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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틀란 Jun 05. 2023

김창완의 청춘

포기 못하니까 청춘이다

내 청춘도 날 버리고...


단가 <사철가> 중 이 노랫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붙잡거나 어쩔 수 없는 세월이란 녀석입니다. 세상 만물 모두에게 세월이 그렇게 한다면 공평하다 싶어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유독 아팠던 것은 ‘내 청춘이 날 버려서’ 더 감정이입이 됐던 것 같아요. 외부의 무엇때문이 아니라 ‘내안의 그것’이 날 버린다고 생각하니 들을 때마다 아리게  다가옵니다.       


7080들의 시절연가, 김창완의 노래 <청춘>이 떠오릅니다. 약간 처량 맞은 기분이 들 때 이 노래를 입으로 소리 내어 부르면 그 설움이 덜해진 경험, 있으신가요? 허밍도 괜찮죠.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내 청춘 / 피고 또 지는 꽃잎처럼...

온몸에 긴장을 좌악 빼면서 김창완이 되어 봅니다. 김창완의 노래는 쉽고도 어렵습니다. 성대떨림도 별로 없이 동요처럼 어른노래를 부르는데 그게 더 짠한 감동을 주거든요. 그럴려면 구력의 많은 부분이 노랫말에 의지하기도 하죠.      


가고 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 손짓에 슬퍼지면/ 차라리 보내야지 돌아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 거야

더 처량 맞습니다. 삼백삼천년전 놓쳐버린 인연들도 떠오르고요. 다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니 허무한데, 가수는 영리하게도 놓아버리자며 대충 포기하자고 정리해 버립니다. 세월은 우리힘으로 어쩔 수 없다고 말입니다. 내 탓이 아니라 세월 탓을 해요. 그래야 지나가 버린 시간에 발목 잡히지는 않을테니까요. 인간은 참 이기적입니다.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감정도 때로는 속여 넘깁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면서요. 나를 두고 간 님은 용서하겠지만 날 버리고 가는 세월이야     

저는 님이, 사람이 더 용서 안됩니다.


1981년, 산울림의 7번째 레코드에 실린 노래 <청춘>입니다. 그시절 청춘들의 정서는 어땠을까요?

1980년 5.18 광주가 있었고요. 학살과 왜곡의 범위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던 때였지만 뭔가 잘못되어 가는 대한민국 사회를 향해 쏟아내고 싶은 단말마를 터트리고 싶었죠. 영화 <박하사탕> 속 5.18 계엄군으로 광주에 갔던 김영호(설경구)청춘은 그 트라우마를 감당 못하며 살아가더군요. 2000년에 마흔이니 저랑 비슷한 또래였겠습니다.      


제 청춘의 포커스를 맞춰 봅니다. <아니 벌써>를 들으며 원치 않았던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우울한 예비청춘시절을 보냈습니다. 대학 역시 그랬습니다. ‘대학을 가야 인간이 된다’는 어른들의 소리를 주홍글씨처럼 새기며 경제적 수준에 맞지 않는 학교에 지원했고 합격은 했지만 등록금을 납부 못해 입학이 취소되었다는 전보를 받아야 했죠. 지금으로 치면 마트 수준인 곳에서 액세서리판매를 하며 하루 돈을 벌어 가족을 위한 쌀도 사고 연탄도 사며 청춘의 1년을 보냈습니다. 찬바람이 불어 오고 또다시 환청처럼 들린 말, ‘대학을 가야 인간이 된다’ 는 소리를 또 기억해내어 가까운 지역 대학에 들어갔죠.


제5공화국 어떤 나랏님은 사교육이 득세해서 공교육이 망한다며, 대학생들이 학생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금지시켰습니다. 수많은 가난한 대학생들이 몰래 몰래 밤과 새벽을 틈타 범법자연습을 해야했습니다. 그 시절 청춘을 보내며 확실히 배운 것 하나는 양심 찔리게 돈 버는 일도 내가 할 수 있다는 현실목도였습니다. 독재자가 좌절을 가르쳐 준 ‘청춘노동’의 한 종류였을까요.       


솔직히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속에 흐르던 김필의 <청춘> 부르기는 원곡보다 묵직하지만 그 속내는 가볍습니다. 청춘의 낭만만을 노래한 분위기였으니까요.

청춘의 낭만이란 것을 미처 느낄 새도 없이 살아내야 했던 사람은 ‘청춘재수’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입시도 두 번 치렀는데 청춘도 시험처럼 제대로 치르고 싶나 봅니다. 그래서 여전히 제 청춘은 진행중입니다.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아, 이거였구나’ 할 때까지 할 요량입니다.    

 

많이 배운 어떤 선생님은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책 제목만으로도 시절을 힘들게 보낸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정작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답을 주지는 못하나 봅니다. 그만큼 어떻게 살아야 할지 길을 찾지 못한 채 자기 속만 헤집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일 겁니다.    

  

개인 탓으로 돌리는 부분이 너무 많은 세상입니다. 잘되든 못되든 ‘너의 능력 탓’ 이라고 말하는 제도들이 참 못마땅합니다. 청춘들이 상처입고 헤맵니다. 그래서 제 '청춘재수'도 끝날 때를 모르나 봅니다. 여전히 길이 잘 안보이니 말입니다. 아, 현타가 옵니다. 어쩌면 헤매다가 끝날 수도 있겠다 싶어요.  길동무라도 두서넛쯤 만나 함께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날 버리고 간 세월도 용서가 될 것 같아요. 그러는 순간이 모여 청춘합격, 청춘완성에 도달할 수도 있겠죠. 결심하나! 그때까지는 계속 철없이 푸르기!

‘포기 못해서 청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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