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1년 전, 내가 대학생이던 때 누나와 함께 산 적이 있다. 누나가 결혼할 때까지 4년 정도 같이 살았다. 그 전까지는 각자 대학을 위해 서울을 올라왔고, 대학이나 회사 근처에서 자취와 하숙을 했다. 여전히 고향에 계시던 부모님들은 서울이 얼마나 큰지와 별개로 한 도시에 따로 사는 자식들이 어지간히 마음에 걸렸던 것 같고, 어떻게든 둘이 같이 살 수 있는 집을 구해주었다.
누나와 나는 어릴 때부터 꽤나 친했다. 내가 태어났을 때 날 키우러 할머니가 오셨고, 방이 두개 밖에 없어 할머니, 누나와 함께 세 명이 같은 방을 썼다. 대부분의 시간을 공유했고 3살 어렸던 나는 누나를 따라다니기 바빴다. 맞벌이를 하던 부모님은 누나가 늘 나를 데리고 다니길 바랬고, 누나가 동네에서 친구를 사귀면 나도 그들에게 적응하기 바빴다. 4층에 살았던 우리는 5층에 살았던 자매와 친하게 지냈는데 각각 누나와 나보다 한 살씩 많았다. 나는 그렇게 세 명의 누나와 10살이 되기 전의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다. 그 시절 기억에 또 다른 주요 인물들은 사촌들이었다. 할머니의 고향 집에 살던 삼촌에게는 나보다 한 살 많고 적었던 딸들이 있었고 또 그렇게 여자셋, 남자셋 그룹으로 동네와 고향, 그리고 여러 가족 행사의 기억들을 함께 했다.
물론 이들이 없어도 우리 둘은 대부분의 시간을 같이 했다. 내가 딱지가 갖고 싶어 문방구를 가려고 해도 누나는 관심이 없더라도 보호자로서 같이 가주었고, 나 역시 누나가 친구를 만날 때 따라다니기도 했다. 엄마아빠가 안계실 때면 우리끼리 할머니와 밥을 해먹고 잠들기도 했고, 내가 한글을 몰랐을 때는 한글 선생님을 누나가 해주기도 했다. 가장 많이 싸운 것도 누나였고, 가장 많이 논 것도 누나였다. 누나가 악몽을 꿔서 울었을 때 그 이야기를 들은 것도 나였다. 우리에겐 할머니와 엄마, 아빠도 당연히 있었지만, 아무튼 누나도 늘 있었다.
다시 2010년으로 돌아와, 어른이 되어 같이 살게 된 우리는 대부분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스케줄로 바쁘게 살았다. 화장실도 두 개여서 겹칠 일이 매우 적었고, 밥도 각자 바쁘게 알아서 먹었다. 이제는 같이 놀러가거나 싸우는 일도 거의 없었고, 만나는 사람이 누군지, 하는 일이나 배우는 것이 무언지도 얘기하기엔 서로가 바빴다. 그러다 문득 우린 같이 있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내가 치킨을 시켜서 주방에서 먹으려고 할 때 누나가 갑자기 나올 때가 있다. 조용히 자고 있어서 있는 줄도 몰랐는데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아무런 예고없이 우린 같이 시간을 보낼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자주 예전 일들을 얘기하곤 했다.
어릴 때 우리의 기억은 기억이 바로 떠오르지 않지만 하나가 나오면 끊임없이 나오기 시작한다. 둘 중 누군가가 등장인물 한 명을 떠올리면 거기에 붙는 에피소드들이 마치 노래방 예약처럼 이야깃거리로 줄줄이 늘어섰다. 슬펐던 일, 화났던 일, 웃겼던 일, 무서웠던 일, 기억하고 싶은데 기억이 안나서 짜증나는 일... 끝이 없었다. 그러다 기억이 안나던 일이 떠오를 때면 우선예약으로 치고 들어왔기 때문에 예약된 이야기를 다 얘기하기란 불가능했다. 물론, 나는 이야기를 끝내고 싶지 않았지만 누나는 1시면 그냥 잠들어 버리기 때문에 우리는 예전 기억에 빠져들 때면 그대로 다시 현실로 돌아오기보단 과거의 향수에 젖은 채 잠에 들곤 했다.
그렇게 아주 간헐적인 누나와 과거여행을 하던 어느 순간, 우리는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렸다. 슬퍼했고 또 그리워했지만, 또 할머니의 이야기는 재밌었다. 각자가 바라봤던 할머니, 각자가 느꼈던 감정들. 이제는 나이가 들어 느꼈던 기억이나 감정을 좀 더 잘 표현할 수 있게 된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흥미로워하며 과거를 새롭게 즐겼다. 그리고 다음에 엄마 아빠를 만나면 이 이야기를 하자면서 웃었다. 그러다 문득 갑자기 누나가 엄마 아빠가 죽으면 어떡하냐고 물었다. 그래서 이 기억들을 나눌 수 없으면 어떡하냐고, 엄마 아빠 죽으면 그 기억들도 사라지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 때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겨우 "그래도 내가 있잖아." 였다. 그리고 그 대답을 들은 누나의 대답은 "그건 다행이네." 였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누나가 초등학생 때 거실에서 혼자 잠들다가 갑자기 TV가 켜졌고, TV를 끈 다음에 누워있는데 누가 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깬 적이 있다. 그리고 다음 날 엄마한테 엄마가 두드렸냐고 물었지만 금시초문이었고 누나는 한 동안 공포에 휩싸여서 다시 할머니와 나와 같이 잔 적이 있다. 그 이야기를 엄마 아빠가 죽어도 나랑 이야기하며 추억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인 것이다. 내가 여섯 살 때 엄마 아빠는 일하러, 누나는 학교에 가고나면 할머니는 나를 재우고 시장에 반찬거리를 사러 가곤 했는데, 내가 중간에 깨면 혼자 미친 듯이 울어댔다. 그리고 베란다에 쭈그려 앉아서 할머니가 오는 걸 지켜보고 울었는데, 그 베란다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나만 알지 않고 누나도 안다는 것이 정말 다행인 것이다.
엄마 아빠는 30년 안에는 우릴 떠날 수 밖에 없다. 내가 60살이 되었을 때, 나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단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때의 그 과거로 같이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부모님 말고도 있다는 것이 정말 다행이다. 아니 어쩌면 혼자서 왜곡해서 다르게 기억해버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정말 다행이다. 나의 틀린 기억을 그게 아니라며 바로잡아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또 정말 다행이다. 그렇게 우리는 거의 처음으로 서로의 존재를 고마워하는 순간을 명확하게 인지했고, 같이 느꼈다. 그리고 곧바로 누나는 너무 말을 많이 했다며 바로 자러 갔지만, 나는 잠들기 전 동안 한동안 생각에 빠졌다.
어쨌든 누나와 내가 나중엔 돈 때문에 서로 칼을 겨누게 될 지언정, 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내가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는 하나의 기회가 더 있다는 것이고, 그것으로도 나는 그 날은 충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