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귀영화) 2.3 - 지팡이소녀(5)
부산 편집실로 내려왔다. 촬영 소스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일단 콘티대로, 순서대로 붙이는 컷 편집을 시작하기 전에 일단 나는 잠시 외면의 시간을 가졌다. 뭔가 객관화돼야 한다거나 하는 그런 고급스러운 이유는 아니었고, 그냥 프리 때부터 촬영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계속 달려오기만 했기 때문에 숨을 좀 돌리고 싶었다. 게다가 안 그래도 자신의 졸작 촬영이 끝나면 편집을 하면서도 틈틈이 같은 조 연출 동기의 현장에 가서 현장 일을 도와줘야만 했다. 나는 그래서 편집은 시작도 안 하고, 일단 동기 일을 돕는 것에 집중했다. 내가 가야 했던 현장은 부캠때도 같은 팀이었던 동갑 S군의 현장이었다. 이 친구의 영화는 몽골 출신 주인공이 레슬링을 하는 이야기였는데 그래서 주인공도 남자들이었고 나오는 캐릭터들, 보조출연들까지도 대부분 운동하는 남학생들이었다. 레슬링 장면들을 찍을 때는 여기저기서 훌렁훌렁 상체 탈의를 한 남자들이 격렬하게 몸을 부딪혔는데... 내 현장에서 잃었던 미소를 이 현장에서 찾는 아지매가 되었따… 므흣. 나는 스크립터를 맡아 열심히 스크립을 했다(기분이 좋아 열심히 한 게 아님 정말로 그냥 열심히 한 거임…흣흣흣므흣…)
이 S군은 촬영을 맡은 P촬영감독 오빠와 아카데미에 들어오기 전부터 작업을 같이 했었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정말 손발이 척척 잘 맞았다. 어찌나 부럽던지… 게다가 그림, 룩에 대한 애정이 커서 함께 열심히 연구하면서 한컷 한컷을 만드는데 정말 장인정신이 따로 없었다. P 촬감 오빠는 원래도 촬영을 잘 하지만 이번에 보니 왜 잘하는지 알겠더라. 정말 모든 것을 컨트롤하며 빛 한 줄기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으며 촬영을 했다. 그리고 이 S군은 부캠때도 스멀스멀 느끼긴 했지만 정말… 또라이가 따로 없었다. 영화에 미친 또라이… 라고 해야 할까… 그림이면 그림, 연기면 연기, 소품이면 소품 정말 독하다 싶게 준비를 했다. 격렬한 남자들의 이야기다 보니 비를 맞으며 진흙탕을 뒹굴고 몸싸움을 하는 장면도 있었는데 그때 배우들도 너무 힘들어했을 뿐 아니라 자꾸 테이크가 반복돼서 스태프들도 지쳐갔었다. 그런데 연출 놈은 자꾸만 다시 가자고 외쳤다. 몸싸움은 더욱 격렬해지고, 배우들은 힘이 빠지고 그런데 뭔가, 그렇게 시간이 갈수록 그 장면이 더 진짜 같아지고 어떤 페이소스가 느껴졌다. 테이크를 가고 또 가며 S군은 모니터에 더욱 집중했고 집요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정말 연출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나를 느꼈다. 나도 이렇게 독하게 더 했어야 했나 반성하기도 했고(나는 안 독했는 줄 암. 근데 진짜 난 별로 안 독했다고 생각함!) 이 작품은 정말 잘 만들었다. 이후 여러 영화제들을 휩쓸었고, 페이소스가 가득 담긴 장면들이 많다.
여튼 그렇게 동기 현장에서 또 여러 깨달음도 얻으면서, 다시 내 촬영본을 편집하기 시작했다. 하… 정말 편집은… 고통스러운 시간이다. 현장에서 구멍 났던 그 모든 것이 편집을 하며 다 보이기 때문에 화가 나 미칠 것 같은데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며, ‘존나 구리게도 찍어왔네~~ 그러나 이 작품은 내 작품이 아니다~~ 이걸 내가 어떻게 영리하게 붙여서 훌륭한 이야기를 새로 쓸 것인가~~ ’ 하는 마음으로 구멍들을 메꿔야 한다. 그런데 나는 정말… 정말로 너무 화가 나고 슬펐다. 내가 찍어온 것들이 너무너무 아쉬웠기 때문이다. 내가 오케이를 했으니 어쩔 수 없는 건데도… 이 감정이 객관적여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오가다 편집실에서 동기들을 만나면 나는 망했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며 좌절을 좀 많이 했던 것 같다. 나중에는 동기 오빠가 너 우는 소리 좀 그만하라고 했을 정도였으니…
당시의 나를 생각해 보면 정말 나도 너무 징징대긴 했던 것 같다. 책임감 없이… 철 없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러나 그때의 나는 정말로 심각했다. 모든 구멍들이 정말 큰일이 난 것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특히 기억에 남는 구멍 하나는 시퀀스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린 것이다. 이 시퀀스는 극의 초반, 주인공 민서와 동생 민호의 상황을 설명해 주는 씬이었는데 당시 시나리오 피드백 때도 교수님들의 온갖 공격을 받았었다. 도대체 이 씬이 왜 필요하냐면서… 영화의 톤이 갑자기 드라마 톤이 되지 않냐, 그리고 여기서 나온 여자는 이때 의미심장한 대사를 던지면서 이후에는 왜 아예 안 나오냐 그것도 말이 안 된다. 캐릭터를 그렇게 소모적으로 쓰면 안 된다 등등등. 온갖 잔소리 주절주절 네네 알겠는데 저는 그 말들이 귓등으로도 안 들리고 지금 제 눈에는 이 씬이 꼭 있어야 할 것처럼 보여요 교수님들이었다.
결국 내가 의견을 굽히지 않아 밤 촬영까지 감행하면서 그 씬들을 찍었다. 그랬던 씬이었는데… 이렇게 다 붙여놓고 보니 교수님들이 하셨던 그 말이 뭔지 너무나 명백히 보이는 것이었다! 하느님, 저에게 왜 이러시나이까. 도대체 왜 시나리오에서는 깨닫지 못하다가, 그림들을 다 붙여보고 나니 보이는 것인가… 이건 흡사… 마귀가 나를 농락하려고… 가 아니고 나의 부족함 때문이겠지 그래 나의 부족함이 마귀로구나! 하면서 나는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붙여보려 발악을 했다. 그러나 그 시퀀스를 집어넣으면 영화의 흐름이 끊겼고, 이야기의 흐름도 뚝 끊어졌다. 게다가 의미 심장한 말을 하고 유유히 사라지는 여자는 이후에 극 중에 또 등장해서 뭔가 역할을 하려나? 싶은 기대를 하게 하는데 뒤에는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이럴 수가. 내가 이 말을 어디서 들었더라? 아하, 촬영 전 모두가 나에게 외치던 그 말이었지. 그 말들을 내가 왜 귓등으로만 들었단 말인가… 귓구멍에 조금이라도 집어넣어 보지… 땅을 치고 후회하면서… 마침내 이 시퀀스는 통째로 들어내는 게 맞다는 결정을 내렸다.
여자 배역을 해주셨던 임 배우님께 뭐라고 말씀드리지… 연기도 너무 잘해주셨는데… 그 씬이 통째로 사라졌다는 걸 알면 충격이 얼마나 심하실까… 일단 연락처를 지우고 차단을…(비겁한 속마음) 이후 배우님께 석고대죄하고 말씀드렸다. 통화를 한 것이었지만 무릎 꿇고 통화했다. 천사 같은 배우님은 아~ 그랬구나 하시면서 괜찮다고 해주셨다. 너무나 죄송스러워서 내 목소리가 거의 1초 뒤 죽을 사람처럼 기어들어가 있으니 필시 화가 나긴 하는데, 한 대 때릴 수도 없고 열은 받지만 어쩔 수 없이 용서해 주신 거겠지…? 선배님은 너무 감사하게도 “나중에 또 같이 작품 하자~” 하고 빈말을 해주셔서 네네 정말 꼭이요!라고 하며 통화를 끊었던 기억이 난다(그 후 4년 뒤, 내 장편 데뷔작 캐릭터 중 하나를 감사하게도 맡아주셔서 이때의 죄를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게 됐다. 휴 다행이다).
여튼 그런 저런 각성의 시간을 거치면서 계속 편집을 했다. 그러나 아무리 편집을 하고 또 해도, 크리틱을 받아도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한계를 느꼈다. 나는 편집은 정말 아닌 것 같다는 마음속 포기를 했기 때문에 발전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좌절에 좌절을 하고 있던 그때 지나가던 J 교수님이 나의 우울한 표정을 보셨다. 편집실에 따라 들어오셔서는 어디 한번 보자고 하셨다. 액션 장면들을 넘기면서 어떻게 붙여야 할지 노하우를 마구 알려주셨다. J 교수님의 데뷔작은 내가 꼭 하고 싶은 코미디, 액션, 로맨스가 다 들어있는 복고풍의 만화 같은 영화였다. 그 만화적인 톤을 아는 사람이다 보니 시나리오를 쓸 때도, 좌절에 빠져있을 때도 늘 나에게 완벽 맞춤형의 조언과 위로를 해주시곤 했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상상하는 것들을 최대한 할 수 있도록 늘 용기를 준 것도 J 교수님이었다. 꽁지머리 교수님과는 양대산맥으로다가 성향도 극과 극이었는데 J 교수님은 아주 다정했고 섬세하게 학생들을 살펴주셨다. 그러다 보니 나는 꽁지 교수님이 무슨 말을 하시면 의심부터 하고 보는데(쏘리맨~ 아니 쏘리썰~) J 교수님이 무슨 말을 하시면 한방에 믿고 완벽 신뢰를 해버리곤 했다. 그런 J 교수님이 알려주시는 편집 노하우니 나는 고개를 완전 열심히 끄덕끄덕이며 들었다.
한참을 그렇게 편집 속성 과외(?)를 듣다가 J 교수님이 이제 플레이를 해보라고 하셨다. 그런데 내가 플레이를 하자 이 쌤이 갑자기 비트박스를 하시는 게 아닌가…? “푹 퍽 피융 팍 쿵 쾅! 으악!” 입으로 넣는 액션 장면의 효과음들이었다. “여기서 대사 치고… 그다음 여기서! 퍽! 팍! 으억! 푸슈웅~ 푹 팍! 빠바방~~~ 음악이 나오고!” ….. 저… 저기요 쌤… 제가 너무 부끄러운디요…? 그러나 교수님은 아랑곳 않으셨다. 이렇게 효과음을 입으로 막 넣어보면서 편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씨쥐로 피가 뽝!!!” 이러면서 계속 신나 하며 효과음을 넣어주셨는데 교수님의 비트박스(?) 사운드 효과를 듣고 있으니 뭔가 묘-하게 그림이 좀 더 괜찮아 보였다. 신기하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알게 되었다. 후반 작업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후반작업이란 마치 심폐소생술 같은 것이었다. 죽어가는 화분에 물을 주고, 생기를 주고, 삶을 불어넣어주는 것…
마지막 편집 크리틱을 마친 후 나는 안 되겠다 싶어 전문가를 찾아갔다. 전문 편집 기사님의 도움을 받아 새롭게 편집을 다듬었고, 편집락이 걸린 채 음악, 후시녹음, 사운드 작업을 시작했다. 후반 작업을 제대로 하는 것은 나도 처음이라 사실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겠었다. 그중에서도 일단 음악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음악은 이전 선배들 작품에서 음악을 담당했던 분들을 살펴보다가 컨택을 하게 됐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후 같이 하기로 했다. 내가 생각했던 음악, 레퍼런스들을 보내달라고 하셨는데 정말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평소에도 음악을 잘 듣지 않기 때문에 사막에 떨어진 바늘을 찾아야 하는데 나는 바늘이란 게 어떻게 생긴 건지 한 번도 본 적조차 없는 사람 같은 그런 막막한 느낌이었다.
음악감독님이 일단 본인이 생각하는 음악들을 만들어서 들려주셨는데 그 음악들을 듣고 나는 처음에는 엇… 이게 아닌 것 같은데 하는 생각만 들었다. 그래서 온갖 할리우드 히어로 영화 OST를 찾아가며 레퍼런스로 드렸다. 이후 시간이 좀 지나고, 음악감독님이 내가 레퍼런스로 드렸던 것들과 비슷한 느낌의 음악들을 만들어주셔서 듣는데 헉… 이건 더 아닌 것 같은 게 아닌가! 다시 석고대죄했다. 죄송합니다… 처음 주셨던 방향이 더 맞는 것 같아유… 정말 연출의 삶이란… 맨날 석고대죄하는 삶인 것 같다. 그래서 인복이 있어야 하는 것 같은데 내 주변엔 다 천사 같은 사람들뿐인 걸까… 역시나 천사 같은 음악감독님은 괜찮다시며 그럼 첫 번째 버전에서 더 발전시켜가보자고 하셨고, 음감님이 작업을 하실 때 뒤에 앉아서 같이 듣다가 어떤 악기가 마음에 들면 그 악기를 더 찾아보고 더 추가하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점점 더 방향을 잡아갔다. 액션 장면에서는 뭔가 게임 같으면서도 통통 튀는 조금 특이한 음악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말해도 음악감독님이 척척 분위기를 만들어주셨다. 역시 전문가란 이런 거군…!
후시 녹음은 배우들을 불러서 다시 녹음을 진행했고, 사운드 효과들도 믹싱실에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다 얹어주셨다. 그런데 내 이야기는 조금 톤이 떠 있다 보니 평범한 드라마 사운드들 보다는 조금 더 비현실적인 소리들이 나길 바랐다….라는 마음을 나도 그때는 몰랐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을 믹싱기사님과 나눠야 작업이 편하다는 것 또한 몰랐다. 그러다 보니 믹싱실에서는 지팡이를 휘두를 때 보통 나는 휙- 하는 바람 소리를 얹어주셨는데 나는 그 소리가 좀 더 과하길 바라서 더 큰 우웅- 소리 없을까요? 더 웅장하고, 뭔가 기이하고… 스타워즈 주왕~~~ 그런 느낌의 뭔가 뭔가 뭔가… 뭔가 그런…. 이런 식으로 표현하곤 했다. 그러자 믹싱 기사님이 이것보다 더 크면 이상한데, 너무 비현실적인데…라고 하셨는데 그때 “네! 저는 이게 비현실적이면 좋겠어요! 괜찮으니 그렇게 비현실적인 사운드들을 많이 넣어주세요!”라고 말을 못 했다. 왜냐면 나도 처음 하는 것이다 보니 전문가가 이상하다고 하면 그런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조금 더 오버하면 좋겠는 것들은 최대한 붙잡았던 것 같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 나갔다.
마지막으로 촬영감독이 색보정을 맡아서 해줬는데 색보정은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서 그냥 손 떼고 있다가 확인만 했다. 그 당시에는 색보정이란 게 뭔지 잘 모르겠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 색보정도 약간 어색한 부분들이 지금은 보인다. 어떤 색감의 톤을 계속 가지고 갔으면 좋을지, 장소에 따라 어떻게 하면 좋았을지 같은 것들도 더 보여 아쉬움이 좀 있다. 하지만 이제 이런 것들도 다음에는 좀 더 신경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졸업 작품을 마무리 지었다.
아, 하나 갑자기 또 떠오른 기억이 있다. 아카데미 편집실은 암막 커튼이 각 컴퓨터마다 쳐 있다. 그런데 연출 동기인 S 군이 이리 좀 와서 자기 것 좀 보라고 하며 난리를 피웠다. 가보자 엔딩이 두 가지 버전이 있는데 어떤 게 나은지 고르라는 것이었다. 앉아서 보는데…. 똑.같.았.다. 그것도 아주. 헤드폰을 빼면서 도대체 뭐가 다르냐고 묻자 다르다고 난리를 피우는 것이다. 아니… 뭐가…? 뭐가 달라? 내 눈에는 정말 똑같은데… S의 말을 들어보니 뭔가 마지막 컷의 길이가 (당시 내 느낌엔) 0.00001초 더 빠르고 늦고의 차이 같은 그런 것이었는데… 자신은 도무지 고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S군의 눈에는 광기가 이글거렸다. 하… 참… 내… 어처구니없어하는데 동기들이 지나가다 고개를 절레절레- 동기들도 다 붙잡혀 와서 하나를 골라야 했던 것 같다. S야… 너는 정말 진정한 연출이다. 이런 디테일이 있었기에, 훌륭한 작품이 나왔던 거라고 믿는다(이렇게 믿어야지 별 수 있나).
여튼 이렇게 연출들의 집요함과 함께 우리 기수는 8개의 졸업 작품을 완성시켰다. 모든 작품들이 다 개성 있었다. 그리고 모든 작품들이 S군의 작품처럼 각자만의 광기를 품고 있었다. 최종 내부 시사회 때 이 작품들 중 우수 작품 세 작품을 뽑아 아카데미 영화제 개막식날 상영을 한다. 그런데 그중 하나로 <지팡이소녀>가 뽑혔다. 이건 내가 정말 장담을 하는데… 지팡이소녀가 뽑힌 이유는 세 작품 중에 좀 독특한 색채를 넣고 싶어서 뽑아준 것 같다. 다른 두 작품이랑은 결이 완전히 다른, 좀 이상한 작품이라서 이런 개성 있는 작품도 있다…는 의미로 뽑힌 것 같 같다는 거다. 왜냐면 정말 나는 겸손하려는 게 아니고… 지팡이소녀보다 훨씬 백배 천배 더 만듦새나 이야기적 완성도가 있는 동기들의 작품이 많았다. 정말이다. 그런데 뽑혔다는 건 정말로… 뭔가 세 작품을 조합하는 과정에서 운이 좀 따랐던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아무리 운이 따랐다 해도 나는 이 사실이 한동안 믿기지가 않았다.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전, 시나리오 스쿨에서 만난 Y 오빠에게 아카데미 속성 과외(?)를 들을 때 자기 졸작이 개막작으로 뽑혔다는 말을 했었다. 그때는 이 오빠가 그저 어마어마하게 대단하게만 보였었다. 나는 아카데미 들어가기만 해도 다행일 거라고 생각했었고 “제발 들어가게만 해주세요. 만년 꼴찌어도 좋으니 입학만 하고 싶어요. 저는 용 꼬리, 뱀 대가리 둘 다 아니고 그냥 뱀의 꼬리도 괜찮으니 붙여만 주세요”라고 신에게 기도를 하곤 했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만든 졸업작품이 개막작에 끼었다니…? 정말 이렇게 세상에는 믿을 수 없는 일이 가끔씩 벌어지는 것 같다. 그리고 그건 내가 인정받아서,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이렇게 극적이고 우연한 조합의 결과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런 걸 보면 참 세상 일은 알다가도 모르겠으니 그냥 존나게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렇게 놀라운 일 중 하나가 또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졸업을 앞둔 시기에 내가 상업 영화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것 역시 내가 잘나서,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정말 극적인 여러 우연과 운들이 겹치면서 결정된 일이었다. 당시 아카데미가 졸업영화제만을 앞두고 있고, 마지막 수업 겸 B교수님과 연출과 친구들이 카페에서 수업을 했던 적이 있다. 그때 심심풀이 겸, 농담 겸 B감독님이 너희들 각자 다 만약 상업영화 현장일을 할 수 있다면, 어떤 감독의 현장에 가고 싶은지를 물어보셨다. 다들 자기 취향의 감독들을 이야기했는데 나도 아카데미 감독님들 중 내가 롤모델 삼으면 좋을 감독들을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나는 판타지, 조금 허공에 뜬 이야기를 좋아하다 보니 그런 결을 찾다 생각한 감독님들이 J, A 감독님이었다.
그래서 그 두 분을 이야기했는데 B 감독님이 J감독님이 이제 곧 뭐 들어간다는데? 하면서 예전에 모 페스티벌 심사위원으로 만나 알고 지낸다시는 것이다. 연출팀 구하는지 연락해 볼까 하시길래 네? 하고 있는데 정말로 연락을 하셨다. 얼떨떨한 채 있었는데 연락을 하시더니 조감독이 연출팀 모집하고 있다며 조감독에게 이력서를 보내라고 답을 하셨다는 것이다. ”근데 이렇게 지인 추천이라고 해도 그게 뭐 효력을 발휘하는 건 없어. 니가 면접을 잘 봐야 되고, 연출, 조감독의 성향과 맞아야 되고, 결국에는 현장에서 필요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거니까. “라고 B 감독님이 말하셨지만 그건 너무 당연한 말씀이었고 내 심장이 갑자기 두근두근 거렸다. 항상 상업영화 연출팀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내가 할 수 있을까? 진짜 열심히 이력서 쓰고 면접도 준비하고 올인해 봐야겠다 굳게 다짐했다.
*다음 편은 이 시리즈의 마지막 <외전>입니다. 시리즈가 너무 길어지는 관계로 아예 나눠서 새롭게 시작하려 합니다. 여기까지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앙뇽히계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