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아저씨, 그리고 오빠 그 중간 어디쯤
한 여름밤의 꿈처럼 지나간 에덴 홀에서의 저녁은 새로운 모임과 만남으로 금세 머릿속에서 잊혔다. 나 같은 초짜 술꾼이 가서 즐기기엔 바 그리고 바텐더는 난이도 상의 퀘스트이니까 다시 방문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가 손에 쥐어준 명함은 가방의 속 굳게 닫힌 지퍼 안 속주머니에 한 번도 꺼내진 적 없이 그대로 잊혀졌다. 늘 평소와 같은 일상이 그날의 기억을 덮어갈 즈음 우연히 다시 에덴 홀을 찾은 나는 당황하고 있었다.
그 사이 에덴 홀에 함께 갔었던 친구에게는 에덴 홀이 새로운 핫스팟이 되어있었다. 생일 파티 멤버들이 다시 모이게 된 몇 주 후, 그녀가 내게 말했다.
“지금 에덴 홀 가지 않을래?”
“지금?”
“응, 크리스 오빠랑 지난번 멤버들 그대로 다 에덴 홀에 있대.”
순간 연락하라던 그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상기되어 망설여지는 마음이 앞섰지만,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데 설마 나를 기억할리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설마 나를 기억한다고 해도 연락하라고 한 말을 기억할리는 없을 테니까.
“어서 오세요.. 어? 친구!”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팀장님은 얘만 보여요?”
“어어, 아니야 그럴 리가. 저쪽에 있어 크리스는. 그나저나 친구는 왜 이제 왔어!”
“아아.. 좀 바빴어요”
함께 들어간 친구의 핀잔은 매끄럽게 넘겨버리고 그는 내게 반갑게 인사했다. ‘아… 이 사람 왜 이렇게 반가워하지’라는 생각을 하며 무난한 인사를 건넨 후 일행에게 가려고 하는 나를 붙잡고 그는 빚쟁이 마냥 내게 물었다.
“친구, 왜 연락 안 했어? 연락하라고 했는데..”
“아 그냥 또 놀러 오라는 말인 줄 알았어요.”
“연락 기다렸는데 연락도 없고 오지도 않고 말이야. 기다렸다고”
“아 그럼 먼저 연락하셔도 되는데..”
“나한테 친구 번호도 없고 이름도 모르는데 어떻게 연락을 해?”
아, 이 멍청이. 먼저 연락하라는 말도 바보 같은데 통성명도 안 한 사이라는 것도 잊고 건넨 내 말에 나는 속으로 탄식했다.
“아 맞다, 하하…”
“친구, 이름이 뭐야?”
“정아윤이요.”
“정아윤, 아윤친구 만나서 반가워. 내 이름은 알지?”
“아 네, 명함 주셨으니까요.”
“그 명함 아무나 안주는 명함인데, 멍함 먹튀 하면 안 돼.”
“네네, 안 그래요.”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성의 없는 대화를 뒤로 하고 마침내 자리에 앉자 크리스가 인사하며 말했다.
“와 태환이 형이 새로 온 손님한테 관심이 잘 없는데 어째 아윤이 너는 맘에 들었나 보다.”
“그냥 단골 만들려고 그러시는 거 같은데..”
본의 아니게 내가 중심이 되는 이야기가 길어지자 빨리 다른 화젯거리로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만 들기 시작했다. 다행이 이내 주제는 서로의 연애사와 시답잖은 웃긴 이야기로 바뀌었고 지난번 만남처럼 가볍고 부담 없이 즐거워졌다.
잠시 화장실에 들렸다 자리로 돌아가는 사이, 그가 나를 바로 잠시 불러 세웠다.
“친구! 잠깐만.”
“아..”
“잠깐이면 돼, 잠깐.”
“네”
머뭇거리며 바 의자에 살짝 걸터앉자 그가 물었다.
“친구 많이 마셨어?”
“아니요, 얼마 안 마셨어요”
“물 한잔 줄까?”
느릿한 듯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으로 그가 잔 하나에 얼음과 물을 채워 건넸다.
“감사합니다.”
“왜 연락하라고 했는데 안 했어?”
“아 그냥 하신 말인 줄 알았어요 진짜. 그리고 좀 바빴어요.”
“그랬구나. 나는 연락 기다렸는데,, 오지도 않고 연락도 없고 궁금해서.”
언제부터 우리가 그렇게 가까웠지? 혹시 내가 지난번에 연락을 하겠다거나 다시 오겠다고 기억 못 하는 확언을 했었나? 불투명한 기억 속을 더듬으며 그런 말들을 떠올리려고 애썼지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을 것이란 건 내가 더 잘 알았다. 다행이 가볍고 부담없는 목소리로 하는 이야기에 진정성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있다고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아.. 이런 대화는 불편한데 뭐라고 해야 기분 좋게 끝낼까를 고민하던 중에 그가 말을 이어갔다.
“번호 주고 가. 그리고 다음에 놀러 오기 전에 연락 주고 와”
“아..”
“혼자 와도 되고 다른 친구들이랑 놀러 올 일 있으면 오라구. 연락 주면 맛있는 거 해줄게”
“아 네.”
이미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긴 나는 어느새 그의 전화기에 내 번호를 입력하고 있었다. 그는 노련한 사냥꾼이었고 나는 상황 파악이 버거운 어리바리였다.
“내 번호도 저장했지?”
“네?”
어수룩한 태도에 내 대답을 눈치챈 그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내 낯선 번호가 화면에 뜨며 울리는 내 전화기를 보며 그가 확인 사살과도 같은 말을 했다.
“내 이름 알지?”
“아.. 하... 태환.. 팀장님이요”
“팀장님이 뭐니, 오빠라고 저장해. 오케이?”
“형! 오빠가 뭐야!”
그 순간 구세주처럼 크리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내가 그에게 붙잡혀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을 보고 온 것 같았다.
“왜? 그럼 내가 언니냐? 응?”
“아오, 아윤이한테 형이 아저씨지! 오빠라고 하기엔 너무 하지 않아? 아윤아 앞으로 아저씨라고 불러, 오빠는 무슨!”
호탕하게 웃는 그의 모습과 아저씨라고 호칭 정리를 해주는 크리스를 번갈아보며 나는 그들 몰래 이미 저장한 그의 이름을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다.
하태환 팀장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