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혁명>
물질적 가치로 즉각 치환되지 않는 노동은 그 가치가 보이지도/들리지도/말해지지도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것이 그렇듯, 노동은 그 가치를 숫자로 표시할 수 있도록 요구된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이반 일리치는 노동을 자급자족 노동, 그림자 노동, 임금 노동으로 구분하였다. 임금노동은 팔기 위해 무언가를 생산하고 그에 대한 댓가가 돈으로 지불되는 노동이다. 자급자족 노동은 나에게 필요한 것을 내가 직접 만드는 노동이며, 그림자 노동을 오로지 임금 노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림자처럼 존재하는 노동이다. 다른 이에게 상추를 팔기 위해 기른다면 임금노동, 내가 먹으려고 상추를 기르면 자급자족 노동, 가족의 한 구성원의 원활한 임금 노동을 위해서 다른 구성원은 식사를 만들고, 쓰레기를 치우고, 아이를 돌보면 그림자 노동이다. 그림자 노동은 필수적이지만 임금노동과 달리 명시적인 가격표는 붙어있지 않다.
자본주의의 거대한 흐름은 더 많은 물질과 재화를 생산하는 기능을 탁월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개인의 여러 기능을 분절적으로 끊어놓는다. 그 속에서 끊어지는 많은 것들이 있는데, 주변을 살피고 챙기는 어떤 따뜻한 마음 역시 그런 것 같다. 함께 무언가를 나누는 것에 대한 가치는 물질적으로 치환되기 어렵고, 점차 더 많은 것들이 가격표로 매겨져가는 상황에서 그러한 가치는 가시화되지 않다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간다. 대안은 어디에 있을까?
마르크스는 봉건사회를 타파하기까지는 부르주아와 손을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처음 그가 생각했던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선행되어야할 사회변화는 봉건제의 철폐만이었을 수 있겠으나, 어떤 점에서는 현재도 하나하나가 혁명을 위해 변환되는 중일 수 있겠다. 과거 노예를 살 때는 하루 24시간, 그의 전체 남은 인생을 구매해야했다. 산업혁명 이후에는 구매대상이 오전 9시에서 6시까지 기능하는 노동자로 바뀌었다. 현재는 신문 기사를 쓰는 행위, 고객의 테이블에 그릇을 나르고 치우는 행위처럼 생각도 못한 하나하나가 분절되어 가격표 달려 팔린다. 그렇게 분절해서 나누었기에 이제 그것은 기술로 대체되는 것이 가능해진다. 키워드와 방향만 제시하면 기사를 쓰는 AI, 그릇을 나르는 서빙기계처럼 잘게 다듬어진 이후 인간은 노동에서 해방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일자리를 잃는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그렇게 모든 것들이 기계노동으로 대체된 후에 사적소유철폐는 좀 더 실현가능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기술의 발전에 감명받은 과학기술 지상주의자 같은 얘기일 수도 있지만 노동하지 않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이 기계로 바뀐다면, 그래도 내가 원하는 것을 누릴 수 있다면 인간은 내려놓는 것이 더 쉬워질까? 그런 사회에서도 사치재는 잘 팔리겠지만.
독서 모임에서 그렇게까지 한 개인의 기능이 분절되고 끊기는 것을 견딜수 있을까라고 물었던 분의 질문에 또 다른 분이 떠올린 1984의 마지막 문장 '우리는 빅브라더를 사랑했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사랑한다. 견디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 우리는 비인간화를 사랑한다. 무언가에 지친 자들이 나를 지치게 하는 대상을 사랑하는 마음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그 상태로 머물러 있으려 노력하는 마음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상처입은 자가 상담자에게 하는 말이 떠오른다. 어차피 선생님도 돈 받으니까 잘 해주시는거잖아요. 지금 당장 따뜻한 느낌을 주는 이것 역시도 그 모든 것처럼 가짜라고 생각하는 불안한 마음, 계속해서 지친 채로 남아있으려는 마음. 새로운 것이 전복시키기 전 나의 이 비루하고도 아늑한 세상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