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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에루 Mar 04. 2019

그가 꿈에 나왔다 06

미역국 한잔 하고 가


졸업 후 프리랜서로 일하기 시작한 나는 오후에 일을 하고 낮동안 잠드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자연스레 주변의 친구들이 아침에 출근을 하고 저녁에 쉬는 직업을 갖게 되면서 퇴근 후에 내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많이 줄었고 갈 수 있는 곳도 몇 안됐다.


저녁 늦게나 일이 끝나 약속 장소에 나가면 내일 출근해야 하는 친구들과 한두 시간도 안되어 헤어져야 했다. 식당이나 카페도 금세 닫아 버리는 시간이 나에게 온전하게 주어지는 여가 시간이 되자 에덴 홀을 찾게 되는 날들이 많아졌다.








에덴 홀의 바텐더들은 이상하게 나에게 인심이 후했다. 일단 안주 인심이 매우 후했다. 맛있는 걸 좋아하는 편이지만 퇴근 후엔 지쳐서 식욕이 싹 사라지기도 했고 유난히 술을 마실 때에는 물만 마시는 습관 때문에 안주를 거의 먹지 않는 편이었다. 바텐더들은 저녁 식사를 하지 않는 나 때문에 항상 무언가를 요리해서 앞에 가져다주었다. 가끔은 애매하게 저녁 식사를 하는 그들의 식탁에 억지로 나를 앉혀서 밥을 먹였다.


직원 식사의 당번은 돌아가면서 하는 편이었는데 하다 보니 나는 주로 그가 만드는 음식을 많이 먹게 되었다. 그는 칵테일뿐만 아니라 요리에도 재주가 있어 감칠맛 나는 김치찌개나 제육볶음을 식탁에 올렸다. 한 번은 나에게 집에 김치가 있냐고 물어보더니 정갈하게 담근 김치 몇 포기를 싸서 쥐어주기도 했다.


“이게 웬 김치예요?”

“집에 김치 있니? 아윤이 너 혼자 살잖아. 김치 없을 텐데 가져가.”

“와, 어디서 났어요?”

“어디서 나긴, 내가 담았지! 젓갈이 문젠지 맛이 원하는 대로 안 나왔는데, 그래도 먹을만할 거야”


나중에 집에서 열어본 그의 김치는 어느 전라도 종갓집 맏며느리가 담근 것 마냥 고운 빛깔에 맛 마저 끝내줬다. 그 김치 덕에 꾸역꾸역 챙겨 먹던 혼밥 시간마다 그가 떠올라 피식 웃을 일이 생겼다.


여름이 한풀 꺾이고 찾아온 내 생일에 나는 혼자 에덴 홀에서 맛있는 술을 마시기로 했다. 요란한 파티도 친구들의 축하도 좋았지만 최근 푹 빠진 싱글 몰트 위스키를 생일 핑계로 제대로 마셔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나의 술 선생님인 그가 내게 처음 알려준 술이 바로 싱글 몰트 위스키였다. 에덴 홀에서 이런저런 술을 맛보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는 보기보다 주량이 셌다. 그리고 빨리 마시고 취하는 재미보다는 독주와 함께 하는 대화의 재미가 크다는 것을 에덴 홀에서 새롭게 눈을 뜬 참이었다. 늘 하던 대화 주제도, 늘 이야기 나누던 상대도 위스키가 더해지는 순간 훨씬 더 풍부해지고 흥미로워진다는 것을 왜 나만 몰랐던 것인가. 말하는 대상의 표정이 더 잘 보이기도 하고 나누는 이야기에 좀 더 솔직하게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 늘어나는 이 요물 위스키의 매력에 나는 흠뻑 빠져있었다.  


생일 저녁, 나는 계획대로 혼자 에덴 홀에 나타나 위스키를 한병 주문했다. 처음 하는 종류의 주문에 그는 놀라며 물었다.


“오, 오늘 무슨 날이야?”

“왜요?”

“아윤이가 처음으로 위스키를 바틀로 주문하니까 그렇지.”

“아 그런가요? 음 오늘 특별한 날이긴 하죠.”

“그러니까 말이야. 오늘 무슨 날이야?”

“음, 비밀로 하고 싶은데…”

“아니, 우리 사이에 비밀이 어딨어! 칫, 알았어. 난 이제 삐진다.”


대단한 비밀이라기 보단 쑥스러워서 숨기고 싶은 내 속내는 모르고 그는 내가 말을 해주지 않으려는 것에 살짝 서운한 기색을 비쳤다. 일부러 더 유치한 리액션을 하는 모습에 도대체 누가 나보다 몇 살이나 나이가 많은 것인지 헷갈렸다. 한번 더 크게 삐진 척을 하는 모습에 이내 웃음이 터진 나는 최대한 별일 아니란 듯 말했다.


“별건 아니고, 생일이에요.”

“아, 응?”


그의 반응을 못 본 척 나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뭐? 생일인데 그걸 이제 말하면 어떻게 해!”


나는 슬며시 웃으며 얼굴로 술병을 가리켰다.


“오늘 그래서 특별하게 술 마시는 거잖아요.”

“아, 넌 정말! 휴, 미역국은 먹었니?”

“미역국은 무슨, 미역국 보다 위. 스. 키! 일부러 오늘을 위해 참다가 마시는 거예요. 이거면 충분해요.”


정말 마셔보고 싶지만 높은 가격 때문에, 그리고 처음 마셨을 때 그가 만들어준 기억 때문에 뭔가 특별한 술이 된 위스키인지라 그동안 선뜻 사서 마시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위스키를 나에게 주는 생일 선물로서 제대로 마시고 싶었던 나는 더 이상 생일로 호들갑을 떨기보다는 진득하게 눈 앞의 술을 즐기고 싶었다.  


그는 잠시 들어온 주문과 다른 손님 응대를 마치고 다른 바텐더에게 바를 맡기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다른 바텐더들이 건네는 생일 축하에 대답하며 계획대로 위스키를 즐겼다. 그렇게 멍하니 나른한 행복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스피커에서 생일 축하 노래가 흘러나왔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아윤이, 생일 축하합니다”


에덴 홀의 막내 바텐더가 초가 꼽힌 케이크를 들고 나타났고 다른 바텐더들도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모두 축하를 하며 다가왔다.


“와, 깜짝이야. 이게 다 뭐예요?”

“태환 팀장님이 빨리 케이크 사 오래서 제가 뛰어갔다 왔잖아요!”


“그래 아윤아, 생일이면 미리미리 말을 해야지! 갑자기 말하면 챙겨줄 수가 없잖아”


타박하는 수정언니의 말까지 듣자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되었다. 아마 그가 주방으로 가서 다른 바텐더들에게 내게 줄 생일 케이크를 사 오라고 한 것 같았다.


“아 진짜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너무 고마워요.”

“안 해도 되긴 뭘! 축하해!”


그제야 주방에서 나온 그가 타박하듯 말하며 내 앞에 와인잔응 내려놓았다. 예쁜 모양의 와인잔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미역국이 담겨있었다.


“풉, 이게 뭐예요!”

“뭐긴 뭐야, 네가 미리 말을 안 해서 제대로 못 만들었어. 그래도 먹을만할 거야.”

“아 진짜 대박이예요. 이런 미역국은 처음 봐요.”


“다 나니까 해줄 수 있는 거야!”

“와..”

“이런 건 나만 해줄 수 있는 거야, 누가 이런 걸 해주겠어! 미역국 한잔 하고 가!”


와인잔에 생일 미역국을 받아 본 세계 최초의 사람인 내게 그는 행복한 생일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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