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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 Jan 01. 2021

비교의 질병에서 벗어나기

눈금이 되지 않기 위해

2021년 새해가 되었다.

지켜지지 않을 목표와 다짐을 써보고, 유튜브와 블로그에서 작년 한 해를 결산하는 콘텐츠들을 둘러보며, 카톡 인사를 통해 '아 이 친구와는 오랫동안 연락을 못했구나' 하고 놀라는.

12월에는 온라인에서지만 송년모임도 여럿 있었고, 크리스마스와 각종 기념일을 챙기느라 바빴는데도, 시절 때문인지 기분 탓인지 제대로 연말 느낌을 갖지 못했다. 정신 없이 흘러가다가 문득 달력의 숫자들이 바뀌어 있는 것을 보며 비로소 '아 새해구나' 하고 깨닫는다.


새해라는 것은 단지 인간의 구분일 뿐,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식의 꾸며낸 담담함은 그만두기로 했다. 달력의 연도가 바뀌는 헌해와 새해의 틈 앞에서 적어도 나는 분명히 다른 '기분'을 느낀다. 아무리 무기력하고 방전된 중이라 해도 조금쯤은 무언가 해보고 싶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든 어쩐지 잘될 것만 같은 기분을. 대청소를 하고 나서 달라진 집안을 둘러보는 뿌듯함처럼, 묵은 일 년의 시간을 팡팡 털고 햇볕 잘 드는 마당에 말려 그 보송한 가벼움을 다시 몸에 두르는 개운한 기운을. 그 기운이 해마다 나이를 먹으며 조금씩 푸석해지고 칙칙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새해란 늘 그렇게 새로운 시작의 푸른 기운을 띠고 온다. 새해의 기분을 빌려 지난 시간과 앞으로를 말해보기에 충분할 만큼.



3년 전 1월말에 입사했으니 이제 곧 4년차가 된다. 프로필의 소개도 4년차 직장인으로 바꿔야 하겠구나.

그동안 회사를 다니며 부서를 이동했고, 집을 샀고, 브런치시작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함께 하던 사람을 잃었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에도 많은 일들이 오고 간다.  많은 일들이 나를 거쳐 다니며 나라는 사람의 조직과 구성을 조금씩 조금씩 바꿔 놓았다. 10, 20년을 회사에서 일하고 나면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그보다도 2021 4년차로 보내는 시간은 나를 어디로 데려다 놓을까.  회사에서 나는   세상을 만나고 경계를 넓히고 있는 걸까 아니면 점점  회사 안의 세계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걸까. 아직도 회사에서 겪는 일들을 어찌 받아들이고 소화해내야 할지 배우는 중이다.

이렇게나 덜 된 나인데, 벌써 중고신입으로 다른 회사를 노려보기엔 늦었고, 경력직으로 이직을 시도하기엔 경험이 짧은 시기를 맞고 보니 너무 생각 없이 회사를 '다니기만'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조바심과 걱정이 들이닥친다. 슬슬 주변에서 퇴사와 이직 소식이 들려와 더욱 그렇다. 이럴때면 비교라는 무서운 질병이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를 점령하고 있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생각해보면, 회사원이 된다는 점의 가장 나쁜 부분인 것 같다. 학창 시절부터 어른이 된 후까지, 쭉, 한 번도 경로를 이탈하지 않고 남들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삶의 궤적을 차곡차곡 그리게 된다는 것. 그래서 주변엔 언제든 비교할 눈금들이 촘촘히 박혀 있고, 궤적의 바깥은 자꾸만 무섭고 낯선 미지의 세계가 된다는 것. 이미 누군가들이 수십 번 반복해 나눠놓은 계급의 서랍 안으로 쉽게 분류되고, 지금까지 충분히 애써서 그 사다리를 올랐음에도 여전히 발을 헛디딜까 조마조마해 하며 더 괜찮은 분류의 대상이 되고자 노력한다는 것. 남에게 설명하기 너무나 쉬운 삶이 되어, 어떤 여지가 남지 않게 된다는 것. 그리하여 모두가 당신의 삶을 짐작하고 판단하고 평가하기 용이해진다는 것. 당신 자신에게조차도.


그러니 회사라는 물에 녹아 없어지는 휴지처럼 흐물흐물한 삶이 되지 않으려 애쓰다가도, 그 애쓰는 하루하루가 그저 경쟁에서 살아남고 또다른 사다리를 올라가는 일이 되지 않도록, 나를 더 평평하고 읽기 쉬운 사람으로 만드는 노력이 되지 않도록 애쓰기까지 해야 한다.


올해는 그만하자고, 또 지키기 어려운 새해 다짐을 하는 것은 그래서다. 시간이 간다는 걸 느끼기에 새해만큼 좋은 때는 없지만, 시간이 가는 것에 조바심을 내지 말자고 다독인다. 더는 내가 이룬 것들을 가지런히 늘어놓고 보기 좋다며 만족하지 말자고. 더는 그 길이가 남들에 비해 긴지 짧은지 재보려 초조해하지 말자고. 물론 길이를 재어볼 수 없게 애매하고 복잡한 삶을 산다는 것은, 불안한 일이다. 사람은 결혼정보업체에 자신을 등록해서 그 상품적 가치가 등급이나 점수로 딱 매겨지는 순간에 모멸적인 편안함을 느끼는 모순적 존재이니까. 점수가 높고 낮고의 문제가 아니라, 점수로 환산 가능한지의 문제다. 남들이 평가조차 하지 못하는 삶이란 얼마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인가. 내 삶과 영혼을 저울에 올려 무게를 달아볼 수 있다면, 누군가 내 답안지에 A+는 못돼도 A나 B+ 정도의 채점을 해준다면 얼마나 안정적이겠는가.

하지만 언제나 말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것, 점수를 매기기엔 불분명한 것, 객관적인 평가가 불가능해서 사람들이 가치로 대해주지 않는 것, 그래서 누군가의 가슴을 불안하게 하는 것에서 삶의 문학성이 생겨난다. 그 점수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사회에서 너무 중요해져 버렸기 때문에.


새해의 푸른 기운을 얻어, 물에 녹지 않는 삶을 감각한다. 흐물흐물하지도, 여지 없이 반듯하지도 않은, 누구의 가치를 계산하는 눈금으로도 박히지 않는 순간들을. 나를 반듯이 펴서 보기 좋게 핀으로 꽂아놓으려는 스스로의 욕망을 넘어서는 감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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