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는 무엇일까요
누군가 내게 그랬다. 남들 다 하는 건 꼭 한번 해봐야지 안 그래?
대화가 허공에 떠도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나의 말수는 상대방에 따라 현저히 차이가 나긴 하지만 대체로는 듣는 쪽에 속하는 것 같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고 호기심도 많은 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는 비자발적으로 한마디도 할 수가 없어서 일부러 질문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각자의 이야기가 내면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 바깥 어딘가의 명확하지 않은 곳에 맞추어진 느낌이 있다. '그건 그렇대요'하는 식의 끝맺음이 하나의 증거가 되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이 대화가 진짜인지 아닌지에 대한 구분이 꽤나 확실해져가고 있다.
어떤 주제에 대해 단순히 공감이나 동의가 이루어져야 진짜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도 정말 좋지만 오히려 반대로 다른 생각, 의견이나 관점을 투닥거리며, 그러니까 그 귀여운 스페인어를 빌려 티키타카 공을 주고받듯 대화가 오가는 것도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그들의 진짜 경험과 생각이 궁금했을 뿐이다. 내가 가보지 못한 길을 어떤지, 나는 모르지만 그들은 아는 그런 것들은 무엇인지, 경험으로부터 든 생각, 생각으로 이어진 경험 같은 것들.
하지만 대화의 중심이 '그렇대요'같은 말에 있고 심지어 그것이 하나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 충고나 훈수 같은 모양을 띄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진심을 드러내기 어렵다.
그런 대화에 끼어버리게 되면 나는 바다 거북이가 자신의 등껍질 안으로 다리를 반만 집어넣는 것처럼 무언가 말하기를 접어두게 된다. 바다 거북이는 육지 거북이처럼 다리를 껍질 안으로 완전히 집어넣지 않고 반만 속으로 감추고 반은 내놓는다. 수영을 위해서라고 한다.
말끝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던질 뿐, 진심 같은 것은 껍데기 안으로.
최근에 사람들이 깊게 생각하지 않는 현상이 예전에 정크푸드가 유행하기 시작했던 때의 패턴과 유사하다는 뉴욕 타임스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예전에 빠르고 중독적인 패스트푸드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건강한 식생활은 망가졌으며 비만율이 증가했고 빈부격차까지 심화되었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 그리고 자극적인 콘텐츠와 근거 없는 아무 생각들을 너무 쉽고 빠르게 접할 수 있는 시대. 그 기사는 앞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특정 사람들의 소유물 같은 것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리 있는 주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렇게 가는 게 맞는 거야? 하는 느낌이 들 때면 여지없이 좋아하는 영화를 찾아본다. 가장 좋아하는 그 장면. 교실 안의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시에 대한 평가법이 나온 모든 장을 찢으라고 하며 말한다.
"내 수업에서는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라. 단어의 맛과 언어의 맛을 즐겨라.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언어와 생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리곤 선생님은 교실 중앙에 아이들을 둥그렇게 모이게 한 후, 이어 말한다.
"우리가 시를 읽고 쓰는 건 시가 보기 좋아서가 아니야. 우리가 시를 읽고 쓰는 건 인류의 일원이기 때문이지. 인류는 열정으로 가득하거든. 의학, 법학, 경영학, 공학, 모두 중요해. 삶에 필수적이지. 하지만 시와 미, 낭만, 사랑은 우리가 사는 이유야." 그다음 대사는 휘트먼의 시를 인용한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호기심 어린 학생들에게 하는 말. "네 시는 무엇일까?"
언어와 생각이 나의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것들에 좋은 것만 가득가득 주고 싶다. 제철 식재료를 하나하나 다듬어 건강한 식사를 내게 대접하는 것처럼 말이다. 세상의 속도에 뒤처지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시간이 걸리는 것 같은 느낌은 아무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깊이는 시간을 요구하기 마련이라고, 좋은 책들은 항상 이렇게 말한다.
보고 듣고 읽으며 흡수하는 모든 것이 내게 비치고 양껏 맛본 좋은 것들을 스스로 풀어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이거 꽤 기대되고 흥미진진한 게임이 되는 것이다. 얼마나 더 좋아질 수 있을까?
그리고 30년이나 지났지만 키팅 선생님의 수업은 여전히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