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용. 고2 때 같은 반이었던 아이. 그다지 친하지는 않았고 체육 시간에 농구 몇 번 같이했던 사이. 그 외의 모습은 잘 기억나지 않는 그 아이를 나는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를 고등학교 졸업 후 3년 만에 부산에서 만났다. 군대에서 상병을 막 달자마자 나는 전역을 했다. 한참 일할 일병 시절 진지 보수공사 때문에 삽질과 곡괭이질을 무리하게 한 다음 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허리가 나아지질 않아 휴가 때 MRI를 찍어보니 디스크가 많이 삐져나와 신경을 누르고 있었다. 상황이 심각해 병가를 받아 디스크 수술을 했고, 몇 달을 군 병원에 입원해있다가 의병전역을 하게 되었다.
4월에 전역을 하게 되어 다니던 서울의 대학에는 복학하지 못하고 경남 촌구석의 고향 집에서 빈둥대고 있었다. 그때 마침 같이 군 병원에서 생활했던 선임으로부터 국가유공자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혹시 하는 마음에 신청한 서류심사에 통과해서 부산지방보훈청에서 신체검사를 받게 되었다. 검사 날이 되어 기차를 타고 부산역에 내려 보훈청을 찾아가 서류를 제출하고 신체검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 든 할아버지부터 나와 비슷한 젊은 사람들까지 많은 이들로 차있는 대기실에서 누가 어깨에 손을 올리며 내 이름을 불렀다. 뒤를 돌아보니 낯익은 남자가 있었다. 누군지 생각나지 않아 입을 떼지 못하는 내게 그가 말했다. "나 양정용! 우리 경천고 2학년 같은 반!"
외지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니 반가운 마음부터 들었다. 여기는 어쩐 일이냐고 내가 묻자 자기도 군대에서 훈련을 받다가 십자인대가 파열되어 의병전역을 했고 국가유공자 심사를 받으러 왔다고 했다. 고등학생 때와 다르지 않은 앳된 얼굴의 그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계속 고향에서 지낸다고 했다. 휴대폰 번호를 교환하고 내 순서가 먼저 불려 검사를 받고 나왔다. 정용이를 기다렸다가 밥이라도 같이 먹을까 생각했지만, 예약한 기차 시간이 다 돼가 고향에서 한 번 보자는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났고, 안타깝게도 현재 수술부위에 후유증이 없다는 이유로 국가유공자 심사에는 탈락했다. 그때는 허리도 다 나았고, 놀면서 부모님에게 손 벌리는 게 죄송해서 집 근처 읍사무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잊고 있던 정용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정용이는 내게 심사는 어떻게 되었는지, 요새 뭐하며 지내는지를 묻다가 불쑥 자기가 밥을 사 줄 테니 만나자고 했다.
정용이와는 친하지도 않았을뿐더러 그다지 할 말도 별로 없어서 그와의 약속이 달갑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한 번 정도는 만날 수 있었다. 약속 일자를 정하는데 굳이 평일 점심에 만나자고 해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말하니 굳이 내가 일하는 읍사무소 근처로 와서 밥을 사주겠다고 했다. 약속한 당일이 되어 점심시간에 정용이가 정한 냉면집으로 갔다.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인 나와 달리 정용이는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나는 정장을 갖고 있지도 않았는데 말끔히 차려입은 그를 보고 옷차림이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그는 회사에서 오는 길이라고 했다.
비빔냉면 두 개를 시켜놓고 군대 이야기, 고등학교 졸업 후의 생활에 관한 얘기를 하던 중 정용이는 전문대 사진학과에 다니다가 자퇴하고 지금은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휴대폰 대리점을 인수해서 사장님이라며 돈도 꽤 벌고 있다고 말하는데 대학을 졸업하려면 2년 반이나 학교를 더 다녀야 하는 내 처지와 비교가 됐다. 점심시간이 다 끝나가자 정용이에게 “대단하다, 성공했네” 같은 말과 함께 다음에 또 보자는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 다시 읍사무소로 돌아왔다.
그 후로 정용이는 수시로 내게 문자를 보내왔다. 친한 친구에게나 할만한 시시콜콜한 얘기를 늘어놓다가 문자의 마지막에는 매번 자기 일하는 곳을 구경시켜주겠다며 놀러 오라는 말을 했다. 그때마다 휴대폰 대리점에 구경할 게 뭐가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대충 둘러대며 방문을 미뤘다. 고등학생 때 친했던 것도 아니고 친구 무리가 겹치는 것도 아니라서 계속 연락을 해오는 정용이가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정용이는 자기가 밥도 사줬는데 일하는 데로 한번 놀러 와야지 않겠냐는 말을 했고, 냉면 한 그릇 얻어먹은 죄로 주말에 정용이 일하는 일터로 가기로 했다.
정용이는 우리 지역에서는 꽤 유명한 신문사인 영천일보가 있는 건물 1층으로 오라고 했다. 신문사 건물에 도착해서 화장실에 들렸는데 나와 비슷한 또래의 젊은 사람들이 모두 정장을 입고 같은 모양의 배지를 달고 있었다. 정용이가 알려준 장소의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밖에서 볼 때와는 다르게 아주 큰 사무실이었고, 그 안의 절반은 책상, 나머지 절반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주말에도 사람들은 꽤 많이 있어 정용이에게 전화를 걸며 들어가는데 분명 휴대폰 대리점이라고 했는데, 특이하게 건물 벽에는 휴대폰뿐만 아니라 치약, 화장품, 영양제 심지어 냄비까지 진열되어 있었다.
정용이와 통화가 되고 사무실 안쪽의 책상에서 일어나 손을 번쩍 든 그를 향해갔다. 휴대폰 대리점이라더니 이게 웬 사무실이냐고 물었고, 그는 예전의 정장을 입은 채로 이곳은 사업장이고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각각의 사업체를 가진 사장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구경할 게 뭐가 있느냐고 내가 묻자, 그는 사무실과 연결된 교육실 같은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정용이는 화이트보드 앞에 앉아있던 50대 정도 되어 보이는 교수라는 남자에게 나를 소개한 후 들어도 후회 없는 좋은 말씀이니 잘 듣고 1시간 후에 만나자고 했다. 무슨 상황인지 몰라 당황한 채로 앉아있던 내 뒤로 5~6명이 들어왔고, 교수라고 불리는 중년의 남자는 강의를 시작했다.
말로만 듣던 다단계였다. 10년 전인 그 당시에도 다단계의 폐해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교장 선생님으로 퇴직한 친척 어른이 다단계에 전 재산을 쏟아부은 후 온 친척들에게 물건을 사달라고 사정을 하는 통에 우리 집에도 정체 모를 치약, 칫솔, 칫솔 살균기 같은 게 널려 있었다. 나는 겉보기에는 순진해 보였지만 다단계에 빠질 만큼 어리숙하지는 않았다. 법적으로 문제없는 네트워크 마케팅이니, 대기업이 운영하는 휴대폰 선불요금제니, 사파이어 회원이니 하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교수가 지껄이는 동안 정용이가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여기에 끌고 왔을까 하는 생각에 화가 치밀었다.
내용은 순 엉터리여도 말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는 교수라는 사람 때문에 잠시 혹할 뻔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정용에 대한 분노가 더 커서 현혹되지 않았다. 1시간 남짓 진행된 강의가 끝나고 정용이에게 뭐라고 화를 내야 하나 고민하며 교육실을 나오는데 나를 맞이한 건 정용이 아닌 나보다 몇 살 많아 보이는 예쁘장한 여자였다. 그녀는 나보고 정용이 친구라고 얘기 들었다며, 교육은 어땠냐고 묻더니 잠시만 얘기를 더 나누자며 테이블로 나를 데려갔다. 그때만 해도 어렸던 나는 처음 보는 사람을 무시할 만큼 강단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는 스크랩한 신문기사와 알 수 없는 도표들로 채워진 파일 자료를 내 앞에 펼쳐 보이며 그 전의 교수가 했던 강의 내용을 조금 쉽게 설명해나갔다.
다단계에 빠질 생각은 추호도 없던 나는 어떻게 이 자리를 떠야 하나만 궁리했다. 차분히 설명하던 그 여자가 가입비 얘기를 꺼내며 노골적인 속내를 드러낸 순간 중요한 약속이 있다고 말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자는 내 팔목을 잡아당기며 조금만 더 얘기를 들어보라고 했지만 그 손을 뿌리치고 건물 밖으로 걸어 나왔다. 화도 나고 조금 무섭기도 한 마음에 빠른 걸음으로 신문사 건물 입구까지 나왔을 때 정용이가 나를 부르며 달려왔다. 그렇게 갑자기 나가버리면 어떡하느냐는 말을 하는데 누군가 “정용아”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축구를 잘하던 요한이, 늘 쉴 새 없이 말하며 까불던 영철이, 매일 교복 어깨에 비듬을 흘리고 다니던 준호까지. 그들 모두 정용이처럼 검정 정장을 입고 가슴에는 같은 모양의 배지를 달고 있었다. 그렇게 오랜만의 고등학교 동창회가 어색하게 이뤄졌다. 무슨 대학에 갔는지, 군대는 다녀왔는지, 여자친구는 있는지 같은 뻔한 얘기를 그들과 10분쯤 나누다가 시간 될 때 한 번 보자는 말을 겨우 꺼내고 헤어졌다. 정용이와 친구들은 건물 안으로, 나는 밖으로 나갔다. 예상치 못한 친구를 본 탓인지 화는 가라앉았고 정용이에게 다시는 이런 곳에 부르지 말라는 문자를 남겼다.
그 후로 10년이 지났다. 나는 대학을 마치고 몇 개의 직장을 거치다 지금은 서울에 있는 스타트업에서 개발자로 일하고 있다. 고향은 명절에나 찾아가는 정도고 만나는 고향 친구도 다섯 명뿐이다. 그중에 한 명이 지난주에 결혼을 하게 되어 내려간 고향의 결혼식장에서 그를 봤다. 10년 전 신문사 건물 입구에서 만난, 축구를 잘했던 요한이. 서로 어색할 것 같아 아는 척은 하지 않고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나중에 고향 친구에게 물어보니 요한이는 부모님 과수원 일을 돕는다고 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영철이는 부잣집 딸과 결혼해 데릴사위처럼 지내고 있고, 준호는 읍내 입구에 편의점을 차렸는데 나름 장사가 잘 된다고 했다. 그리고 정용이는 5년 전에 고향을 떠난 후론 그와 연락되는 친구는 아무도 없고 가족들과도 연이 끊어졌다고 했다.
지금도 고향에 내려가 그 신문사 건물을 지나갈 때면, 그때 그 동창들과의 멋쩍은 만남이 생각난다. 당시에는 우연히 타지에서 만난 친구를 다단계에 끌어들인 정용이 못됐다고만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그도 최선을 다해서 살아보려고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단계에 빠진다는 건 어쩌면 길을 걸어가다가 예상치 못하게 물웅덩이나 하수구에 빠지는 것과 비슷한 것일 수도 있을까. 앞으로 10년, 그리고 또 10년 후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지 궁금해지다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또 서글퍼진다. 문득 카메라를 목에 걸고 다니며 친구들 사진 찍어주는 걸 좋아했던 고등학생 정용이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