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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밤이 Jan 07. 2021

내 뇌가 기형일 줄이야 (2)

갑작스러움과 함께 살아가기

언니네 집에 잠시 머물기로 하고 날짜에 맞춰 진료 예약을 했다. 언니의 회사에서 내려 30분 정도 걸어가면 병원이 나왔기에, 언니의 출근길에 차를 얻어 타고 나왔다. 병원으로 가는 길에 산이 있어 오전 공기는 유달리 상쾌했다. 오랜만에 아침 공기를 마시며 걸으니 기분이 좀 좋아졌다. 11시 24분에 예약된 진료 시간보다 2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조금 걷고 나니 출출함이 느껴져 주변 식당을 둘러보았다. 따끈한 국물이 당겨 콩나물국밥집을 들어갔다.


국밥집엔 혼자 온 손님이 종종 앉아있었고 내가 앉은 곳 오른쪽 맞은편엔 남자 서너 명이 국밥에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4500원짜리 콩나물국밥은 주문하자마자 금세 나왔다. 취기가 오른 사람들의 소리를 뒤로 한 채 계란을 풀고 국밥을 몇 스푼 그릇에 덜어 먹었다. 나도 언니와 같은 병이라고 하면 어떡하지? 진료받을 생각을 하며 국밥을 떠먹었다. 괜스레 떨리는 마음이 허기로 변했는지 국물도 남기지 않고 국밥 그릇을 싹싹 비우고 일어났다.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있는 병원에 들어가 온도 체크와 소독제를 바르고 진료예약을 확인한 후 가져온 CD를 무인 영상 등록기에 등록하고 진료를 기다렸다.


언니의 진료를 담당했던 교수님을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간호사가 들어오라고 하는 소리에 바로 들어가 자리에 앉으니 나를 보며 무언가 알고 있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시며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나도 미소에 화답하듯 “네, 예전에 ㅇㅇㅇ환자 동생이에요”라고 웃으면서 먼저 말을 건넸다. 교수님도 이미 예약 환자의 주소와 이름이 비슷해서 혹시나 하며 언니를 떠올렸다고 하셨다. 그러곤 내 증상을 물으시며 천천히 증상을 화면에 입력하셨다. 증상을 말씀드리며 나의 우려도 함께 말씀드렸다. 아무래도 언니가 가진 질환이 있다 보니, 내 증상이 언니와 같은 병이 아닐지 걱정이 좀 되어서 찾아왔다고. CD에 등록했던 MRI사진을 가지고 교수님이 차근차근 설명해 주셨다. 


“아무래도 언니의 병 때문에 더 신경 쓰인 것 같은데, 낭종의 위치가 나쁘지 않고, 근육을 관장하는 곳 또한 이상이 없네요” 안도했다. 나의 뇌는 특별히 이상이 없었다. 나의 증상이 혹 불안장애로 인한 신경성일 수 있는지 여쭤봤더니 그럴 수 있다고 했다. 결국 증상들은 뇌의 문제보다 나의 불안감이 신체화된 것이거나 목디스크 혹은 허리디스크의 문제일 가능성이 커졌다. 


이어서 교수님은 언니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며 아직도 기억에 남는 환자라고 했다. 언니의 질환이 뇌로부터 신체의 여러 부분으로 가는 신경 문제가 발생하는 병이기에 시신경으로 문제가 생기면 눈이 안보이거나, 척수를 타고 내려가면 팔다리가 마비되어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하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언니가 병원에 입원할 20년 전엔 국내 환자수가 100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에 그 병원에 언니의 병과 유사한 환자가 없었을 것이다. 교수님 입장에서도 해당 질환에 대한 케이스가 부족하셨을 테니 어쩌면 다른 환자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았다. 언니는 증상이 심할 땐 중환자실에 있기도 했다. 그럴 땐 내가 병간호를 할 수 없어 언니가 어땠는지 몰랐는데 병간호를 하고 온 엄마는 아동용 색칠공부책을 사달라고 한다는 둥 자꾸 헛소리를 한다며 속상해하기도 했다. 언니는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을 못 하는 것을 보니 뇌에 이상이 생겼던 것 같다.


교수님은 그 당시 내가 ‘꼬맹이’였지 않았냐고 물어보셨다. 언니가 중3 때 시작되었으니 나는 중학교 1학년인 14살이었다고 말씀드렸더니 “아이고 꼬맹이였네”라고 하셨다. 말은 간단했지만 그 말을 건네는 교수님의 안타까움과 함께 '힘들었겠구나'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난 “네, 조금 힘든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는데 마스크 안으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언니의 병원 생활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꼬맹이인 나에게 엄마는 어쩔 수 없이 집안일을 맡기거나 주말이나 방학 때면 엄마를 대신에 언니 병실에서 수발을 들게 했기 때문에 나는 내가 꼬맹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교수님의 대답을 듣고 나니 14살이란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느껴졌다. 갑작스럽게 닥친 일들이 얼마나 감당하기 힘든 일인 지조차 몰랐던 그때의 내가 너무도 안쓰러웠고, 언니의 병상 생활과 함께 시작된 나의 10년의 청소년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 청소년기는 지금의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조용했다. 기본적으로 내향적인 성격에 자존감도 낮았는데 집에 아픈 사람이 있으니 더욱 주눅이 들었었다. 새 학년이 될 때마다 친구들에게 말 한마디 먼저 하지 못하고 대답도 제대로 못했다. 신학기마다 늘 학교에 적응하는 게 고역이었다. 쉬는 시간에는 커튼 너머 운동장 밖에 없는 창 밖을 보거나 말할 친구가 없어 책만 읽기도 했다. 다행히 좋은 친구들이 있어 괴롭히거나 따돌림 같은 것은 없었다. 먼저 다가와주는 친구도 있었기에 중고등학교 생활은 그럭저럭 잘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대학생활은 중고등학교와 달리 관계 형성이 개인의 사회성에 더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보니 낮은 자존감으로 우울증 진단을 받곤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다.

20년 전 꼬맹이인 나를 걱정해준 유일한 어른인 교수님의 말씀에 눈물을 꾹 참고 교수님 덕분에 언니는 결혼도 하고 잘 살고 있다는 말을 전해드렸다. 미소로 느껴지는 위로의 마음과 친절한 말씀에 마음까지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검진 결과로는 이상이 없지만 앞으로 무슨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 오라고 하시는 따듯한 말씀을 들으며 서둘러 진료실을 나왔다. 홀가분했다. 그리곤 마음속에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쳤다. 

나 그동안 잘 해냈구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과연 얼마나 있을까? 코로나19등 우리 사회에도 갑작스러움이 찾아왔다. 이 갑작스러움은 무언갈 열심히 해 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생각에 삶을 허망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병원을 나서면서 문득 그런 갑작스러움 안에서 허우적거림 자체가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 예상대로 흘러가는 것이 얼마나 있으랴. 우리가 사는 한 갑작스러움은 피할 수 없다. 갑작스러움은 슬픔, 절망, 기쁨 등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늘 찾아올 것이다. 갑작스러움이 없었다면, 나는 이런 생각을 가지며 살 수 있었을까? 오히려 이런 갑작스러움들이 살아가기 위한 지지대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갑작스러움이 찾아왔을 때 나는 온몸으로 껴안을 것이다. 아프더라도 그 자체가 나의 삶이니까. 


거기 늘 태양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거기 늘 태양이 있다는 사실을 잊습니다. 불행을 온몸으로 껴안을 때, 그 불행은 사라질 것입니다
 –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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