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16
코로롱으로 인한 슬기로운 격리생활 중 폭주하는 생산성으로 만들어진 여러 모임들 중, 유일하게 오래전에 참여하기로 했던 ‘법안 원문읽기 모임’을 온라인으로 진행했다. 많은 이야기와 생각들을 공유하느라 어느새 4시간이 훌쩍,, 법안 원문을 읽으며 들었던 질문들과 함께 생각해볼 이야기들을 나눴다.
차별에 대한 정의
차별을 이야기할 땐 차이를 떠올릴 수 밖에 없다. 우리에게 ‘차이’는 중립적으로 다가오고, ‘차별’은 부정적으로 다가온다. 실무노동용어사전에 나온 ‘차별’과 ‘차이’의 정의는
‘생산성이 같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집단(예를 들어 성, 인종, 혹은 출신지역)에 속하고 있다는 이유로 달리 대우를 받는 경우를 말하며 ‘차이’란 생산성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대우 면에서 단순히 집단 사이의 다름을 말한다. 따라서 ‘차이’는 ‘차별’에 의해서도 발생하지만 집단 간 생산성이 다름에 의해서도 발생한다. 이 때 생산성을 측정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므로 흔히 생산성을 여러 가지 인적자본 변수들의 함수로 보고 이러한 인적자본 변수들의 값을 비교한다.’ (실무노동용어사전)
내 단어로 정리해보면, 차별은 ‘외생변수의 내재화’로 생기는 현상이다. 어떤 상황에서의 다른 처우를 전혀 다른 맥락의 차이에서 그 이유를 찾을 때 우리는 차별이라고 여긴다. 예를 들어, 바이올린 연주자와 첼로연주자가 응당 같은 사례를 받을만한 공연을 마쳤다. 그런데 의뢰인이 바이올린 연주자의 헤어스타일이 장발이기 때문에 사례를 더 주겠다고 이야기한다고 해보자. 말도 안되는 예이지만, 우리가 마주한 차별은 이와 같은 맥락인 경우가 많다. 동일 노동에 대한 임금이 성별로 인해 달라진다거나, 첫째인 내가 한살차이 동생에 비해 용돈을 더 받는다거나 하는 상황이 차별의 예라고 볼 수 있다. (맞다,,나는 기득권층이다,, 동생에게 심심한 위로를,,전합니다,,) 헤어스타일의 차이를 헤어스타일의 차이로 보고, 첫째와 둘째의 구분을 첫째와 둘째의 구분으로 본다면, 그것은 말그대로 둘의 ‘차이점’ 중 하나 일 것이다. 즉, 다른 것은 ‘다르다’라고 말하는 것은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차별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더불어 눈치챈 독자도 있겠지만, 차별은 비단 ‘피해’를 입은 부분만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외생변수로 이유없는 혜택을 받는다면 그것도 차별의 일부라는 것이라는 사실 또한 인지해야한다. 내가 누리고 있는 차별적 혜택에 대해서는 눈 가리고, 내가 받는 피해만 주창하였을 때, 얼마나 설득력이 떨어지는 일일까 생각해보면 그 이유를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무지의 베일에 덮여있다고 가정하고, 최약자의 입장에서 제도나 처우를 바라봐야한다고 했던 롤즈의 목소리 들어볼 필요가 있다.
무엇이 법제화 되어야하는가
먼저 나는 법에 대해 그저 교양적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 차별금지법에 대해서도 수년에 걸치긴 하였지만 해당 키워드를 가진 기사를 발견할 때에만 관심을 갖고 읽어보았다는 점을 빌어, 과문한 사람의 주장이라고 여겨도 별수 없다는 점을 미리 말해야겠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우리 중 차별을 옹호하거나 동의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차별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이 차별금지법을 옹호한다는 말과 같은 말로 이해해야할까? 집단지성을 빌어 함께 법안을 읽어가면서 예외조항에 대한 질문이 들기도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어떤것인지 찾아보기도 하였다. 나는 차별금지법의 제정에 동의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법안을 읽어갈수록 ‘우리는 무엇을 법제화 하여야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자꾸 들었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고 이야기한다. 과하게 구체적인 법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도, 집행에 있어서 과한 행정력을 필요로 할 수도 있기 때문이겠고, 시민사회의 고양된 도덕수준이 법보다 강력히 서로를 연대할 것이라는 신뢰가 기반된 이야기이다. 더오랜 역사가 있을지 모르지만, 나의 시선이 닿은 최근 몇년간 사회를 흔들만한 굵직한 이슈가 등장하면 여지없이 법제화에 대한 논의를 요구하고, 진행하겠다는 정치인들의 목소리를 들어왔다. 아마 흉악범죄자가 상식선에 맞지 않는 적은 형을 살고 나왔다고 여기는 법감정이 고조되고, 이러한 민심의 영향을 받는 입법부 의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구조가 한 몫하지 않았을까 유추할 뿐이다.
앞서 차별에는 피해와 혜택을 모두 포괄하는 내용이라고 이야기했고, 이 법안이 ‘포괄적인 차별금지’를 다루고자하는 법안인데, 일단은 피해만을 집중하고 있다. 이것은 시시비비를 가릴 때 사용하고자하는 법률의 특징상 어쩔 수 없는 것일 것이다. 혜택까지 법으로 제한할 순 없는 것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이다. 맞다. 법안은 법의 집행을 위한 기준으로서의 역할을 위한 항목의 나열이다. 목적성이 뚜렷한 글이다.
‘차별’ 그 자체에 대해서라면 한없이 첨예하게, 예민하게 이야기하고, 우리의 태도와 기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지만, 우리가 다루는 텍스트가 ‘법안’이라는 점에서 다소 힘을 덜어내고, 회의적인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여전히 남은 질문이다. ‘법’은 어때야 하는가.
다양한 부분에서 많은 배움이 있는 모임이었다. 교양학점을 위한 수업에서 읽어본 민법을 지나 두번째로 눈에 힘주고 읽어본 ‘법’이라는 문법을 가진 글이었다. 인문학과 문학에서 더 나아가, 실제 우리 삶과 맞닿아 있지만, 한없이 멀게 느껴지는(,,,) 법과 조금 더 친해져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기도 하였고, 차별의 경험과 정의를 서로 공유하며 더 넓은 세계를 만날 수 있었다. 다음엔 어떤 법안을 읽게 되려나?
전규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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