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코너에 빈 상품을 채워 넣고 있는데 “저기요”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봤다.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의 젊은 여자와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눈에 들어왔는데, 어정쩡하게 서 있는 아이의 발밑으로 노란 오줌이 흘러 바닥에 타원을 그리며 퍼져나가고 있었다. 얼른 바닥을 닦아야겠다는 생각에 걸레를 가져오려고 몸을 돌리는데 어느 틈에 대걸레를 갖고 나타난 춘자 언니가 여기는 자기가 치우겠다며 나 보고는 하던 일을 마저 하라고 했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얼른 진열대의 빈자리를 채워놓고 아이가 있던 곳을 보니 이미 바닥은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다. 주위를 살피는데 치약 코너에 쭈그려 앉아 선반을 닦고 있는 언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언니에게 다가가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춘자 언니, 고마워!” 그 말에 언니가 뒤를 홱 돌아보더니 “서현이라고 부르라니까”라며 내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찰싹 때렸지만 나는 웃으며 "싫은데"라고 말하곤 도망가버렸다. 웬만한 남자보다 큰 키와 덩치를 가진 언니를 대부분 손님들은 아줌마라고(간혹 아저씨라고) 불렀다. 다들 그녀를 실제 나이인 서른아홉보다 훨씬 많게 봤지만, 나는 짧은 커트 머리에 화장기 없는 언니의 얼굴이 이따금 앳돼 보일 때가 있었다. 언니는 오케이 마트의 엄마 같은 존재였다. 마트가 처음 생기던 7년 전부터 일해온 언니는 직원 2~3명이 할 일을 혼자서도 거뜬히 해냈고, 누구도 하려고 하지 않는 일을 먼저 나서서 하곤 했다. 가끔 답답할 정도로 성실한 언니를 나는 좋아했다.
금요일의 아침 조회시간이었다. 직원들 앞에서 거들먹거리며 떠들기 좋아하는 김과장은 각 파트별로 쓸데없는 꼬투리를 잡더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질 때가 되어서야 “그럼 이걸로 해산”을 외쳤다. 직원들이 자기의 위치로 돌아가기 시작할 때 언니가 김과장을 불렀다.
“과장님... 그런데 명찰은 언제 바꿔주시나요? 개명한지 벌 써 일 년인데...”
“한춘자, 아니 한서현 씨. 그쪽이 명찰을 바꾸고 싶다고 해서 바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업체에 맡기려고 해도 적당한 수량이 모여져야 요청하는 거야. 한춘자 씨 한 명을 위해서 바꿀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춘자 언니와 같이 입사했지만 사장에게 사바사바를 잘해 먼저 승진한 김과장이 말했다.
“그러지 말고 그냥 다시 한춘자로 돌아가는 건 어때요? 그 이름이 훨씬 잘 어울리는데” 그 순간 여기저기서 “큭” 하는 웃음소리가 터졌다. 춘자 언니에겐 미안하지만 나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일 년 전, 한마디 말도 없이 언니는 한춘자에서 한서현이 되어 나타났다. 그래도 아직 30대인데 춘자라는 이름은 영 촌스럽다며 이제부터 한서현으로 불러달라고 했지만, 마트의 어느 누구도 그녀를 서현으로 부르지 않았다. 밉상 중의 밉상인 김과장이지만 그의 말에 동의가 되는 건 솔직히 그녀와 서현이라는 이름은 어울리지 않았다. 언니에게 슬며시 왜 많은 이름 중에 ‘서현’이라는 이름으로 바꿨냐고 물어보니 작명소에서 지어준 이름 다섯 개 중 제일 마음에 드는 이름이었다고 했다. 다섯 개 중이 굳이 서현을 선택한 이유를 묻자 춘자 언니는 난생처음 보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소녀시대의 서현과 이름이 같아서 골랐다고 했다. 소녀시대의 그녀가 귀티가 나보인다나 뭐라나.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소녀시대’와 ‘춘자 언니’ 사이에는 닮은 점이 요만큼도 없었기에 그 얘기를 듣고 모두들 코웃음을 쳤다. 그 전부터 우리들은 언니를 부를 때 그냥 '언니'라고 부르면 될 상황에서도 꼭 '춘자 언니'라고 불렀다. 언니는 그냥 '언니'라고 불리는 것보다 '춘자 언니'가 더 어울렸다. 그렇게 개명을 하고도 1년이 넘도록 언니는 우리의 춘자 언니였다.
김과장과의 대화 끝에 풀 죽은 채로 사무실로 들어간 언니는 포스트잇에 '한서현'라고 써서 명찰 위에 붙였다. 언니는 그런 명찰이 마음에 든 듯 평소보다 더 가슴 위쪽으로 매달고 다녔다. 일하는 도중에 아무도 모르게 떨어져 나가버렸지만. 그렇게 그 날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려고 여자휴게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춘자 언니가 들어왔다.
“지은아, 너 오늘 집에 가? 집에 가면 내가 태워 줄게”
“언니, 엄마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금요일에는 일 끝나고 어머니 병원에 가잖아.” 언니는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는 일을 마치고 항상 치매에 걸린 엄마가 입원해있는 요양병원에 갔다.
“오늘은 동생이 가있기로 했어”
“언니가 태워주면 나야 좋지”
언니는 능숙한 솜씨로 차를 후진으로 빼 나갔다. 우리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남동생이 편의점을 낸다고 돈을 빌려 갔는데 장사가 안돼 걱정이라고 했다. 자기한테는 속옷 한 장 사는 것도 벌벌 떨면서 아픈 엄마의 병원비와 정신 못 차린 남동생에게는 큰돈을 쏟아붓는 언니가 안타까웠다. 아무리 동생이라도 결혼자금으로 모은 돈을 그렇게 쉽게 빌려주면 어떡하느냐고, 시집 안 갈 거냐고 다그쳤지만, 언니는 남자도 없는데 시집은 혼자 가나며 빙긋 웃고 말뿐이었다. 착하기만 한 언니는 가족 앞에서는 더 바보가 됐다. 마티즈 안에 구겨져 있는 언니가 처음으로 작아 보였다.
“춘자 언니, 땡큐!” 차에서 내리며 내가 말했다.
“또, 또! 서현이래도!”
그로부터 일주일 후, 춘자 언니의 생일이 돌아왔다. 언니에게 선물하려고 인터넷으로 주문한 립스틱을 가방에 넣고 출근했다. 마트 입구에서 만난 춘자 언니의 얼굴이 평소답지 않게 어두웠다. 어디 아프냐고 물어봤더니 자꾸 아니라고 하다가, 결국 어머니의 치매 증세가 심해져 어머니도 힘들어하고 병원의 간병인들도 지쳐한다는 사실을 털어놨다. 어머니가 앓고 있는 치매 앞에서는 태산 같던 언니도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위로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저 언니의 손을 힘주어 잡아줄 수밖에 없었다.
퇴근시간이 되어 조촐하게 언니의 생일파티를 하러 마트 근처의 호프집으로 갔다. 친하게 지내는 여자 직원 5명 끼리만 가기로 했는데, 눈치 없는 김과장이 입사 동기를 챙겨 줘야겠다며 굳이 따라나서는 통에 결국 같이 가게 되었다. 하루 종일 심란한 얼굴을 하고 있던 춘자 언니는 자리에 앉자마자 소주를 시키더니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혼자 반 병을 비웠다. 다른 언니들이 천천히 좀 마시라며 춘자 언니를 말렸지만, 김과장은 결혼도 못하고 나이만 먹는게 서러워 저러는 거라며 알지도 못하는 언니의 속을 긁어댔다.
그렇게 우울한 생일파티가 이어지고 춘자 언니는 점점 술에 젖어갈 때, 문득 생일 케이크를 준비하지 못한 게 생각이 났다. 언니가 더 취하기 전에 얼른 밖으로 나가 근처 빵집에서 케이크를 사고 들어왔다. 초를 꽂고 불을 붙인 후 노래를 시작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춘자 언니의 생일 축하합니다”
그 순간이었다. 마지막의 ‘축하합니다’가 끝나기도 전에 술에 취해 반쯤 눈이 풀린 춘자 언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케이크를 들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에이 씨부랄 것들아! 내가 왜 춘자야! 서현이라고 했지! 일 년 전부터 계속 서현이, 서현이라고 부르랬지! 이년이고 저놈이고 다 춘자래... 철학관 가서 삼십만 원이나 주고 지은 이름인데! 남들은 지 이름 말할 때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는 왜 매번 쪽팔려야 하는 건데... 그래서 예쁜 걸로 바꿨더니 왜 불러주질 않아... 이 망할 것들아...”
한바탕 욕을 퍼붓고는 오뎅탕에 머리카락을 빠트린 채로 엎드려 엉엉 우는 춘자 언니의 모습에 우리는 모두 놀라 한동안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호프집에 소란을 일으켜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밖으로 나와 언니를 집까지 바래다주려고 택시를 탔다. 언니의 집으로 향하는 택시에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사람에게 있어 이름이 불려진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이길래 언니는 그토록 서글프게 울며 욕을 해야 했을까. 어쩌면 자신을 가장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수단이지만, 그 누구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게 이름이다. 그런 이름을 바꾼다는 건 마음대로 되는 게 거의 없는 언니의 인생에서 한 가지 만큼은 결정해 보이겠다는 그녀의 의지였던 걸까.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며 언니의 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문득 지은이라는 더없이 평범한 나의 이름이 고맙다가 또 언니에게 미안해졌다. 만약 언니의 이름이 춘자가 아니었다면, 그녀의 삶은 조금 달라졌을까. 앞으로 우리가 그녀를 서현으로 부른다면, 언니의 삶이 서현에 어울리는 모양으로 바뀌어 갈까. 무엇이 되었든 그토록 서현으로 불리고 싶어하는 언니를 춘자로 부르는 건 그녀와 그녀의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나는 언니를 좋아하기 때문에, 내일부터는 절대로 언니를 춘자 언니라고 부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서현 언니. 서현 언니. 나만이라도 그렇게 예쁘게, 사랑을 담아 불러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