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 아래 불규칙적이고 수수한 모습

초저녁의 자연스러운 감각

by 혜아


나는 그라사 또는 상 페드루 드 알칸타라에서 달빛 아래 고요한 도시의 불규칙적이고 장엄한 풍광을 내려다볼 때만큼의 감동을, 들판이나 자연을 볼 때에는 느끼지 못한다. -페르난두 페소아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는 '사실 없는 자서전'이라고 불린다. 사실 없는 자서전이란 무엇일까.

처음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건 전통적인 의미의 자서전과는 모순되는 이 독특한 소제목 때문이었다. 페소아는 헤테로님(Heteronym)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만들어 글을 썼는데, 단순히 필명을 다르게 한 것이 아니라 각 헤테로님마다 다른 인격, 세계관, 자아를 부여해 '독립된 작가'로서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중 <불안의 서>의 화자는 '베르나르두 수아레스'라는 리스본의 회계 사무원이다. 즉 수아레스는 페소아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지만 '자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라고 표현한 만큼 수아레스에 페소아 자신의 사유와 경험을 투영했다고 한다.


읽다 보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무엇이 상상인지 헷갈리는 시간이 찾아오지만 그가 서술한 리스본의 모든 풍경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여기 상 페드루 드 알칸타라 전망대에서 깨닫게 되었다.


그 아이는 공원에서 한참을 공을 차고 놀았다. 작고 예쁜 분수대를 주변으로 여러 개의 초록색 벤치가 있었는데 우리는 그중 하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노을이 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막 여름의 골목으로 들어선 리스본은 저녁 9시는 되어야 파란 하늘이 노릇노릇 구워지기 시작하는데, 그건 초저녁의 시간이 그만큼 길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맞은편 벤치에는 두 사람이 앉아 각자 책을 읽고 있었다. 지나가는 여행자는 아닌 것 같은데. 일을 마치고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일까? 페소아의 말을 빌려 이 불규칙하고 장엄한 풍광을 내려다볼 수 있는 동네에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생각했다. 그때 맞은편 두 사람 곁으로 한 여성이 다가와 말을 건다. 반가운 인사. 이윽고 그들의 대화는 쉬지 않고 이어진다.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전망대 뒤쪽, 수수하고 작은 공원은 동네 주민들의 사랑방 같은 곳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울퉁불퉁 돌바닥은 아랑곳 않고 공을 차던 아이에게 상대가 생겼다. 상대는 아이의 형. 형제의 발재간을 보니 과연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가 나온 도시다웠다. (호날두는 리스본을 연고로 하는 스포르팅 리스본에서 첫 발을 내디뎠다.) 가끔씩 째깍거리는 새소리와 바람결에 흔들려 쉭쉭 거리는 나뭇잎들만이 듣기 좋은 백색소음처럼 들려왔다. 공원을 거쳐 전망대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들, 강아지 몇 마리, 수다쟁이 세 사람의 잔잔한 웃음소리까지. 시청각적으로 편안한 느낌이 뒤엉키는 바람에 노을 시간이 가까워져 가지만 자리에서 일어설 생각은 도통 들지 않는 시간.


그때 지나가던 여행자가 아이들의 공을 받았다. 하나에서 둘, 둘에서 셋이 되어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공을 한참 주고받는데, 아니 저 분수대에 공이 빠질 것 같아! 하고 생각하던 찰나에 정말로 공이 분수대 한가운데로 풍덩 하고 빠져버렸다. 팔이 짧은 아이들은 물론이고 키가 꽤 컸던 여행자도 도저히 닿지 않을 만큼 공은 멀리 달아나버렸다.


또 한 사람이 나선다. 아까부터 세 살 정도로 보이는 귀여운 아기가 꽥꽥거리며 새를 쫓고 있었는데 그 아기의 아빠로 보이는 사람이다. 그는 주변에서 돌멩이 하나를 주워와 공 주변으로 던져 물살을 일으켰고 그 물살에 의해 공이 조금씩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기의 아빠는 내심 분수대 축구팀에 끼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때다' 싶어 발휘한 기지로 팀을 위기에서 구해냈고 2:2 짝을 맞춰 게임은 다시 시작되었다.


어쩌면 확고부동한 것들로는 이해할 수 없는 도시의 모습은 좀 이런 식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살고 있는 사람과 하룻밤만 묵고 떠나가는 사람이 구분되지 않는 곳. 꽥꽥 새를 쫓는 아기와 처음 본 사람들과 공을 차는 아이들, 처음 본 아이들과 공을 차는 여행자들. 도시의 단순한 움직임이 영화를 볼 때처럼 편안한 마음이 들게 한다. 어쨌든 힘을 빼면 이런 소박하고 꿈같은 장면을 만나게 된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다.


책을 읽던 사람들과 끊임없이 수다를 이어가던 그녀, 그리고 형제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고 나서야 우리도 자리에서 일어날 채비를 했다.


아주 힘겹게 벤치에서 일어나 전망대로 향했다. 늦은 태양의 내리쬐는 빛을 받아 오래되고 거친 질감의 건물들이 아른아른거리기 시작한다. 도시가 끝날 것 같은 경계선에는 언제나 테주강이 보였는데 흐르는 물이 보이는 도시는 역시 더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뒤에서는 버스킹 소리가 들려온다.


나 이 노래 좋아하는데 하곤 도시의 예술가에게 마음을 표한다. 지구 반대편에서 자연스러운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올드팝을 좋아하는 취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낯선 도시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귀에 꽂히는 것만큼 소름 돋게 기분 좋은 일은 없으니까.


그것도 누군가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 불러주는 것이라면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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