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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 Dec 23. 2020

집을 샀습니다

생활인의 감각

집을 샀다.

97년에 지어진 오래된 주공 아파트.


나는 이 아파트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천 가지이고, 또 한편 아무것도 없다. 아무런 말도 덧붙일 수가 없다. 말이란 항상 없는 걸 더하고, 있는 걸 바꾸어놓기 마련이니까. 내 집이 무언가 유별나고 크게 말할 거리가 있어서가 아니라, 아직 난 내 스스로도 이 감정을 무엇으로 부를지 알지 못한다.

그저 아파트를 샀다고 몇 번 되뇌어 본다. 그렇게 왜곡되고 흐려질 게 분명할 말을, 덧붙일 말들을 그러모은다.


어린 시절 나는 내가 자라 이런 아파트를 사게 될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을 거다. 집을 사는 건 너무 먼 미래의, 어른만의 일이었다. 집이라는 건 예쁘고 특별한 형태로 머릿속에 그려지는 꿈의 공간이었지, 이렇게 현실감 넘치는 녹슨 현관문을 가진 주공 아파트와 매매 계약서는 아니었다.

나는 이 현실 세계의 아파트를, 직장인이라서 샀다. 자본가라서, 상속인이라서가 아니고, 직장인, 회사원, 노동자로서, 매일 했던 노동의 결과로 살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노동의 결과가 아니라 노동의 가능성으로 산 것이다. 대출이란 은행이 나의 노동 가능성을 믿어주는 것이니까. 그러니 만약 인생의 어떤 부분마다 다른 선택들을 했더라면, 그래서 직장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아파트를 사는 일 같은 건 없었을 것이다. 이 아파트는, 내가 직장인이라는 사실을 그 무엇보다 선명하게 나에게 일깨운다.


오랫동안 내가 지금의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이라는 사실을 싫어했다. 내가 늘 지금의 나를 싫어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무거운 짐이었다.

내가 생각하던 삶과 너무 다른 어른이 된 나의 하루 하루는 마치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저택이나 담요와 쿠션으로 뒤덮인 아늑한 다락을 종이에 그리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 녹슬고 깨져 지저분한 주공 아파트의 현관문을 코 앞에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나약한 나는 그런 나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복잡한 머리 모양과 색깔을 연달아 바꾸기도 하고, 내 월급으로 감당할 수 없는 물건을 아무렇게나 사보기도 하고, 국내와 국외를 가리지 않고 나다니기도 하고, 직장일을 아주 열심히 해보거나 아주 태만하게 해보기도 했다. 그런 방식으론 현실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매일 아침 오피스텔의 침대에서 눈을 떠 알람이 울리길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동안 깨달았다.


집을 계약하고 돌아온 날 저녁에, 코로나로 인해 만날 수 없는 그리운 이들과 줌으로 온라인 모임을 가졌다. 각자 와인이나 맥주, 먹을 것을 들고 노트북 카메라 앞에 모여 그간의 일상을 나눴다. 선생님이 된 친구에게

“선생님으로서 가장 나쁜 점이 뭐냐” 고 묻자

“선생님이라는 직업의 의미를 잊고 매너리즘에 빠져 주식 얘기나 하면서 하루 하루 살게 되는 것” 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신기했다. 직업의 의미를 잊었다고 자책할 수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의미있는 직업이지 않은가. 열심히 일할수록 오너의 호주머니를 불리는 것 외에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데 친구가, 내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전에 말한 서로 존댓말하는 친구들 모임입니다. 4화 참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저도 그저 획일화되고 무력해진 국가 교육에 종사하는 한 명일 뿐이라고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모두 생활인인 거니까. 이 직업을 통해 내 생활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생활을 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그것도 생활인으로서의 의미 아닐까요”

친구가 했던 말을 정확히 옮기지는 못했지만 그때 내 마음은 조용해졌다.

나는 다시 내가 산 아파트의 현관문 앞으로 불려갔다. 추운 바람이 새는 그곳에, 모임이 지속되는 내내, 오래오래 서 있었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그 중 한 부를 받아들며 느낀 기분을 다시 한 번, 좀 더 분명하게 감각하며.

여기에 내 생활이 있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주지 않은 내 생활이. 내가 일하고, 내가 벌고, 내가 꾸려나가는 내 생활이 있다.

그간 나는 생활인으로서 이곳에서 하루 하루 살았구나. 그러니까 내가 만든 내 생활이구나.


그것은 아파트를 샀다는 데서 내가 그 시절 옳은 선택을 했음을 확인 받는 만족감이나, 이왕 아파트를 샀으니 이제는 정말 마음잡고 회사를 다니자는 체념, 또는 아파트를 사고 직장을 다니는 것이 진짜 어른의 현실이라는 납득과 우월감이 아니었다.

그건 막연히 상상했던 아파트의 집을 보러가서, 그 신발장에 신발을 벗고 직접 낮은 천장과 좁은 부엌, 컴컴한 벽지와 조잡한 화장실 바닥의 타일들을 조우했을 때, 그 엄청난 현실감각이 더는 나를 압도하거나 잡아먹지 않는 어떤 단련에 가까웠다. 매일의 생활이 내 몸에 단단히 둘러지는 감각. 아파트는 내가 직장생활을 하며 축적한 생활인의 감각을 일깨웠던 것이다. 나약하게, 다양한 방식으로 도망치면서도 버텨온 감각을.


물론 남이 사주고 벌어주고, 남이 주는 인생을 살았어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 지금이 좋다는 그런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다. 그게 부럽지 않을 만큼 난 성숙하지 못하다.

하지만 이 아파트는 직장인이 된 내가 샀고, 나는 그 기분을 [직장인의 기분]으로 쓴다. 내 것이라서 쓸 수 있는 내 글이다. 그것이, 직장인이 된 내가 회사에서 얻은 작은 자유, 생활인의 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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