전업주부셨는데 음식솜씨가 좋으셔서인지 먹을걸 참 많이도 해주셨다. 엄마는 손이 커서 안 그래도 또래보다 키도 덩치도 큰 언니랑 내가 점점 더 포동포동 해져갔다.


가끔씩 엄마 손을 잡고 아빠 회사가 위치한 광화문으로 놀러 가 점심시간에 짬을 내 나온 아빠를 만나기도 했다. 나를 보고 성큼성큼 걸어오는 아빠가 입은 와이셔츠 목덜미에 흔들거리는 사각형 사원증이 멋져 보였다. 그렇게 아빠를 만나 광화문 파파이스에 앉아 햄버거를 먹으며 창밖의 분주한 사람들을 구경했고 난 어른들의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경기가 어려워도 우리 식구는 편하게 외식을 자주 했다. 난 마론인형을 정말 좋아했는데 식사를 하고 백화점 장난감 코너에 가면 미미를 살지 쥬쥬를 살지 한참 고민하던 기억이 있다. 또 한 번은 90년대를 휩 쓴 만화책인 "미스터 초밥왕"에 심취해서 엄마를 졸라 새우초밥을 먹으러 가 신이 났던 기억도 있다. 하고 싶은 건 다 했고 갖고 싶은 건 다 가졌다. 철부지 꼬마였던 나는 모르는 경제적인 문제들이 항상 우리 가족을 꼬리표처럼 따라다녔지만 적어도 난 늘 해맑을 수 있었다.


IMF가 터지고 뉴스에 사람들이 금을 모으는 운동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연달아 나왔다.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나는 잘 이해는 안 됐지만 어렴풋이 사람들이 돈 걱정을 하면서 왜 자기 금을 나라에 그냥 갖다 주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우리 집 장롱 속 금붙이도 그렇게 우리 손을 떠났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우리 집엔 그 어떠한 타격도 없었고 그 해 우리는 미국 그랜드 캐년으로 해외여행을 떠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집이 절대 그 정도 형편은 아니었는데 부모님이 지금으로 치면 YOLO족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부모님의 어려웠던 어린 시절의 결핍을 자식에게 풀며 큰 대리만족을 느끼셨던 게 아닌가 싶다.

*YOLO족: You Only Live Once의 약자로 한번 사는 인생 하고 싶은 거 다 하자라는 마인드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아무튼 그렇게 구김살 없이 큰 내가 10살이 되던 한 겨울, 한국의 치열한 경쟁사회와 끝도 없는 야근과 회식이 지긋지긋해진 아빠는 엄마의 눈물 어린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직표를 던지는 큰 결단을 내렸다. 이미 독립이민의 절차를 다 끝내 둔 아빠의 진두지휘 아래 우리 가족은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고 안타깝게도 더 편하고 행복해지자던 캐네디언 드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 집 가정형편이 기울기 시작했지만 다행히도 2000년대 캐나다에선 빈부차를 느낄 수 없었다. 부자라고 명품을 휘감고 다니지도 않았고 한번 차를 뽑으면 모두들 10년은 기본으로 타고 다녔다. 남의나이를 물어보는 것도 실례인 문화이니 부모님이 뭐 하시는지, 집이 몇 평인지 한국에서처럼 오지랖 부리는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겨울엔 4시면 어둑어둑 해가 지고 6시면 가게들이 다 문을 닫아서 어디 돈을 쓰고 싶어도 쓸 곳이 없었다. 한국의 번쩍이는 네온사인과 북적거리는 밤거리가 익숙한 우리 엄마는 왜 이 나라는 저녁만 되면 개미새끼 한 마리 없느냐고 황당해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영어로 자기소개도 잘 못하던 갓 이민 온 여자아이는 자는 동안 꿈도 영어로 꾸는 사춘기 소녀로 성장해 갔다. 외모에 점점 더 관심이 많아지다 보니 사고 싶은 게 늘어갔지만 사정이 어려운 부모님께 손 벌릴 필요 없이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면 충분히 살 수 있었다. 캐나다 최저시급은 한국에 비해 훨씬 높은 편이라서 학생신분으로서 떼돈을 버는 것 같았다.


자립적인 캐네디언 마인드를 금방 흡수해서인지 내가 벌어 쓰는 게 오히려 마음이 더 편했다. 점점 이렇게 캐네디언이 되어가던 나는 한국말을 하다가도 자꾸 영어가 튀어나오고 표정이나 제스처도 바뀌어 버려서 한 해 한 해 바나나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바나나: 겉은 노랗고 속은 하얀 바나나처럼 겉은 아시안이지만 속은 백인 같다는 은어


하지만 우습게도 여전히 근면성실한 것이 미덕이고 시험문제를 하나만 틀려도 아쉬워하는 게 당연한 뼛속 코리안이던 나는 학교에서 늘 honour roll에 올랐다. 그리고 외적인 게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나이에 캐네디언 아이들에게 꿀리지 않을 만큼 키도 크고 여드름 하나 없이 피부도 좋아서 내게 비결을 물어볼 정도였으니 집안사정이 안 좋아도 자격지심이 들 일이 없었다. 대부분 shy(샤이, 부끄럼 많은) 하다고 알려져 있던 동양 여자 아이들과는 다르게 건드리면 가만히 당하지 않는 성격도 한몫한 것 같다.

*Honour roll: 미주 고등학교의 우등생 명단


그렇게 세월이 흘러 지망한 대학교에 진학을 했고 학자금 대출을 받았지만 학자금에 조금씩 포함된 정부지원 allowance (용돈)도 있었고 내가 아르바이트를 좀 하면 원하는 옷을 사고, 친구들과 집 근처 영화관에 가거나 버블티를 마시기에도 충분했다.


그 후엔 일을 조금 하다가 소울메이트와 알콩달콩 연애를 하고 바로 결혼까지 했으니 정말 앞만 보고 가는 인생이었다. 막힘없이 인생의 장을 쭉쭉 넘기는 날 부러워하는 시선 또한 있었기에 나도 몰래 우월감 마저 느꼈던 것 같다.


그렇게 항상 꿀릴 일 없이 살아온 나였다. 금수저는 아니지만 내가 노력하면 못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돈 드는 취미가 없는 집순이였던 나는 지금보다 더 내성적이었고 남에게 큰 관심도 없었기에 누가 뭘 하던 시기, 질투를 할 일이 없었다. 오히려 내 인생 정도면, 이 정도 완만한 굴곡이 있는 인생이면 완벽에 가깝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그렇게 살아온 내게 청천벽력 같이 아이의 자폐 스펙트럼이라는 진단이 내려진 것이다. 내 인생에 처음으로 흠이라는 게 생겼다.


아이의 다름을 알고 난 뒤 놀이터나 키즈카페에서 비슷한 또래를 키우는 엄마들을 보면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내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건 바로 부러워 죽을 것만 같은 시기질투의 감정과 분노였다. 난생처음 느끼는 기분이었다. 저 엄마는 무슨 복이길래 정상발달 아이를 낳아 키우는 걸까? 난 대체 뭘 잘못한 거지?


계획형 인간이라서 그런 걸까. 열 달의 임신기간 동안 엄마가 될 준비를 하면서도 발달장애 여부는 알 길이 없으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이 변수에 울분이 터졌다. 출산 후 핏덩이를 온몸이 부서져라 키워내고 슬슬 티키타카의 재미를 알 수 있을 때쯤 일어난 이 악랄한 장난 같은 일. 왜 이 정상발달 대 발달지연 복불복 확률게임에서 나는 진 거냔 말이다.


옹졸하고 치졸한 생각들이 내가 평생 쌓아 온 모든 가치관의 근간을 다 흔들어 놓았다. 이 세상 어떠한 구렁텅이도 내 속마음만큼 더러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내 눈앞의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잘조잘 엄마와 눈 맞추며 재밌게 노는 다른 집 아이를 보면 로키 대신 저 아이가 내 아이였으면 싶었다.


난 당연히 내 아이는 나처럼 이중언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요즘 많이들 보내는 영어유치원의 에이스가 되겠거니 했고 제3의 언어로 캐나다내 영어와 공동어인 불어를 가르칠지 아니면 중국어를 가르칠지 고민했던 오만방자한 나였다. 하지만 로키의 개월수가 높아질수록 영어는 고사하고 정상발달 아이와의 한국어 수준의 갭이 어마어마하게 커져만 갔다.


아이는 36개월을 향해 갈 때도 표현언어에 비해 수용언어는 좀 나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모든 걸 다 알아듣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서 멋 모르고 차도로 뛰어 들려하거나 훈육을 해도 저지레를 할 때가 있었는데 누가 보면 그저 고집이 센 어린이에게 끌려다니는 엄마로 보이기 딱 좋았다. 그러니 이제 어디를 가도 우리 아이는 개월수에 비해 말도 못 하고 착석도 안 되는 튀는 아이가 되어 있었고 나는 아이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못난 엄마가 되어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의 내적인 발달은 느렸지만 외적인 발육은 빨라 겉보기엔 잘 성장하는 걸로 보였고 뽀얀 얼굴의 외모까지 받쳐주니 “이야 그놈 참 잘생겼네” 하며 말을 거시는 어른들이나 “같이 놀자 친구야” 하고 다가오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그게 그렇게 가시방석일 수가 없었다. 아이는 늘 묵묵부답이니 말이다. 튀는 게 이 세상에서 제일 싫은 내향인 그 자체인 나는 아이의 평범하지 않은 발달도 참 예쁜 그 얼굴마저도 부담이자 벌칙 같았다.


그렇게 매일매일 독특한 아이와 생활을 하다 보니 눈에 띌 수밖에 없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세 돌 때쯤 아이는 걸어가다가 분수가 보이면 발을 담그고 논다고 고집을 부렸고 점점 옷이 젖어가면 다 벗고 들어가서 놀아야 했다. 말리고 끌고 가려해도 생 고집을 피우니 내 힘으로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다. 발에 아주 작은 모래 하나만 들어가도 신발을 내던지고 맨발로 질주를 하는 건 일상 다반사였고 꿱 하고 하이톤으로 소리도 자주 질러 나도 주변 사람들도 화들짝 놀라고는 했다. 난 자꾸 죄인이 되어갔다.


완만한 그래프를 그리며 살아와 누군가를 의식한 적 없는 내 기준에 완벽한 내가, 내 인생이 아이에게 저당 잡혀 오도 가도 못하게 된 것 같았다. 아이와 다니다 보면 등줄기에 식은땀이 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이 때문에 내 인생도 부부관계도 다 실패한 것만 같았다.


이렇게 내 속은 썩어 들어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할 건 해야지 싶어서 수업은 기를 쓰고 다녔다. 언어수업을 기본으로 감각통합 수업, 놀이수업 등 안 해 본 수업이 없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대다수의 엄마들은 돈값한다고 추천하고 그 외의 엄마들은 우리 애 똥개 훈련 시키냐며 거부하는 ABA 수업은 자칫 하다가는 강압적인 게 안 맞는 로키에게 역효과가 날 것 같아서 보기 드물게 밝고 배려심 깊은 서울에 계신 선생님께만 받았다. 지방에 사는 우리는 그 먼 길을 1년 반을 다녔다.

*ABA: 응용행동분석을 기반으로 하는 수업.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방법을 터득함


하지만 몸도 마음도 더 지쳐만 갔고 점점 서울행은 격주가 되어갔다. 마침 그때가 여름이어서 서울에 가지 않는 주에는 거의 무조건 짐을 싸고 바다로 향했다. 감통(감각통합) 수업은 그만둔 상태였기 때문에 로키에게 자연 그대로의 바다와 모래사장을 느끼게 해주고 싶은 것도 있었고 일종의 도피처가 되었던 것 같다.

*감각통합 수업: 다양한 감각 자극을 어떻게 처리하고 반응하는지 이해하고, 그 능력을 향상하는 활동들을 포함하는 수업


하지만 도피처라며 떠난 그 바닷가에서 사실 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이 오도 가도 못하는 삶에서 영영 도피하고 싶었고 더 이상 그 어떤 변수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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