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29
이어폰을 두고 나왔다. 걸음을 멈추고 감은 두 눈 앞엔, 책상 오른편 이어폰의 자리가 또렷이 그려진다. 다시 되돌아가기도, 무시하고 가기도 애매한 거리. 다이소에 걸린 이어폰 위에 5천원이라는 가격표가 붙어있다. 5천원이면 하루종일 귀가 허전할 것을 면할 값으로 나쁘지 않다는 생각으로 한참을 들여다보다, 책상위에서 모처럼 만의 휴무를 누릴 놈의 금액이 이번달에 빠져나간 돈이란 생각이 들어 시선과 마음을 한번에 접었다. 덕분에 오늘 내 휴대폰은 작은 무성영화관이 되었다. 소리없는 영상들을 상영해야했으니까. 평소처럼 sns앱을 켠다. 오래 지나지 않아, 휴대폰을 바라보는 스스로에게 생경한 기분을 느꼈다. 무언가 어제와 달랐다. 어제까진 모든 신경이 휴대폰에 집중되어, 바깥 세상이 어떠했는지는 관심을 가지지도, 기억을 하려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의 불찰과 함께 자유를 얻게된 청각으로 인해, 나의 의식과 휴대폰 사이에는 청각의 힘 만큼의 거리가 생긴다. 소리없이는 게임하는 것도 재미없다던 친구의 말이 기억에 스친다. 음악없이 이 글에 집중하고 있을 읽는이에게도 고마움과 존경을 표한다. 소리가 의식에 미치는 힘이 나의 생각보다 더 크다는 생각을 했다.
(전략)
거울 속에는 무게가 없는 것 같다
여러 풍경을 못하나로 들고 있는 거울
우울씨는 거울 속으로 들어간다
육감중 오감이 살해되는 시각 만의 세계
(후략)
(함민복, [우울씨의 일일] 중)
이 시에서 참신함을 느낀 이유는 우리는 보통 거울 속 세계를 상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그대로 새로운 시각이기에 참신함을 느낀다. 물론 이 참신함이 나에게 국한된 것일 수 있다. 거울 속 세상을 통해, 현실에서 만나기 어려운 세상을 표현하거나, 강조하고 싶을 때 이미 몇몇 작품에 사용되었다는 점에서는 클리셰라고 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작품에서 만나는 경우를 제외하고, 우리의 일상에서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세상은 아니다. 거울속 자신의 얼굴을 보며, 실제 나와 거울 속 나를 헷갈려 거울을 만지려 든다거나, 거울의 나와 실제의 나는 다르다며 거울에 비치는 나를 무시하려 들진 않는다. 우리는 벽에 걸린 거울 속에 맺힌 상이 현실의 투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리없는 휴대폰 속 미디어는 내게 거울과 같았다.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게 했다. 그말은, 청각과 시각이 매여있던 어제의 나는 미디어 속에 살아있었다고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오감중 하나를 차지하는 것으로는 부족할지 몰라도 두개 이상, 복수의 개수를 차지한다면, 쉽게 우리는 그 세계와 현실의 경계를 잊게된다. 나머지 육감의 일부가 ‘살해된’ 채로 사는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한다. 우리의 세계는 우리의 언어 만큼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만큼 우리는 세계를 인지한다.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들은 우리가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하는 말이기도하다. 타자없이는 자아를 규정할 수 없다. 빛이 없다면 어둠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말로 대상을 제한한다. 기표로서의 언어는 기의로서의 언어에 미달할 수 밖에 없다. 가령 우리가 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순간 우리는 어떠한 그림을 창작할 수 있지만, 다른 도구를 사용하여 그릴 수 있는 가능성은 차단된다. 표현하는 순간, 우리의 표현은 제한되는 것이다. 재밌는 점은, 이런 제한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창작도, 표현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우리 존재로 확장한 철학자가 블랑쇼이다.
죽음으로 존재에 이른다. 거기에 인간의 찢긴 상처가, 인간의 불행한 운명의 근원이 있다. 왜냐하면 인간을 거쳐, 인간으로 인해 존재에 죽음이 오게 되고, 의미는 무 위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저서 [불의 몫] 중)
다른 존재와 인간을 구별하는 척도 중 하나인 상상력은 언어를 통해 구체화된다. 이 언어를 작동시켜 대상을 표현한다는 것은 존재를 제한한다는 것이고, 제한한다는 것은 그것의 생명력을 죽인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을 영원히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기록, 혹은 표현없이 우리의 상상력을 보존할 수 없다. 블랑쇼의 냉소적인 고찰은 인간의 이 모든 의미활동이 무위에 놓여져 있다고 이야기한다. 어떤 의미활동도 존재 본질에 다가설 수 없고, 그것의 제한된 일부의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김춘수, 꽃)
김춘수는 [꽃]을 통해, 언어와 존재사이의 긴장상태에 주목했다. 언어로 그 기표를 만들어준 대상을 불렀을 때, 그 존재가 우리에게 와닿는다고 설명한다. 언어가 그 대상의 전부를 표현할 수 없을 지언정, 그 행위를 통해서만 그 대상의 존재가 유의미해진다는 것이다.
“평과나무 소독이 있어
포기새끼가 드물다는 몇 날 후인
어느 날이 되었다.
(중략)
구름 덩어리 얕은 언저리
식물이 풍기어 오는 유리 온실이 있는
언덕 쪽을 향하여 갔다
안쪽과 주위라면 아무런
기척이 없고 무변하였다.
안쪽 흑바닥에는
떡갈나무 잎사귀들의 언저리와 뿌롱드 빛갈의 과실들이 평탄하게 가득 차 있었다.
몇개째를 집어보아도 놓였던 자리가
썩어있지 않으면 벌레가 먹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 것도 집기만 하면 썩어갔다.
거기를 지킨다는 사람이 들어와
내가 하려던 말을 빼앗듯이 말했다.
당신 아닌 사람이 집으면 그럴 리가 없다고…….
(김종삼, 원정 중)
김종삼도 유사한 긴장에 주목한다. 떨어진 평과들의 모습은 유토피아적이다.(이경수 문학평론가, <현대시학> 2017년 4월호, ‘숨은 명시 찾기’ 중 ) 그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순수 그 자체이다. 이 공간은 그 자체로 완성이다. 시적 주체의 개입을 거부한다. 화자가 다가가 손을 대었을 때, 그것은 썩거나 벌레먹은 모습이 되었다. 블랑쇼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표현의 시도도 그 원본을 제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김춘수는 시적 대상을 표현하지 않으면 그 존재의 의미를 불러 올 수 없는 한계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는 듯하고, 김종원은 표현하면 제한되고 훼손될 수 밖에 없는 명제 앞에 무력한 듯 보인다.(강신주,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11장 글쓰기와 존재의 관계,246p 참고)
서두에 언급한 이어폰 없는 하루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오감 중 몇 개만을 사용한 미디어에 쉽게 실제와의 경계를 허문다. 보통은 의식하지 않기 때문이겠고, 자극적이기 때문이겠다. 일부의 감각만으로 표현했을 지언정, ‘표현’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제한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에게 김종삼이 의미있는 이유는 오감이 모두 살아있는 ‘현실’과 오감의 일부를 자극하여 드러나는 ‘표현’들, 즉 ‘미디어’ 사이의 차이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놓치고 있지만 중요한 부분인 바로 그, 차이에. 우리는 ‘주로’ 머무는 곳을 ‘주’거지라고 부른다. 우리가 오감중 일부만을 사용하는 미디어에 ‘주’자를 붙인다면, 우리의 실제는 빛을 바라게 될 것이고, 우리의 오감은 ‘살해된’채 적응될 것이다. 시각을 잃은 사람은 주로 청각에 의지하게 되고 그들의 청각은 상대적으로 더 발달한다. 우리가 이 차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오감이 일부에 치중하게되어 일종의 퇴화와 진화를 겪게 될지 모른다. 그건 굉장히 아쉬운일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유토피아를 표현하려 한들, 유토피아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이어폰을 두고온 오늘이 다행히도 무료하지 않았던 것은 그 상실이 두려웠기 때문이겠다.
전규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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