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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땡책협동조합 May 28. 2018

뚱뚱한 소녀는 글을 쓴다,
그 달달한 마법

―허수경 장편소설, <아틀란티스야, 잘 가>를 읽고


독일에 있는 허수경 작가가 위독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랜 시간 한국문학을 사랑해온 사람들이라면 그 소식에 가슴 어딘가가 쿵, 내려앉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그리고 다들 자기 안의 ‘허수경’을 떠올려보지 않았을까. 시, 소설, 에세이... 장르를 넘나들며 작가만의 짙은 향취를 풍기는 작품들.


나에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뚱뚱한 여자아이. 골방에서 울며 몰래 단팥빵을 먹는 그 아이. 바로 에세이집 <길모퉁이 중국 식당>에 짤막하게 실린 작가의 초상이다. 그리고 <아틀란티스야, 잘 가>는 2011년에 쓰인, 그보다 무려 30년 전의 이야기를 그려낸 장편소설이다. 그 단팥빵 먹는 소녀의 이야기라고 보면 딱이다.     

주인공인 중학생 경실이는 1970년대 고위 공무원의 딸이다. 배를 곯기도 하는 다른 친구들에 비하면, 매일 용돈을 받아 자장면도 사 먹고 찐빵도 맘껏 사 먹는 여유로운 아이다. 그래서일까, 살도 많이 쪘다. 전교에서 가장 뚱뚱할지도 모른다. 근데 말이다. 정말, 그래서일까. 부모가 돈이 많아서 경실이는 살이 쪘을까. 여유로울까. 행복할까. 

모르겠다. 그래서 경실이는 비밀 일기장에게만 속이야기를 한다. 일기장 속에서 경실이는 경실이가 아니라 미미다. 상관없잖은가. 일기장에게는 마음껏 거짓말을 해도 된다.     


사람과 사람들 사이는 조금 이상한 거라
속사정을 안다고 하더라도 진짜 그 사정을 알까, 싶은 생각이 나에겐 있었거든.
누가 내게 물어봐, 내가 왜 이리 뚱뚱한지.
난 몰라…… 일기장아, 넌 아니?
나는 진짜, 진짜 내가 누구인지 몰라.
뚱뚱하다는 것 말고는 나, 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어.
그것 말고 내가 나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경실이의 아버지는 직위를 이용해 가난한 이들을 등쳐먹고, 심심하면 딴살림 차리기를 취미처럼 하는, 그러면서도 ‘큰일’을 도모할 때가 되면 딱 끊고 집안으로 다시 돌아오는 결단력(?) 있는 인간. 경실이의 엄마는 자기와 달리 뚱뚱한 딸에게 살을 빼라고 할 뿐 그 외에는 관심이 없고 남편 뒷바라지한다고 밖으로만 도는 인간. 경실이는 이런 가운데서 그저 동네 만수 씨네 단팥빵 가게에만 정을 붙이고 드나들 뿐, 자기가 왜 자꾸 먹어대는지, 살이 찌는지 도통 모른다. 하지만 그걸 지켜보고 있는 우리와, ‘훗날의 경실이’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남들에게 놀림을 당하는 게 그토록 싫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먹으면 자꾸만 뚱뚱해지는 단팥 찐빵을 먹어치우곤 했던 건 왜였을까요?
그 달콤한 맛이 외로움을 달래주었기 때문일 겁니다.
저는 그 외로움이 어디에서 발생했는지 지금도 잘 모릅니다.
다만 알고 있는 건, 그 외로움이 저라는 사람을
글 쓰는 일로 초대했다는 겁니다.(작가의 말에서)     


외로움. 누군가는 듣기만 해도 벌써 책을 덮고도 남을 지겨운 말. 하지만 소녀가 단팥빵의 달콤한 소에서만 작고 반짝이는 별 같은 위안을 얻었던 이유, 이복언니 정우를 따라서 ‘잃어버린 낙원’ 아틀란티스에 대한 허황된 이야기를 지어내기 시작한 이유, 자기를 배제하던 낯선 또래들의 위험한 ‘독서클럽’에 참여하게 된 이유, 그 모든 유일한 이유이기도 하다. 외로움. 

경실이는, 허수경 작가는, 그리고 나는, 외로워서 썼다. 어쩌겠는가.     


엄마나 아버지는 우리들은 애니까
우리들 이야기는 없고 지들 이야기나 있는 줄 알아.
이 독서클럽에 있으면 어려운 현실 따위는 잊어버릴 줄 알았는데
어디를 돌아봐도 지옥이야.     


독서클럽에서 만난 아이들은 저마다 가진 어려움들을 풀어놓는다. 그중 어떤 것도 녹록치 않다. 시대와 성인 세대의 고통은 아이들의 삶까지 옥죄고 있다. 자기만의 외로움에 갇혀 있던 경실이는 다른 외로움들과 만나면서 ‘찐빵별의 위안’을 잠시 공유하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의 외로움은 나누지 못한 채 계속 일기장에만 털어놓는다.

설상가상 아이들이 각자 꿈꾸는 ‘아틀란티스’의 이야기를 쓴 공책이 경찰의 손에 들어가게 되고, 아이들은 성인으로 치면 ‘대공분실’에 해당할 ‘시멘트 방’에 한 명씩 들어가 취조와 폭력을 당한다.      


하지만 그 방 안에서 나는 이미 어른이 된 것 같아.
나는 숟가락을 다시 잡았어. 국에다 밥을 말아서 천천히 목구멍으로 넘겼어.
모든 것이 그전 같지는 않을 거야……     


큰 틀에서 성장담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 소설에 해피엔딩 같은 것은 없다. 경실이가 외로움에서 벗어나 살이 빠졌는지 어쨌는지, 커서 훌륭한 소설가가 되었는지 어쨌는지, 알 수 없다. 그저 일기장에게 자신은 미미가 아니라 경실이라고 밝히며,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아틀란티스’야, 잘 가, 하고 작별의 인사를 할 뿐이다. 경실이는 자신의 어느 한 시절과 혹독한 이별을 치른 셈이지만, 그래서 나도 같이 ‘잘 가’ 하고 조금 울었지만, 작가의 안에는 아직 ‘혼자 단팥빵을 먹는 뚱뚱한 소녀’가 살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내 안에도 ‘엄마 몰래 돈까스를 시켜 먹고 빈 그릇을 방에 숨겨 두는 뚱뚱한 소녀’가 살고 있는데, 이 소녀와 그 소녀는 닮아 있겠지만, 또 자세히 보면 한참 다를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시절, 어느 장소에나 외롭고 뚱뚱한 소녀가 하나쯤 살고 있을 거라고 나는 상상한다. 그리고 그 소녀들은 높은 확률로 자기만의 비밀 공책을 펴고, 또는 태블릿 피시를 켜고, 아니면 모바일 트위터 창이라도 열고, 뭔가를 쓸 것이라고 상상한다. 


왜 외로우면 글을 쓰게 될까?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 가장 다행한 일. 단팥만큼 다정한 구원.




양선화 "여자, 소설: 한국 여성 작가 장편소설 리뷰"


내 이십 대 전체를 쥐고 흔든 것은 너무나 자명하게도 ‘소설’인데, 더 정확히 말하면 ‘남자가 쓴 소설’이었다. 지금은 어느덧 반대가 되어서, 가장 사랑했던 박민규를 절독했으며 / 전작을 사서 모았던 김도언은 이름도 마주치고 싶지 않고 / 거침없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던 천명관의 세계관이 진부하게 느껴진다. 김영하나 김연수 같은 명실상부 지적이고 세련된 중견 작가의 소설을 더 이상 업데이트해서 읽어야 할 필요가 안 생기고, 조정래 김훈 황석영 등 할아버지들의 훈화 말씀은 뭐 말할 것도 없다. 그것들을 다 제하고 나니 여자 소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인데, 사실 여자들은 늘 소설을 쓰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잘.

그렇다고 내가 어떤 ‘페미니스트 모먼트’를 기점으로 일부러 남소설 여소설을 가르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냥 어느 날 서점에 가서 쓸어 담아온 책들이 다 여소설인 걸 발견하며 놀라고... 뭐 그런 흔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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