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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석 Oct 15. 2021

당신의 향기

Cheesecake Vol.1 - Autumn

  A야,     


  언제인지 기억은 나지 않는, 어느 날의 일이다. 정처 없는 발걸음에 행로를 맡기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와 버린 것 같았다. 네가 나를 만나기 위해 마중을 나왔던 역. 부끄러워 멀리 앉으려 했을 때 네가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준 벤치. 둘만의 이야기를 풀었던 카페. 너와 걸었던 거리. 멍청하게도 그제야 나는 온전치도 못한, 너와 새겼던 추억의 편린을 더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제야 생각했다. 나는 왜 여기에 와 버린 걸까. 왜, 대체, 무엇 때문에.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난 그 날 문을 나서면서 이미 그 곳에 오리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어쩌면 내 가슴 속엔 확고한 벡터 하나가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나도 모르게 크기를 키워 가던 그 불의의 화살표는 기어이 나를 여기로 이끌고 만 것이다. 굳이 주저주저하면서, 이미 자괴감과 회한의 흉터로 가득한 마음에 너의 향기를 좇아 다시 한 번 스스로 비수를 꽂아 넣으려 한 것이다. 처절하게, 그리고 비참하게.     


  그래, 비수였다. 너는 날카로운 칼날 같은 사람이었다. 너를 꽉 쥐려 하면 내 손에는 비릿하고 검붉은 피가 깊숙한 상처를 타고 흘러내렸고, 너를 놓으려 하면 이내 나는 무장을 해제당한 군인처럼 무방비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 때, 어리석게도 나는 너의 칼집이 되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널 만날 수 있었다는 그 작디 작은 가능성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네가 단단하고 예리하게 벼려진 금속성의 파편인 것만을 불공평한 확률인 양 저주하고 있었다.     




  A야,     


  지금은 네가 없는 카페에 앉아 머리가 아프도록 꽉 차 있는 진한 커피향을 맡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는 그 곳에 가득한 커피 냄새처럼, 이제껏 내 삶을 보이지 않게 채우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내 삶을 숨이 막히도록 텁텁하게 꽉 메우고 있다고 해야 하겠다. 내 어린 시절은 온전히 너로 가득했는데, 이미 너의 말 하나하나가 내 몸에서 뜨거운 혈액으로 흐르고 있는데. 너는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문득 네 생각이 나도, 떠다니는 목소리 속에 혹시나 돌아보아도, 너를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봐도, 그럴 리가. 네가 거기에 있을 리가, 없지.     


  문득, 향은 언제나 다른 모든 감각에 우선하지만 얼마 안 있어 잊혀 버린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익숙함. 그만큼 편안하고 섬뜩한 개념이 또 어디 있을까. 나는 너의 향기에 강하게 이끌렸지만, 이내 그만 지나치게 편해지고 말았던 것 같다. 어느새 내가 너의 심판대에 올라 선고를 받기 전까지. 현실을 외면하는 건 쉬웠을지 모른다. 그러나 추적자를 따돌릴 순 있을지 몰라도, 죄책감보다는 빨리 도망칠 수 없다.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으면 어땠을까, 내가 그런 무의미한 자책의 고리에서 간신히 빠져나왔을 때쯤, 야속하게도 더 이상 진득하게 달라붙던 커피 향은 나지 않았다.   



  

  A야,    

 

  너는 아직도 내가 기억하던 그 사람일까. 비록 다시는 너를 안을 수 없겠지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너는 내가 기억하던 그 향기를 아직 가지고 있을까. 반면 너는 날 기억하고 있을까. 내가 너라는 우주 안에서 향 없는 잡초만큼이라도 기억되고 있을까. 어쩌면 그저 너와 난 엄청난 우연으로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 원래 흘려보냈어야 할 너를 커다란 둑처럼 억지로 내 안에 가두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나는 왜, 어쩌면 이제 날 잊어버렸을 널 위해 회한 가득한 무거운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걸까.     




  A야,     


  너의 이름 석 자를 부르곤, 나는 목이 메어 울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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