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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규섭 Feb 02. 2022

[작가가 만난, 배우가 만든 A] 기획의도



2021년 N개의 서울 - [작가가 만난, 배우가 만든 A]의 출판물에 수록한 기획의도 전문입니다.










과문한 식견 탓에 예술에 대해서라면 한 글자 적어 내기에도 부족하지만, 졸작 몇 편을 겨우 세상에 내어놓으며 갖게 된 작은 생각들이 있다.


“예술가들의 슬픔은 어느 순간에 찾아올까.”


슬픔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누군가에겐 생뚱맞게 느껴질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슬픔 자체가 예술가들의 업이라 생각하는 나는 이 질문을 적으면서도 ‘언제라고 할 게 있을까. 늘이라면 늘이겠지.’라고 생각을 했다. 충분한 설명을 위해서는 많은 단어들이 필요하겠지만, 슬픔은 모든 예술의 재료이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 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그럴 대, 인간은 심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이다.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 싫고 ,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함에 진저리 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28p)





문학을 단순히 이성과 감성의 이분에 후자에 속하는 장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사실 나도 꽤 오래 그렇게 생각해왔던 것 같다. 모든 이분법이 그렇지만 그 기준은 어떤 질문에도 적절하기가 어렵다. 내게 문학이 큰 의미를 가지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문학이 삶을 포착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때 주로 포착되는 부분은 슬픔인 경우가 많다. 이 책을 통해 문학공부와 슬픔을 공부하는 것, 그리고 삶을 공부하는 것의 유사함을 알게 되었다.



몇 해 전, 신형철님의 책을 읽고 적은 후기의 일부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슬픔에 대한 공부는 우리가 사랑하는, 살아가는 방법일 것이고, 끊임없이 공부해야 도달할 수 있는 학습의 영역일 것이다. 세상의 다양한 예술 분야들이 이를 돕는다. 혁명이 가진 정치적인 이슈보다 사람의 살고 죽음에 관심을 가지고 ‘재난’이주는 슬픔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고자 했던 들라크루아, 삶의 모호함과 모순에 대해 고민하고 무엇을 사랑한 것인가 질문을 던진 보들레르 외 수많은 작가와 작품이 존재한다.



분야를 불문하고 예술에는 물리적 시간을 필요로 한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곡을 쓸 때에도, 지금과 같이 단어 몇 자를 적는 일에도. 체로 거르고 거른 시간들을 돌아보고, 확인하고, 점검하고, (어떤 의미로는) 가공한다.  슬픔은 예술이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그 안에 있는 모래같이 수많은 과정 속 곳곳이 숨어 있는 사금(砂金)과 같다. 가만히 앉아 제각기 가지고 있는 체로 하루를 치다 보면, 하루를 채웠던 수많은 감정과 영감, 생각들이 가로와 세로로 얽혀있는 얇은 자기검열과, 체면과 같은 기준 사이를 빠져나간다.  수많은 고민의 시간이 만든 작은 금 조각은 예술가들이 보낸 하루의 결과이자 예술의 재료이다.


모든 예술분야의 결과는 각각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시간예술이기에, 물리적으로 보관할 수 없는 음악은 시각적 결과물을 낼 수 없고, 시각적 요소만 존재하는 미술은 시간을 담아낼 수 없다. 또 시각적이면서 시간의 흐름을 내포하는 영상은 미술품이 줄 수 있는, ‘정적인 작품이 주는 생동감’ 이라는 아이러니를 경험할 수 없다. 아무리 흰 도화지여도, 연필을, 파스텔을, 물감을 집어 들고 한 획을 긋는 순간, 동시에 그 획을 돌이킬 수 없는 ‘제한’이 생기게 된다. 모든 선택은 기회비용을 낳는다는 경제학의 기본 명제는 창작의 본질이기도 하다.


이 프로젝트는 이 예술이 가진, 아니 선택이라는 인간의 유한함이 필연적으로 만나는 슬픔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했다. 예술품이라는 ‘결과’에서는 한계를 마주할지라도, 그에 도달하는 과정으로서의 예술에선 이 한계를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프로젝트가 찾은 방법 중 하나는, 다양한 예술분야와의 협업이다. 각자가 가진 다른 색의 사금이 모여 빛을 내면 무지개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상상을 풀어가는 과정이다.


소설 작가와 배우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철저하게 서로의 영역이 분리되어있다. 미디어를 위한 작가와 배우라면 더욱 그렇다. 작가는 지문까지 삽입하여 배우가 연기해야할 몫을 구체적으로 요구하고, 배우는 이 요구를 수용한다. 기본적으로 작가에게 요구되는 내용은 배우가 연기할 ‘인물’(이 프로젝트에서는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이름을 A라고 가칭하며, 작가와 배우가 정한, 인물의 이름이 나오기 전까지는 A라고 통칭한다.)의 세계관, 대사, 배경 등 모든 것에 대한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 물론, 작가가 배우의 애드리브의 영역으로 대본을 비워두는 경우와, 배우의 애드리브로 장면이 새로운 재미를 드러내는 장면들이 여러 매체를 통해 나타나지만,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바는 아니다. 배우의 경우 확정된 인물을 만나게 되며, 이것이 배우가 직면하게 되는 ‘수동성’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연기가 가지고 있는, 드러낼 수 있는 다양한 면 보다는 요구된 것을 잘 이행하는 역할이 요구되는 것이다.


본 프로젝트에서는 이 과정의 시계열을 섞어보고자 했다. 배우와 작가가 인물의 초기설정단계에서부터 만나,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서로의 가치관, 연기관, 세계관 등을 공유하며 이 정보들이 A에 반영되길 바랬다. 배우의 의견과 작가의의견이 고루 반영된 인물의 모습을 기대했다. 이를 통해서, 작가는 자신이 100% 만들어낸 인물이, 정말 잘 작동하는지, 코딩을 완료한 엔지니어가 오류가 나타나는지 검사하는 듯한 마음에서 벗어나, A가 그 자체로 생동하고, 새로운 생명력을 갖고, 내가 알지 못했던 세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만날 것이라 기대했다. 배우가 해석한 A의 영역을 훨씬 더 넓히는 일인 것이다. 이를 통해 배우 또한 조금 더 인물에 대한 이해도를 높임으로서, 핍진한 연기를 가능하게 하여, 자신 있고 자신과 같은 역할을 연기하는 경험을 제공하고 싶었다.




전규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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