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귀영화) 2.3 - 지팡이소녀(4)
이번 글에서는 로케이션에 대한 이야기와 촬영을 하면서 절대 포기할 수 없었던 것, 포기해 버려 아쉬운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봐야겠다.
지팡이 소녀의 가장 중요한 로케는 공원이었다. 사실 시나리오를 보면 그냥 동네 공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예쁜 걸 좋아한다(<-- 이런 것조차 연출의 취향이고, 영화의 톤에 반영된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그런데 막연히 공원을 상상했을 때, 나는 그 장소가 뭔가 매력적이었으면 했다. 이런 게 참 어려운 부분이다. '뭔가' 매력적이었음 좋겠다는 생각이 있는데 그 '뭔가'가 도대체 뭔가!!! 이것을 알아가는 과정이 영화일을 하는 즐거움이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이것이 고통이 되기도 한다.
연출이라면 특히나 구체적인 그림, 취향이 있어야 한다. 구체적이지 않을수록 스태프들이 고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연출이라고 모든 것들에 언제나 구체적인 그림이 있는 것만은 아니다. (거장 감독들은 다르려나? 나는 거장이 안돼봐서 그건 몰?루!) 그러다 보니 나도 하나하나 찾아가야 하고, 어떤 때는 그건 잘 모르겠으니 그냥 알아서 해주면 좋겠다... 는 부분도 있다. 또 어떤 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 대충 결정을 내렸다가 나중에 다 만들어진 영화를 보면서 오마이갓. 이걸 더 고민했어야 했는데 하고 후회를 하기도 했다.
일단 나는 공원이 중요한 장소고 영화의 분위기를 만들어줄 거라는 생각에 공원을 먼저 찾는 것이 우선순위였다. 부산에서 시나리오 쓸 때는 탑골공원을 상상하며 글을 썼다. 이미지도 찾아보면서. 그 후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탑골공원에 갔는데 뭔가 이 공원은 아닌 것 같았다. 생각보다 휑하기도 하고, 조금 칙칙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다른 공원들로 눈을 돌렸다. 보통 제작팀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데스크 헌팅이다. 요즘에는 구글지도, 네이버 지도가 워낙 잘 돼있어서 컴퓨터로 일단 여러 장소들을 살핀다. 그런데 나는 그게 좀 답답했다. 그래서 집 주변부터 시작해서 마구마구 돌아다녀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따릉이를 타고 집 주변 크고 작은 공원들을 돌아보았다. 공원마다 조금씩 느낌들이 다 달랐고, 동네 마다도 그 분위기가 다 달랐다. 대치동 쪽 공원은 수풀이 울창했고, 청담 쪽 공원은 (나의 편견 때문인지) 공원에 심어진 꽃마저 으리으리했다. 여름이었고, 이렇게 다니다간 쪄 죽겠다 싶어 나는 부모님을 꼬셨다. 아... 나의 부모님은 전생에 무슨 잘못으로 나의 부모님으로 태어난 것인가.... 응? 쓰다 보니 이상하다. 그래. 부모님이 나를 낳으셨으니 이건 부모님 잘못인 거니까 많이 죄송해하지 말아야겠다... 는 이상한 논리를 끼워 맞추며 아빠가 운전하시고, 엄마는 조수석에서 나와 대화상대를 해주시면서, 나는 차에서 탔다 내렸다 하면서 공원들을 돌아봤다.
그렇게 공원들을 계속 돌아보는데 답답하기만 했다. 아니 이렇게 해서 정할 수 있는 거 맞아? 이 방법이 아니라 다른 방법이 있는 거 아닐까? 세상에 만들어지는 수많은 영화의 수백 개 로케이션을 다들 어떻게 정하는 거야? 싶을 만큼 답답했다. 시간은 째깍째깍 흐르는데 아무 진전도 없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렇게 공원들을 돌아보는 시간이 여러 아이디어들이 떠오르고, 내가 모르겠었던 '뭔가'를 점점 구체화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공원에서 열심히 운동기구로 운동하는 어르신들을 보며 운동기구 액션 장면도 생각하게 되고(비롯 액션 콘티를 그리면서 그 장면은 다시 빠지게 됐지만), 공원의 규모감도 더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게 청량리 근처의 간데메 공원으로 결정을 하게 됐다.
그런데 결정이 됐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이제부터 시작인 것인데 촬영 허가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촬영 허가는 당시 지팡이소녀의 피디였던 J언니가 진행했는데 빠르게 공문을 보내는 등 진행을 시켜주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는데 서울시 공원과(? 정확한 명칭은 기억이 안 나지만 뭐 다 지역마다 나뉘어서 담당 지역의 공원 담당부서들이 다 있더라 아주 신기했다는... 여하튼) 그 담당 부서 담당자님이 이틀만 촬영을 하라고 허가를 해주신 것이었다.
우리 시나리오 분량상 공원에서 상당히 많은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에 이틀은 너무 짧아서 아무리 시나리오를 줄이고, 고친다 해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애걸복걸하며 계속 부탁하고 빌었지만 담당자님이 아주 완강하셨다. 도대체 왜 이틀만인지 여쭤보자 당시 그 공원 한쪽 구석을 늘 차지하고 있는 노숙자 어르신들이 계신데, 그분들과 충돌할 가능성이 있고 문제를 최대한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워낙 완강했고 더 이상의 조율은 없다는 태도셨다. 결국 피디 언니는 주요 장면들을 이틀간 여기서 찍고, 액션 장면은 다른 근처 비슷한 공원으로 장소를 옮겨서 촬영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에 펄쩍 뛰었다. 간데메 공원으로 결정하고 난 후 얼마나 많은 그림들을 이 공원에 맞춰서 그려왔는데, 콘티도 이렇게 저렇게 생각했는데 여기서 다 찍지를 못한다니? 당시 나에게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큰 일이었다. 안 돼도 되게 할 방법을 찾아내고야 말겠다! 는 결심을 했다. 여태 이메일로만 이야기를 나눴으니 직접 찾아가서 말을 해보면 어떨까 싶었다. 결국 의견이 맞지 않아 피디 언니와 대립을 한 후, 나 혼자 공원 담당자라도 직접 찾아가야겠다 결심했다. 그래도 안 되면 어쩔 수 없지만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하지 않나 싶었다. 가기 전 날, 구구절절 진심을 담은 손 편지를 썼다. 당시 공원 담당 기관은 남산 근처 어딘가 고가도로 밑쪽에 있었다. 걸어갈만한 곳이 아니었는데 차들이 씽씽 달리던 고가도로를 비장한 마음으로 걸었다. 굴따리를 넘어가자 건물이 나타났다.
무작정 들어가서 보이는 사람에게 땡땡 담당 계장님을 뵈러 왔다고 했는데 점심시간이라 휴게실에서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기다리면서 심호흡을 계속했다. 1시간쯤 기다리자 계장님이 오셨는데 나를 보자 약간 화를 내셨다. 이런데까지 찾아와서 부탁을 하면 어떡하냐고. 그런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곤란하게 만드냐고 하셨는데... 너무나 다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죄인처럼 죄송하다는 말만 했다. 그러자 계장님이 한참을 이런저런 문제들을 얘기하셔서 열심히 들었다. 그렇게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듣고 있으니 "하... 왜 거기서 꼭 그렇게 해야 하는데요?" 하고 물으셨고 나는 주절주절 꼭 여기서 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드렸다. 그리고 편지도 써왔다고 드렸는데 참... 너무 곤란하고 화도 나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한다고 되는 게 아닌데 하는 표정들이 계장님 얼굴에 쓰여 있었다.
내가 뻔뻔하게 남의 기분과 감정은 읽지 않고 내 주장만 하는 파렴치한이면 나도 편하고, 계장님도 나를 대놓고 욕하고 쫓아낼 수 있으니 좋을 텐데 나는 꽤나 상대방의 감정과 기분을 잘 읽는 사람이다(내 주관적 생각일 뿐이지만). 그러다 보니 이렇게 이기적이게 행동하고 있는 나 스스로도 너무 괴롭고, 나 때문에 괴로우신 계장님을 보니 또 괴롭고... 그런데 당시의 나에게는 이건 거의 뭐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 그래서 계속 죄인처럼 있다 보니 계장님이 편지를 읽으셨고 깊은 한숨과 함께 하루만 더 촬영을 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기간을 늘려주셨다. 하... 너무나 죄송하고 또 죄송하고 감사한데 죄송합니다.. 였다. (그 후 무사히 촬영을 마치고, 편집을 하며 계장님께 감사 문자를 드렸고, 계장님도 영화 대박나라며 응원의 답장을 보내주셔서 훈훈한 결말을 내긴 했다)
그렇게 하루 더 촬영을 허가받았는데 피디 언니는 그동안 다른 공원 장소들을 열심히 물색하며 돌아다니고 사진으로 추천 장소들을 보내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실 내가 피디 언니와 의견 대립을 하면서 이렇게 계장님을 괴롭힌 것은 다 내 욕심이었다. 피디 언니 말대로 다른 공원에서 장면들을 찍어도 아무 문제없었을 거란 걸 나는 영화를 다 찍고 나서 알게 됐다. 실제 공간을 알고 있는 나는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어도, 영화적으로 잘 속여 넘기면서 찍기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의 나는 아무리 속일 수 있다 해도 공원이 달라지면 나무들의 사이즈도, 벤치의 모양도, 이것저것이 다 너무 다르게만 느껴져서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최대한 이 공원에서 다 찍어버리고 싶었다. 공원이라는 장소가 나뉘면 스태프들이 다 이동해야 하고, 그러면 또 시간이 걸리고, 안 그래도 찍을 컷은 많고 회차는 제한적인데 여러 가지 면에서 비효율적인 게 많았기 때문도 있다.
그러나 한 번은 장소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애걸복걸해서 받아낸 공원 촬영 가능 날짜가 삼일 뿐이었던 것도 있었고, 또 다른 이유는 피디 언니가 너무 멋진 장소를 찾아줬기 때문이다. 당시 언니는 내가 마음에 들어 할 만한 공원들을 찾으러 다녔는데 청량리 공원에서 더 위쪽으로 많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공원이 하늘에 반짝반짝 조명을 달아놓은 것을 발견했다. 내가 좋아할 것 같았다며 보여주는데... 너무 예뻤다...! 공원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에 집착하면서 개진상 연출처럼 까다롭게 굴던 주제에 나놈은 (개연성을 무시하고) 액션은 여기다! 하고 너무나 쉽게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결정된 공원의 반짝이는 하늘 조명은 CG돈을 굳히면서도 영화의 톤을 더 살려주었고 액션 장면을 더 판타지적으로 만들어주었다. 생각해 보니 피디 언니에게 이에 대해 고맙다고 정식으로 말을 한 적이 없다. 당시 이런 식의 소소하게 부딪혔다 풀어졌다 하는 것들이 많았는데 그 감정들을 하나하나 풀고 넘어갈 정도로 시간이 여유롭기는커녕 휘몰아치는 태풍 속에서 계속 싸움을 했어야 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말하고 싶다. 여러모로 고마웠습니다 피디님!
로케이션을 하나 둘 확정하면서 동시에 아주 많은 그 외의 중요한 것들도 해야 했다. 아역이 많이 등장했기에(거의 아역이었기에) 오디션을 엄청 많이 봤다. 단편을 몇 번 찍어 봤음에도 나는 오디션 때 무엇을 어떻게 봐야 하는 걸까... 하는 고민을 계속해오고 있었다. 내가 연기에 대해 뭘 안다고... 연기를 잘한다는 게 무엇일까? 나는 이걸 왜 모르지? 하는 고민도 많이 했다. 정말 연출로서 신뢰도 확 떨어지는 소리다. 1천만 원이나 들여 30분짜리 단편을 찍겠다는 연출이 연기를 잘한다는 게 무엇인지를 모른다고? 그러게나 말이다(장편까지 찍고 난 지금은 조금 더 알게 됐나, 하면 연기에 대한 나만의 기준이 생긴 것 같긴 하다. 이에 대해선 이후에 장편 이야기를 할 때 더 얘기해 보겠다).
여하튼 그래서 고민 끝에 내가 제일 신경 쓰기로 한 부분은 배우들끼리의 캐미와 이미지였다. 내가 상상했던 이미지와 부합한 외형의 배우인지. 그리고 함께 붙여놨을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를 많이 봤다. 나중에 최종 결정을 하기 전에는 컴퓨터 바탕화면에 오디션 보고 난 각자의 사진들을 띄워놓고 대여섯 명의 캐릭터들을 이리저리 조합해 보면서 계속 쳐다보고 있기도 했다. 6살 꼬마 아역의 경우는 대사를 잘 외우는지가 가장 우선이었다. 아역 배우들은 많이 보다 보니 울라고 할 때 울고, 외운 대사를 힘차게 말할 줄 아는 것, 집중력이 얼마나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주연 배우였던 이채은 배우의 경우 그 나이대 여자 배우 풀 자체가 적었다. 그래서 계속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여기저기 아역 배우들의 영상들을 살펴보다가 이 배우의 사진을 보게 됐는데 외모가 가장 내가 상상했던 느낌에 부합했었다. 그래서 매니지먼트로 연락을 했고, 빠르게 답장이 와서 오디션을 봤는데 무엇보다도 이 배우는 몸을 너무 잘 썼다. 춤을 출 수 있다고 해서 춤을 춰보라 했는데 움직일 때 선이 너무 예뻤다. 우리 영화는 액션을 하니까 몸을 잘 써야 하기도 하는데 춤추듯이 액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할머니 역할은 이 영화에서 사실 가장 중요했는데 당시 아카데미 외부 교수님이셨던 피디님이 너무 감사하게도 성병숙 선배님과 컨택을 해주셨고 시나리오를 좋게 봐주셔서 함께 하게 되었다.
나는 원래 성격이 즉흥적인 편이다(MBTI P다). 나에게 계획이란, 바꾸기 위해 있는 것이다. 계획을 세워놔 봤자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계획이 다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리를 하는 기간 동안만큼은 정말 슈퍼 J, 계획형 인간이 되어 매번 점검하고 또 하고 해야 했다. 하나라도 뭔가 빼먹거나 안 챙겼다가는 그대로 영화에 대왕 구멍이 나기 때문이다. 특히 단편이기도 하고, 모두가 아직 경험이 많지 않다 보니 연출인 내가 더 집착하면서 확인을 하고 또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항상 불안에 떨어야 했다. 분명히 뭔가 놓치고 있는 게 있지 않을까, 뭔가 준비를 해야 하는데 지금 몰라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계속해야 했다. 이 불안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정말 나처럼 둔하고 세상 온화(?)하고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다 하면서 살아온 사람이 강박증에 걸리고 공황장애에 걸리기까지 할 정도니 말이다. 그렇게 매일을 불안에 떨며 살다 보니 오히려 좀 더 오버해서 준비하게 되는 것들도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액션 연습이었다.
분명히 꽁지머리 교수님이 액션은 다 무술감독한테 맡기면 되니 편하다고 하셨는데... 개이득이라고 생각해서 그것만을 믿었는데... 막상 해보니 전혀 편한 게 아니었다! 왜냐면 내가 액션을 짜지만 않는다 뿐이지 남(무술감독님)을 열심히 일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연출의 일은 이게 전부다. 배우와 스태프, 그중 특히 헤드급 감독들을 (당근을 주든 채찍질을 하든 어떤 방식으로든) 열일하게 만드는 것. ‘나만 열심히 하면 되지’는 연출의 덕목이 아닐 뿐 아니라 나 혼자만 열심히 해서는 영화를 절대 만들 수가 없다. 그래서 영화가 종합 예술이고 공동 작업인 것이겠지. 나는 정말 '나만 열심히 하면 되지'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연출이라는 직업과 맞지 않는 성향인 것이다(이럴 수가... 사실 그래서 지금도 고민 중이다. 이 직업이 과연 나에게 맞는가...)
여튼 무술 감독님은 베스트 스턴트의 무감님이셨는데 당시 노량이었나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상업 영화 지방 촬영이 계속 있으셨다. 그래서 만날 수 있는 날짜도 제한되어 있었는데 나는 액션 콘티가 빨리 나와야 배우들이 액션 연습을 할 것 같아서 속으로 엄청 초조했다. 그래서 귀찮으시겠지만 자꾸 연락을 드리고 액션 레퍼런스들을 찾아 링크를 보내는 척하면서 액션 콘티가 언제 나올지 여쭙는 등 나름 열심히 무감님을 쪼아댔다. 아마 상당히 귀찮으셨을 거다.
마침내 액션 콘티가 나왔고, 연습이 시작됐는데 우리 배우들은 연습을 어마어마하게 했다. 당시 학생 배우들도 액션을 잘하고자 하는 열정들이 컸는데 그들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할머니 역의 성 선배님이 너무 열심이셨다. 처음에는 본인이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셨는데 걱정이 무색하게 너무나 훌륭하게 동작들을 익혀나가셨다. 게다가 선배님은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너무 즐겁다고 좋아하셨는데 정말 순수한 소녀 같은 모습을 가지고 계셨다(그런 모습이 치매 연기를 할 때 너무 잘 드러났다). 초반 몇 번은 나도 함께 사무실에 가서 액션 연습 하는 것을 보고 그랬는데 나중에는 배우들만 시간 날 때마다 가서 연습을 했다. 다들 어찌나 열심히 연습을 했는지 나중에 무감님이 그러셨다. 무슨 단편 영화를 이렇게들 열심히 하냐고... 그러게나 말이에요.. 허허.. 하고 웃었지만 속으로는 너무나 감사합니다 배우님들 하고 속으로 몇 번이고 절을 해댔다.
그렇게 액션을 열심히 준비하면서 나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쉬운 것이 있었는데 그건 사실 액션이 너무 멋있다는 것이었다. 멋진 액션, 너무나 훌륭하다. 멋진 액션을 볼 때의 쾌감도 나는 좋아한다. 그런데 나는 병맛이 좀 더 취향인가 보다. 나는 주성치를 사랑한다. 성룡도 좋아하지만 주성치가 나에게는 최고다. 그래서 나는 좀 더 지형지물을 이용한 액션이라던가 조금 더 병맛스러운... 운동기구를 이용한 노인 액션 같은 것들을 하고 싶었다. 지금의 액션은 정말 멋진데... 뭔~가 아쉽단 말이지... 그런데 또 사람 맘이 멋지니까 좋더라. 멋지면 폼나고 좋잖아~
그렇게 촬영이 진행됐는데 꽁지머리 교수님이 액션은 무술감독이 할 거라 개꿀이라고 하신 이유를 알겠더라. 정말로 무감님과 촬영감독이 둘이 척척 죽을 맞추며 너무나 빠르게 휙휙 찍어대는 것이었다. 액션이다 보니 배우들의 연기나 감정선도 크게 중요하지 않고 일단 합을 맞추는 동작들이 중요해서 나도 연기 관련으로 크게 할 것이 없었다. 오- 이거 개꿀인데? 액션신을 찍을 때는 약간 쉬면서 구경하는 느낌까지 날 정도(… 면 안 되는 것 같긴 하지만) 여튼 그럴 정도였다. 특히 감탄을 한 부분은 촬영감독의 영특함과 빠릿빠릿함이었는데 촬영감독 친구뿐 아니라 당시 이 친구가 데려온 촬영팀이 촬감과 항상 같이 했던 친구들이었는데 정말 초고속으로 컷들을 준비하고 따면서 합이 너무 잘 맞았다. 촬영 세팅 하는데 시간도 안 잡아먹어서 오히려 내가 시간을 지체시켰다. 수많은 액션 컷들을 소화 못한 나는 여기서 저걸 찍나? 이번엔 이건가? 할 정도였던 것이다. 그렇게 내가 컷 순서가 헷갈리고 어리버리 하면서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촬영이 진행되었다.
근데 그러다 보니 혼란을 좀 겪었다. 이 액션이 내가 원했던 액션이 맞나에 대한 불안함이었다. 이 멋진 액션에 내가 좋아하는 병맛 분위기를 어떻게 약간만 후추처럼 뿌릴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최대한 할머니의 춤과 액션을 섞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당시에는 액션 시작 전, 전동차를 타고 지나가는 할아버지 덕분에 흐름이 끊기고, 그 할배의 라디오에서 나오는 흥겨운 음악에 할머니가 갑자기 둠칫둠칫 리듬을 타고, 그러다 다시 액션을 하고... 이런 장면을 집어넣어 촬영을 했다. 극의 리듬감이 깨지는 건 아닌지, 전체적으로 호흡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 이게 정말 맞는지, 스태프들이 의아해하기도 했고 불안을 표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나는 외치고 싶었다. 아씨ㅂㅏ나도모르겠다!!!! 코미디 어떻게 하는 건데!!!! 정말 불안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 이거 오케이인가? 이거 맞나? 감독님 오케이에요? 물어보는데 나야말로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다. 이거 오케이 맞나요?
이후 편집을 하면서도 교수님들이랑 동기들이 그 장면에 어처구니없는 코웃음+헛웃음을 쳤다. 나 역시 좀 부끄러워하며 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꿋꿋이 그 장면을 놔뒀다. 누가 뭐래도... 나는 그 장면이 좋았다. 나는 그런 b급을 너무 좋아하니까. 그러나 이후 액션 장면이 또 너무 멋졌다. 여전히 b급 감성이 부족한 것 같아 지옥 같은 추가 촬영을 진행해야겠다 다짐할 수밖에 없었다. 피디언니와 촬영감독은 추가 촬영을 하지 말자고 주장했기에 또 의견 충돌이 있었지만 이기적인 나는 계속 우겼다... 액션에 조금이라도 춤 같은 느낌을 더 넣고 싶었기 때문이다.
할머니 치마와 신발을 내가 신고, 카메라를 직접 들고는 시점샷으로 리듬 타는 발을 찍었다. 영화 중간 할머니의 리듬 타는 발이 나오는 때가 있는데 그게 바로 추가 촬영 샷이다. 와... 발이 어떻게 리듬을 타면 좋겠다고 배우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고, 촬영을 이렇게 하면 좋겠다고 설명할 필요 없이 내가 다 하고 있으니 어찌나 속이 뻥뻥 뚫리던지! 무슨 고속도로를 시속 200km로 밟는 느낌이었다. 이래서 연출이 배우도 하고, 촬영도 하고 그러나 싶은 감정을 잠깐 맛봤다. 그리고 영화 거의 마지막 액션에서 보면 주인공 민서가 마지막 타격을 가하기 전, 갑자기 이상한 춤을 춘다. 이것도 추가촬영으로 넣은 샷인데 그 장면 역시 어처구니없어하며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그 장면도 좋아한다. 메롱! 내 영화 내 맘이다 이 사람들아!!! (라고 이곳에서 만큼은 당당하게 외쳐본다 으흐흐)
그렇게 포기할 수 없었던 것들이 있었는가 하면, 어쩔 수 없이 포기해 버렸고 포기했기에 너무나 아쉬웠던 것도 있는데 그게 바로 유머다. 계속 말하고 있지만 나는 멋진 느낌보다는 코믹한 병맛을 좋아하는데 그건 정말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겠다(이미 지팡이소녀를 어느 정도 병맛으로 보신 분들이 있다면 감사합니다만… 저는 주성치급을 좋아하기에… 제가 느끼기에 전혀 병맛스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건, 이 병맛이라는 내 취향은 장편 시나리오를 쓸 때도 지속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확실히 감을 잡지는 못한 것 같다. 내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는 느낌은 병맛인데 시나리오를 읽는 사람들은 그 정도의 병맛으로 못 느끼기 때문이다. 결국 내 머릿속 상상과 실제 시나리오로 쓰이는 문장들 사이에 어떤 갭이 있다는 것인데 이 부분은 이번 장편영화 경험까지 총체적으로다가 고민하면서 좀 더 연구해봐야 할 것 같다.
여튼 그렇게 여러 난관들을 헤치며… 촬영을 준비했고 정신줄을 놓고 닥치는 대로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영화를 찍었다. 지금 글로 쓴 것은 촬영을 끝내기까지 수백 가지 문제와 고민, 선택의 기로 속 몇 가지 큰 예시이자 빙산의 일각일 뿐인데 이것들을 다 쓰기란 정말 불가능하기 때문에… 포기다. 아하하. 촬영은 6회차+추촬 1회 차였나… 기억이 가물가물하구먼… 그렇게 소중한 촬영본들을 외장하드에 착착 쌓은 채 드디어 편집과 후반작업을 하기 위해 다시 부산 아카데미로 내려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