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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에루 Feb 27. 2019

그가 꿈에 나왔다 04

아저씨는 나의 술 선생님


아저씨와의 만남은 다소 황당했으나 에덴 홀을 좋아하게 된 친구 무리와 에덴 홀에서 새로 사귄 사람들과의 관계로 인해 나는 자주 그곳을 방문하는 손님이 되었다. 여전히 혼자 찾아가기엔 부담스러워 친구들과 무리 지어 가야만 갔던 쭈구리었지만. 


사람들은 태어나서 맹목적으로 비슷한 목표를 향해 달리라는 말을 듣는다. 그 말을 하는 주체가 부모님이기도 하고, 선생님이기도 하고, 우리가 속한 사회이기도 하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업을 갖는 것은 참으로 좋은 조언이다. 돈을 주고 듣는 인생 강의보다도 더 힘 있는 말이다. 가장 적은 실패와 큰 성공을 거둘 수 있게 할 수 있는 마법 같은 말이고 그 마법을 많은 사람들이 쫓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말을 철썩 같이 믿었던 나 역시도 크게 한눈팔지 않은 덕에 다행히 인정받는 상위권 대학에 합격했다. 그렇게 맹목적으로 잡은 행복한 순간에 불행이 닥쳤던 건 아이러니였다. 


평온한 듯했지만 불안했던 집안의 갈등, 나의 입시를 위해 꾹꾹 눌러 담았던 가족 간의 불화가 터진 건 순식간이었다. 따로 나와 살았던 덕에 전쟁 같은 불화를 매일 같이 겪지 않았지만 긴장되고 불안한, 감정적으로 고립된 생활이 이어졌다. 마음속에서 어둠이 자란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지금에야 말하자면, 겉으론 남부럽지 않고 아무 문제없어 보였겠지만 실제 나는 참 우울했다. 일상을 나눌 가족들과 떨어져 있었고 정서적 안전망이 붕괴된 상태였다. 취업이나 미래를 준비하기보단 매일 나를 잠식하는 고통을 잊기 위해 더욱더 자극과 사람의 온기를 갈구했다. 하지만 타인에게 온전히 기대어 나의 불안을 드러내기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에덴 홀은 나의 동굴이 되기에 좋았다. 에덴 홀의 사람들은 친구는 아니었지만 타인보다는 나를 잘 알았고 나는 내가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도 된다는 자유로움이 좋았다. 바텐더들은 손님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직업이었고 나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고 게다가 맛있는 술도 마실 수 있었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호구’가 되는 건 사양이었다. 






그는 이 일대의 웬만한 바텐더들이 다 알고 있는 유명인이었다. 예전엔 예명을 썼다고 하는데 언젠가 궁금하여 질문을 해도 알려주지 않았다. 예명이 너무 유치해서가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었지만 예의상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서글서글한 성격에 종종 느끼한 멘트를 던져도 담백한 태도가 한결같아서 이내 그에 대한 불편한 첫인상을 금세 잊게 했다.  


그에 대한 나의 태도가 변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그의 단골손님이 남자뿐이라는 점이었다. 처음의 적극적인 접근에 ‘여자 꼬시는 선수’의 이미지가 강했던 데에 반해 몇 달간 봐온 그의 친구와 손님은 남자뿐이었다. 우연히 발걸음을 하는 뜨내기 여자 손님도 다른 바텐더들이 손이 바빠 응대하지 못할 때에만 응대하였지 그를 고정적으로 찾는 여자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에덴 홀은 항상 그와 그 또래 남자 손님들로 가득했다. 에덴 홀의 다른 바텐더들도 종종 친구들과 오는 나를 반겨주기 시작하면서 나는 서서히 손님보다는 식구에 가까워졌다. 


에덴 홀에 처음으로 혼자 간 날을 아직도 상세하게 기억한다. 모든 순간들이 슬로우 모션처럼 선명하게 그려지는 어떤 하루, 그런 하루가 그 날이었다. 저녁 느지막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날이었다. 며칠째 마음속이 시끄럽고 우울함이 사라지지 않아 혼자 있어야 하는 집이 두려웠다. 종종 집에 혼자 있는 순간 위험한 상상을 하며 충동적으로 변하는 나를 제어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나는 망설이는 마음으로 처음 그에게 연락을 했다. 


‘오늘도 많이 바쁘시죠 팀장님?’ 


메시지를 보낸 손이 무안해졌다. ‘첫 연락으로 너무 뜬금없었나? 아 그냥 집으로 갈걸 그랬나’라는 생각과 함께 발을 움직이려는데 진동이 울렸다. 


‘아냐, 많이 안 바빠 ^^ 어디쯤이야?’

‘집에 가는 길인데 안 바쁘다는 거 거짓말이죠?’

‘진짜 안 바빠 ㅋㅋ 왜 집으로 가고 있어? 빨리 와야지’ 


망설이는 마음과 함께 들었던 ‘누구라도 좋으니 날 좀 찾아줬으면’하는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내게 필요한 말을 바로 건넸다. '아. 오늘은 집에서 혼자 울고 싶지 않으니까 못 이기는 척 갈까.' 너무 당연하게 오라고 초대하는 말에 경계심보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에덴 홀에 도착하여 바의 한적한 코너에 혼자 앉은 내게 그는 익숙하게 잔을 세팅해주곤 물었다. 


“괜찮아?”

“네 괜찮아요.”

“안 괜찮아 보이는데?” 


“... 이제 괜찮아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그는 내게 뭘 마실 거냐고 묻지 않고 처음 보는 모양의 잔 두 개를 내 앞에 꺼내놓았다. 그리곤 뒤를 돌아 금빛이 도는 붉은 술을 잔에 따랐다.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향을 좀 먼저 맡아봐” 


그렇게 말을 한 그는 한걸음 바에서 떨어져 술잔을 빙빙 돌리며 향을 맡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내게서 그의 시선이 떨어지자 나는 조심스럽게 잔을 쥐어 코 앞으로 가져왔다. 그를 따라 살살 잔을 돌리자 독한 알콜 향이 먼저 느껴졌다. 하지만 부드러운 나무 향과 과일 향이 기분 좋게 이어서 느껴졌다. 향을 맡는 나를 곁눈질로 슬쩍 본 그가 말했다. 


“이 잔 모양이 향기를 모아줘서 잘 느낄 수 있게 해 주거든. 예쁘지? 이제 살짝 입술을 적신다는 느낌으로 조금만 맛을 봐봐.” 


얼굴은 잔을 향한 상태로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본 후 조심스레 나는 잔 안의 술을 맛보았다. 내가 한 모금 들이키는 것을 본 그도 잔을 들어 술을 마셨다. 독할 거라는 예상처럼 알싸한 알콜 맛이 순간 느껴졌지만 달콤한 홍차와 같은 맛이 났다. 시럽과 같이 끈적한 느낌마저 느껴지는 좋은 맛이었다. 놀라서 눈이 커진 내가 그를 보니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 술은 한 개의 오크통에서 숙성시켜 만들거든. 향은 과일이랑 꽃 향기가 나서 좋은데 맛은 복잡하지 않고 심플해. 아무래도 처음 접하는 사람이 마시기엔 좋거든. 여자들도 좋아하고 즐겨 마실 수 있고. 혼자서 마실 땐 칵테일보다는 이게 훨씬 좋지. 천천히 맛을 즐기면서 마시면 빨리 취하지도 않고 오랫동안 이야기할 수 있고."


수긍하는 나에게 그가 말했다.


“너 얼굴을 보니까 오늘은 이런 게 필요할 것 같았어. 밥은 먹었니?”

“아니요. 근데 별로 배고프지 않아요.”

“그럼 과일이라도 좀 먹을래? 딸기 좋아해?”

“네 좋아해요.”

“그래, 좋았어. 잠시만 기다려봐” 


성큼성큼 그는 바를 나가 주방으로 가서는 딸기를 한 아름 챙겨 와 내 눈 앞에서 접시에 담아냈다. 작고 예리한 과도로 꼭지를 따내어 먹기 좋은 크기로 예쁘게 썰어 플레이팅을 했다. 태어나서 과일을 능숙하게 깎는 남자를 눈앞에서 처음 본 나는 그의 손에 집중했다. 나의 우울했던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었다.


“딸기랑 같이 곁들여 마셔도 맛있을 거야” 


그의 말대로 딸기도 함께 마셔도 참 맛있었다. 그렇게 나는 아저씨에게 술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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