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04
새로운 해의 초입에 한 유튜버가 금연을 도전 과제로 내세웠다. 그러곤 이야기했다. 금연이란, 어떤 도전 중에서도 가장 손쉽게 성공할 수 있는 도전이다. 다른 것들은 성공을 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필요로 하기도 하고, 특별한 재능을 필요로 하기도 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성공하는 금연이란 가장 쉬운 도전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일리 있는 생각이라고 웃고 넘겼는데, 요 며칠 질문이 들었다. 새로운 상태, 특정 목적을 이루어 내야하는 과제가 쉬운 것일까, 현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과제가 쉬운 것일까? 무언가를 ‘해내는’ 것이 쉬운 것일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쉬운 것일까?
찬 공기와 긴장감이 가득했던 우크라이나 상공에 폭격의 플레어와 요란한 전투기소리가 겨우 남아있던 빈틈마저 채웠다. 견고한 건물과 같던 평화는 누군가의 결정에 의해 허망히, 일상의 터전과 함께 망설임없이 무너져 내렸다. 키이우, 하리코프를 포함한 주요 도시들이 하루가 다르게 제 원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국민들의 일상은 화염병을 만들어 저항하거나, 민간 시설을 약탈하는 군인을 피하는 일로 채워지고 있다.
이유를 막론하고 전범들은, 엄중히 단죄해야 할 것이다. 전범이란 ‘전쟁 중에 제네바 협약이나 전투 법규를 위반한 자’를 의미한다. 광의적으로는 ‘평화에 대한 죄와 인도에 대한 죄를 범한 자’까지 포함한다. 어떤 국가에 속해 전쟁에 임했는지 여부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전쟁에 임했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사실, 여러 이해관계가 설킨 상황에서 어떤 이념을 들어서 누군가를 옹호하거나 질책하는 일은 늘 망설여지는 일이다. 어떤 사고에서도, 100대 0이란 희박하니까. 하지만, 이해관계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들과 존엄을 침해하게 될 때에는 다른 국면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너와 내가 접촉 사고의 책임 비율을 논할 순 있지만, 그것이 서로의 자유나, 생명을 해할 당위가 될 수 없는 것이니까. 어제 자(22.03.03)로 푸틴은 전범으로 국제 형사재판소에 공식으로 회부되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습은 현재 진행 중임에도 다양한 화두 거리를 던져준다. ‘자국의 이익 여부를 셈한 뒤 우크라이나를 도울지 여부를 결정한 서방국가들’과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가 도입되자 자국 정부를 비판하기 나선 러시아 국적 기업들’에 대한 옹호 혹은 비판을 할 수 있다. 그리고 타국에서 우크라이나 군인과 정부를 위한 후원에 있어, ‘어떤 견해의 생각을 가지고 임해야 하는가’ 혹은 ‘임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겠다. 이 두 주제는 차이가 있는데, 의사 결정의 주체가 국가와 개인과 같은 단체의 성격인지, 개인인지의 여부에 따라 다르겠다. 이는 이해관계의 총합을 어떻게 다루느냐로 이어질 수 있고, 공리주의와 정의론에 기반한 다양한 의견을 떠올릴 수 있겠다.
다양한 화두 중에서 나에게 방점이 찍힌 질문은 평화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한 것이다. 평화를 지키는 일은 금연에 도전하는 일과 같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의 유지라고 보아야 할까? 생각해보면, 평화는 임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언젠가 평화에 도달한 후, ‘이제는 평화가 왔습니다. 앞으로 5년간 평화는 유지됩니다’라고 할 수 없다. 평화라는 단어는 매 순간마다 평화의 상황인지 아닌지 확인을 해야하는, 당시의 상태를 나타내는 현재적(現在的)인 개념이다. 그렇다면 금연과의 유비추리로 돌아가보자. 만약, 현 상태를 유지하는 과제가, 무언가를 해내는 과제보다 쉬운 것이라면 현 상태를 유지하고자하는, 관성이 크게 작동하는 개념일 것이다. 금연에 대한 대답은 비교적 간단하다. 금연이란 개인차에 따라 가능 여부가 분명히 다르고, 일정 기간 금단현상을 버티면 피지 않는 상태의 관성 또한 적당히 발휘되므로, 피던 상태에서 안 피는 상태로 옮겨가는 과정에서의 관성을 버텨내면 달성할 수 있는 일이다.
함께 하나의 생각을 더 나눠보고 싶다.
‘어둠으로 가득 찬’ 이라는 표현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는가. 과연 어둠은 가득 찰 수 있는 것일까? 어둠은 빛의 부재이다. 그렇다면, ‘어둠으로 가득 찬’이라는 어구의 뜻은, ‘빛의 부재로 가득 찬’ 일 것이다. '-'와 '-'의 곱은 '+'이니 언듯 보면 가능하지 않은가 싶지만, 형이상학적으로 존재할 뿐, 그 ‘가득 참’은 실재할 수 없다.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암흑물질’**에 대한 논의와 혼동하지 않기를! 암흑 물질은 어둠이 아닌 ‘물질’이니까.)
우리의 일상은 다양한 평화와 폭력으로 섞여있다. 국가적인 관점에서 외부의 침략이 없다면 평화롭다고 할 수 있겠지만, 개인의 삶에 찾아오는 많은 갈등과 조정의 실존을 ‘외부의 침략이 없으니 평화다’라고 본다면 보편성이 가져오는 오류일 것이다. 나에게는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이 없어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는 간사한 마음이나, 약간의 관성 덕에 보이지 않는 관성에 가려 평화가 기본값이라 여기는 태도는 지양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주변으로부터 이웃에게로 시선을 넓히고, 그 이웃의 범위를 개인마다 도달 가능한 영역까지 넓혀가며 그들의 삶을 위협하는 폭력의 산재(散在)를 감각해야한다. 동시에 무던히, 그 폭력의 그림자를 거둬내려 노력해야할 것이다. 무지의 베일을 상상하든, 공리주의적 관점이든, 제빵사의 노동이 자비가 아닌 사익임을 되뇌어서든*** 폭력의 부재의 상황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더불어 그 부재가 이 세상에 가득하기까지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관념적으로 이야기해 온 ‘평화 유지’의 본질일 것이니까.
고흐는 본인의 집을 노란색으로 칠하며, 비어있던 집에 해바라기 그림을 채웠다. 여러 아티스트들을 초대하며 함께 나아갈 공동체를 꿈꿨다. 고흐는 힘든 시기를 살아갈 힘은 연대라고 생각했었다. [주 사랑해요]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겠다는 고백을 담은 곡이다. 사회와 이념이 만드는 거대 담론이라는 바다엔 개인이 던질 수 있는 돌멩이의 파동은 미미하다 못해 그 힘은 0에 수렴한다. 하지만, 그 단위가 공동체로 모이고 공동체의 연합이 된다면, 여전히 작고 미미할지언정 한 사람의 최선의 노력 언저리라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노란집을 채운 해바라기는 공동체에 대한 염원이자, 연대와 화합의 상징이다.
더불어, 우크라이나의 국화이다.
* https://www.fnnews.com/news/202203031022365083
** https://www.mk.co.kr/news/it/view/2017/04/237259/
*** 애덤스미스는 우리가 맛있는 빵을 먹을 수 있는 이유는 제빵사의 자비 때문이 아니라, 제빵사가 추구하는 사익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이타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기적인 동기었을 지언정, 우리는 세상에 퍼져있는 폭력을 거둬내는데 힘을 쏟아야한다.
전규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