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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에루 Apr 08. 2019

그가 꿈에 나왔다 09

좋아한다고 모두 연인이 되어야 하나


손을 잡던 담백함과 달리 그의 키스는 열꽃 같았다. 키스가 어떤 느낌인지 안다고 믿어온 나의 생각을 바꾸는 키스였다. 우리도 모르게 서로 좋아하는 마음이 이렇게나 많이 쌓였던 것일까. 점점 잦아드는 열꽃 끝에 눈을 떠 마주한 그는 이마를 부딪혀오며 말했다. 


“아, 못 참았다.” 


아무 말 없이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안 되는 거 아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결국 이렇게 됐네.”

“이러면 안 될게 우리한테 있어?”

“응, 우리가 더 오래 보려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그가 무엇을 고민하는지는 순간이지만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이 감정이 소중하지만 지금까지 만들어온 친구로서의 관계 역시 그에게도 소중하 다는걸. 하지만 이미 흘러넘친 감정은 주워 담을 수가 없었고 이미 알아버린 달콤함을 모르는 체할 수도 없었다. 인기곡을 잔뜩 틀어놓고 우리는 노래방 보너스의 보너스 시간이 0분이 될 때까지 서로를 알아갔다. 


그날 이후 나는 잠시 에덴 홀을 찾지 않았다. 드문드문 안부를 물어오거나 언제 가게에 올 거냐는 그의 질문에 일하러 가는 중이라던가, 친구들을 만나느라 오늘은 가지 못할 것 같다는 대답을 주고받았다. 내게도 이 상황에 대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솔직히 그를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좋아하는 마음은 확실히 통했으나 우리는 많이 달랐다. 이성이나 연인이라는 굴레에 나와 그를 넣어 생각해본 적이 없는 만큼, 감정 이외에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내가 평범한 연애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반대로 그는 골수 비혼 주의자다. 그는 30대를 시작하며 비혼 주의를 대대적으로 선언했다고 한다. 그 일환인지 몰라도 그는 여자 친구를 만들지 않는 것을 넘어서 남자와의 교류만을 고집했다. 사람들은 그가 남모르는 곳에서 여자를 만날 것이라고 말했고 나는 심지어 그가 게이라고 매우 확신하고 있었다. 큰 오산이었지만. 


관계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는 것 다음으로 현실적인 장벽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11살이라는 나이 차이와 더불어 매우 다른 라이프스타일을 살고 있었다. 아직은 데이트가 하고 싶고 에너제틱한 이성 관계를 원하는 나에 비해 그는 안정적이고 편안한 관계를 원했다. (적어도 내 예상엔 그랬다.) 낮과 저녁시간에 활동하는 나에 비해 그는 온전히 밤 시간에 활동하고 낮에 잠을 자야만 했다. 그는 일주일에 하루를 쉬었고 그마저도 항상 술을 마시는 직업 때문에 온전히 쉬는 데 사용했다. 그가 바텐더였기 때문에 우리가 만날 수 있었고 친해질 수 있었지만 그의 직업도 우리의 관계가 발전된다면 이런 모든 것들은 좋은 감정을 방해하는 요인이 될 것이라는 것이 그의 태도였다.  


미래는 미래에게 맡기자는 연애주의의 나에 비해 그는 연애 후 상처가 두려워 감정을 미연에 차단하는 겁쟁이였다. 그에 대한 나의 감정을 이성 간의 감정이라고 인식하고 나니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지만 동시에 머리는 차가워졌다. 꼭 연인이 좋아하는 감정이 달려가야만 하는 골인 지점인 걸까? 


에덴 홀에 가지 않는 대신 연락으로 내 일상에 스민 그가 어김없이 에덴 홀에 올 것인지 물어오는 질문에 오늘 에덴 홀에 갈 것이라고 답을 주자 그가 나에게 말했다. 


‘가게 오픈 전에 잠시 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시간이 괜찮겠어요?’

‘응, 오늘 스케줄은 어때?’

‘다행히 오늘 조금 일찍 끝나는 날이네요.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럼 모던 어반에서 보자’ 


초여름의 해 질 녘은 고백받기 좋은 시간이었다. 






오랜만에 본 그는 생각보다 까칠한 모습이었다. 과음을 했는지 다소 힘들어하는 얼굴에는 피곤함과 잔잔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의 긴장은 내게 퍽이나 새로운 모습이었다.


“잘 지냈어?”

“오빠도 잘 지냈어요? 오랜만이네요.”

“그러니까, 왜 이렇게 안 왔어. 보고 싶어질 뻔했잖아.” 


모던 어반은 그가 즐겨 가는 카페다. 그가 중요한 이야기와 담배 한 대를 태워야 할 때면 사람들을 모던 어반의 테라스 자리로 데려갔다. 음료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그와 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평소와 같은 말이지만 그의 말속에 뼈가 있는 것을 모른 척 흘려 넘기며 대화를 이어갔다. 


“가게에도 안 오고 말이야, 그간 잘 지냈고?”

“네, 일 하느라 정신없었어요. 생각도 좀 하느라.”

“음, 그래? 무슨 생각을 했어?”

“이런저런, 주로 내 생각?” 


그가 궁금해할 그날 이후의 내 생각에 대해 천천히 말을 꺼냈다. 


“음.. 잘했네.”

“오빠도 뭔가 생각을 하고 오늘 보자 한 거잖아요. 맞지?”

“그렇지. 아무래도.” 


커피가 반쯤 비워진 잔을 만지작 거리며 그가 꺼낼 말을 고르는 것이 보였다. 나는 내가 예지력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을 할 정도로 눈 앞의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할지 잘 보일 때가 있는데,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그게... 음, 우리가 만나면 말이야, 아마 오래 만나지 못할 거야.” 


예상대로 시작된 그의 말에 미동도 없이 나는 끄덕였다. 오히려 내 모습에 그가 놀란 기색이 느껴졌다. 


“맞아요. 오빠 말이 맞죠.”

“아윤아, 너무 빨리 수긍하는 거 아냐?”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맞다고 생각해요.” 


생각과는 다른 내 반응에 그가 다음 말을 고르는 동안 나는 내가 확인하고 싶은 것을 입 밖으로 꺼냈다. 


“오빠, 날 좋아하는 건 맞아요?”

“아… 당연히 좋아하지. 좋아해.”

“나는 그게 제일 궁금했어요.”

“그게 제일 궁금했다고?” 


의외라는 그의 표정에서 갑자기 나는 머리가 맑아짐을 느꼈다. ‘그가 나를 좋아하는 감성이 친구에서 이성으로 바뀐 것 외에는 우리 사이는 크게 달라질 것이 없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한다고 모두 연인이 되어야 하나? 여전히 내 말에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에게 말했다. 


“좋아한다고 꼭 사귀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오빠도 내가 좋지만 나랑 사귀면서 있을 문제나 다른 것들이 부담스러운 거, 사실 서운하게 들릴 수 있지만 나도 비슷해요.” 


황당한 표정으로 그가 대답 없이 나를 마주 보았다. 


“오빠랑 연애하고 헤어지면 분명 나는 연애가 그렇지 하고 많이 힘들고 지나갈 거예요. 나는 그렇지만 반대로 그런 감정 자체가 오빠한테 부담인 거 이해해요. 우리 저번에 그랬으니 '나랑 사귀자'라고 말하려고 오늘 나온 거 아니에요. 그렇다고 안 사귀면 '우리 이제 그만 보자'라고 할 수도 없고.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데, 애매할 수도 있지만 그냥 이대로 두면 어때요? 우리 사이.” 


예상치 못한 말들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생각을 정리한 그러나 복잡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럼 우리 3번만 더 만나보고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네가 한 말이 다 맞는데, 네 입으로 들으니까 우리 사이를 '이대로 둬도 되나, 그게 맞나'하는 생각이 드네.” 


예상치 못한 의외의 대답에 반대로 나의 표정이 멍해졌다. 


"사실 나는 네가 사귀거나 앞으로 보지 않거나 그런 의견을 말할 줄 알았거든. 그런데 네가 그렇게 말하니 내가 정말 너랑 이대로도 괜찮은지 헷갈리네."


‘갑자기 왜 생각이 바뀐 거지?’ 싶었지만 그의 말도 썩 일리가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알겠어요. 근데 나랑 데이트 약속을 무려 3번이나 너무 쉽게 잡은 거 아니에요?” 


뾰로통하게 받아친 내 말에 그가 웃었다. 초여름 노을이 그의 웃음에 녹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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